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91화 (91/130)

3화

연말의 시간은 다른 때보다 유독 빠르게 흐른다. 한 해를 정리하고 마무리할 여유는 전혀 없을 정도로 바쁘게. 안 그래도 빡빡한 일정에 시상식을 비롯한 연말 행사들이 추가되는 만큼 연말에 존재하는 스케줄의 개수는 인기의 척도였다.

숨 가쁘게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중요한 시상식을 마치고 하루 휴가를 받았던 게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오늘이 크리스마스니까 실제로도 2주나 지난 일이긴 하지만.

“형 오늘 저녁에 눈 온대요!”

오전부터 시작되는 예능 촬영을 위해 방송국으로 가는 길, 갑자기 뒤에서 불쑥 휴대폰을 내민 준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 날씨가 떠 있는 화면에는 20시부터 눈 표시가 되어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진짜 오랜만 아니에요?”

“3년인가, 4년 전에 한 번 있었잖아.”

“3년 전이에요. 우리 처음 대상 받았을 때니까.”

그룹 활동과 관련된 기억력 하나는 엄청난 준이 바로 대답했다. 3년 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틀릴 때가 더 많은 일기 예보지만, 눈이 온다니까 괜히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길거리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가게 문에 빨간 양말을 달아놓은 곳도 있고, 트리도 보였다. 내려서 걸어보고 싶었지만 차는 무심하고 빠르게 길거리를 지나쳐 방송국 주차장으로 곧장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 오늘 잘 부탁해요. 얼굴 보기 힘든 거로 유명한 레브를 이렇게 보네.”

오늘 진행하게 된 예능 MC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이 촬영이 다 끝나고, 인터뷰 하나만 하면 오늘 스케줄은 끝이었다. 모처럼 크리스마스니까 여유롭게 받았다며 웃던 매니저 형이 떠올라 기운이 났다.

‘영화 한 편 볼까.’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데 크리스마스 날이니 어린이 애니메이션까지 자리가 꽉 찼을 게 분명했다. 어차피 알아볼까 봐 겁나서 가지도 못하고. 아쉬운 대로 케이크라도 사 올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았다. 주변 빵집 다 돌아봐도 분명 텅 비었겠지.

이렇게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지구랑 오랜만에 오붓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나란히 이불 덮고 누워서 같이 맛있는 것만 먹어도 좋겠다. 그렇게 사소한 기대를 안고 예능 촬영과 인터뷰까지 모두 끝냈는데.

“형, 진짜 미안해요.”

“아니야. 작업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약속이 취소됐다. 지구와 함께 작업하던 가수가 오늘 시간이 있냐는 문자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넉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1월에 해외 일정이 생겼다며, 최대한 빨리 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도무지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고. 오늘이 아니면 내일부터는 또 스케줄이 가득해서 따로 시간을 뺄 수가 없고, 2월 초에는 우리가 해외로 출국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원래 앨범 나머지 수록곡들까지 다 나오면 전체적인 컨셉까지 고려해서 몇 번 수정하고 다듬은 다음에, 여러 버전 다 녹음해볼 예정이었는데 1월이 통째로 날아가서 일단 바로 녹음하기로 했어요. 일단 오늘 최대한 많이 해보려고요.”

가수와 끊임없이 문자를 나누면서 지구가 설명했다. 작업할 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예민하고 칼 같아지는 지구에게 이 상황이 굉장히 불만족스러울 것이 뻔했기에 걱정스럽기만 했다.

“바로 녹음 들어가도 되겠어?”

“이렇게 됐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자정 전에는 들어올게요. 연락도 꼬박꼬박 할게요.”

지구는 끝까지 미안한 표정이었다. 옷도 다 입어놓고 방 밖으로 발을 못 떼길래, 가까이 다가가서 등을 살짝 밀었다.

“빨리 가야 빨리 오지.”

그대로 현관문 앞까지 쭉 밀어서 신발 신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패딩 하나 달랑 챙겨 입은 게 추워 보여서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목도리를 집어 들어 목에 둘러줬다.

“이거 형 목도리 아니에요?”

“보고 싶을 때마다 거기 얼굴 파묻고 있으라고.”

“아, 형 진짜…….”

지구가 목도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웃었다. 형 냄새가 난다며 좋은 티를 잔뜩 내던 지구는 곧 손을 흔들며 현관문 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혼자 남은 집은 조용했다. 외롭지는 않았지만 심심해서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봤지만, 흥미가 가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여러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넘기다 보니 유럽 여행 패키지 상품을 판매하는 홈쇼핑 채널이 떴다.

“유럽 하면 파리 많이들 생각하시잖아요.”

