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10화 (110/130)

22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싹싹한 목소리로 인사한 세 사람이 그대로 연습실로 사라졌다. 시끄럽던 말소리가 뚝 멎었는데도 복도는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 연습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 때문이었다. 이렇게 연습생이 많은 줄 몰랐는데. 바로 앞에 있는 연습실 문을 살짝 기웃거리다가, 안에서 춤추던 연습생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아, 네. 계속 연습해요.”

잘하고 있던 안무를 멈추고, 허리를 90도로 팍 꺾은 연습생이 인사를 했다. 