유명한 관광 명소들이 화면에 스쳐 지나갔다. 여행에 취미는 없었지만, 쭉 보고 있으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돈이 있어도 구매할 수가 없는 패키지 상품을 그렇게 방송이 종료될 때까지 보고 있다가 다시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정확히 1분 뒤에 휴대폰을 들어 멤버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전화를 끊고 정확히 6분 만에 도착한 준은 자기 집인 것처럼 편하게 소파에 드러누웠다. 시간을 보아하니 씻지도 않고 위에 패딩만 대충 걸쳐 입고 나온 모양이었다. 볼 게 없어서 껐던 TV를 다시 켜며 준이 말했다.

“지구 형이 진짜 제일 바쁜 것 같아요. 맨날 따로 일 있고.”

“다른 가수들이랑 작업하니까.”

우리 그룹 곡만 작업할 때도 충분히 제일 바빴는데, 다른 가수들하고 작업하기 시작하니까 더 바빠지는 건 당연했다. 오늘은 언제쯤 들어오려나 싶어 7시가 조금 넘은 시계를 확인하는데 준이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그래도 지구 형 진짜 괜찮지 않아요?”

“뭐가?”

“연락도 잘하고, 어디 밖으로 도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고. 선배님들한테 철벽도 잘 치잖아요. 아마 오늘도 분명히 자정 안에 들어올걸요.”

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휴대폰이 울리면서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지금부터 녹음 들어가요]

꼬박꼬박 상황을 보고하는 문자에, 나도 네 얘기 중이었다는 답장을 보내줬다. 그리고 준에게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라도 꺼내 줄까 물으려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1층에서 만났다며 예준과 휘영이 함께 들어왔다.

“넌 뭘 이렇게 들고 왔어?”

“크리스마스니까 케이크 먹어야지. 집에 많아서 몇 개 들고 왔어.”

휘영이 들고 온 봉지 속에는 티라미수 케이크를 비롯한 여러 디저트가 잔뜩 들어 있었다. 거기에 추가로 딸기 한 팩. 보기만 해도 달달한 디저트들은 하나같이 휘영이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한 것들이었다. 하나씩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포크를 들고 와 한 명씩 손에 쥐여 주자 다들 말없이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형 허리는 괜찮아요?”

벌써 마카롱을 다섯 개나 먹고 하나 더 집어 든 준이 물었다. 바빠서 지구랑 마지막으로 한지 꽤 됐는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지.

“갑자기 왜?”

“형 계속 허리 아프다고 그랬잖아요. 누워 있다가 올라오는 안무 힘들다고.”

아. 다른 얘기구나. 저번 활동 타이틀곡 안무 중에 바닥에 누워 있다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게 있는데, 한 번 잘못해서 삐끗하는 바람에 한동안 고생을 좀 했다. 이제 많이 괜찮아지긴 했는데. 허리를 몇 번 눌러보다가 휴가 계획을 하나 더 추가하기로 했다.

“1월에 휴가받으면 병원 가려고.”

“나랑 같이 가자.”

이왕 가는 김에 지구도 같이 데려가서 검사받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에, 휘영이 초코 케이크 위에 딸기를 올리면서 제안했다.

“너도 어디 아파?”

“요즘 뭐 먹으면 소화가 안 돼.”

사진 찍는 것 빼고는 딱히 좋아하는 게 없는 휘영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단 음식을 많이 먹는 것뿐이었다. 최근에도 곧잘 먹길래 그런 증상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내시경 한 번 받아보려고.”

“언제부터?”

“두 달 전인가? 신경 안 쓰고 그냥 먹었지. 근데 영 속이 안 좋아서 이제 좀 줄이려고.”

휘영이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살짝 밀더니 딸기를 앞으로 끌어왔다. 조금 전까지 케이크 엄청 퍼먹어 놓고. 여기저기 아픈 곳을 호소하는 동생들을 보며 예준이 짧게 혀를 찼다.

“이게 아이돌인지, 환자인지 모르겠네.”

“형은 어디 아픈 데 없어요?”

“난 관절. 다음 주면 서른이야.”

“아…….”

스물아홉의 마지막 주를 보내는 중인 예준이 팔을 주무르며 한탄처럼 내뱉었다. 관절이라는 단어에 준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갑자기 거실이 조용해졌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이돌이라는 직업의 평균 연령대가 워낙 어리다 보니 서른이라는 숫자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2주만 더 지나면 데뷔 6주년이니 그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당연했다. 서바이벌 ID 촬영할 때가, 신인상 받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지.

“진짜 일찍 데뷔한 놈이 승자라니까.”

예준이 소파에 누워서 뒹굴던 준을 쳐다보자, 내년에 스물넷이 되는 막내가 손으로 브이를 그려 보였다. 미성년자 때 데뷔하니까 6년 차인데도 반오십이 안 되는구나.

결국, 상처만 남은 나이 얘기가 끝나고, 박스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있던 보드게임을 꺼내서 내리 다섯 판을 했다. 혼자만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예준은 이제 모여서 놀기만 해도 지친다며 일어섰다. 누구보다 신나게 주사위를 굴리던 예준이었기에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지만,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모두 이만 가겠다며 겉옷을 챙겨 입었다.

입안이 텁텁해서 양치도 한 번 하고, 깨끗하게 뒷정리를 끝내고 나니 11시였다. 크리스마스는 다 지나갔지만, 여전히 TV에서는 특선 영화가 한창이었다. 눈 온다더니 눈도 안 오고, 지구도 안 와서 영화나 보면서 기다리려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다 또 깜빡 잠들 줄은 정말, 전혀 생각도 못 했다.

“형,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감기 걸리게.”

평소 주변의 작은 소음은 거의 무시하고 자는 편인데도, 지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말을 걸자마자 잠에서 깼다. 피곤하면 방에 가서 자라고 재촉하기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지구와 나란히 방으로 들어왔다.

“잠깐만요. 금방 씻고 올게요.”

편한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간 지구는 정말 금방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거칠게 털며 침대로 오려고 하길래, 친절하게 서랍 안에 있는 드라이기를 꺼내줬다.

“머리 말려.”

“네.”

드라이기를 받은 지구가 거울 앞에 앉아서 열심히 머리를 말리는 동안,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42분이라는 시간 위로 26일이라고 적힌 날짜가 보였다. 크리스마스 지났네.

“작업은 잘 했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음에 재녹음하기로 했어요.”

흠뻑 젖어있던 머리를 적당히 말린 지구가 드라이기 코드를 뽑았다. 계속 울리던 드라이기 소리가 멈추자마자 방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크리스마스 다 지나서 어떡해요.”

“괜찮아, 생각해보니까 딱히 특별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더라고. 케이크라도 먹을래? 남은 거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할 수 있는 게 왜 없어요.”

드라이기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다가온 지구가 옆자리에 눕지 않고 위로 살짝 올라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벌어질 장면이 자연스럽게 예상이 돼서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았다.

“야, 내일 스케줄.”

“안 넣을게요.”

뭘 안 넣어. 참신한 설득에 웃음이 터짐과 동시에 문득 옛날 기억이 올라왔다. 처음 호텔에서 했던 날도 이맘때였는데, 그날 이후로 부끄러워서 한동안 하자는 말도 못 꺼내던 지구가 생각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5년 동안 사람이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넣지만 않으면 괜찮겠지. 크게 무리 가는 것도 아니고, 무대에 지장도 없고. 와중에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 설득당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알았어.”

내가 자기 웃는 얼굴에 약하다는 거 알고 자꾸만 이렇게 써먹으니까,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다. 막 자다 깼는데도 얼굴 보자마자 피가 쏠리는 걸 보면 나도 진짜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못 이기는 척 조용히 목에 팔을 감았다.

쇄골 위로 천천히 입술을 내리누른 지구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끌어내리기만 해도 손쉽게 벗겨지는 바지와 속옷이 나란히 침대 아래로 떨어지고, 양쪽 팔로 몸을 지탱한 지구가 몸을 아래로 낮추고 속삭였다.

“움직일게요.”

예고까지 해준 지구가 잠깐 기다렸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복적으로, 느리게 맞닿은 곳이 스칠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도 없는 집인데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카메라 앞에 하루 종일 서 있다 보니 그 부작용인 것 같았다.

“왜 그래요, 소리 내요.”

나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을 막았더니, 지구가 손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손을 붙잡은 그 상태 그대로 속도를 올렸다.

“야, 좀 빠, 빠른 것 같은데.”

“하아, 형. 손으로 만져주면 안 돼요?”

숨이 차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 꺼냈지만,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손에 살짝 깍지까지 끼면서, 은근슬쩍 묻는 목소리에 꽉 감고 있던 눈을 떴더니 말은 다 해놓고 귀까지 붉어진 채로 물어보는 얼굴이 보였다.

몇 년이 지났든, 얼마나 익숙해졌던 역시 온지구는 온지구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왔다. 왜 웃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얼굴이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천천히 깍지 낀 손을 빼서 지구가 부탁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 새벽에는 예정보다 늦은 눈이 내렸다. 물론 침대에만 줄곧 있었던 탓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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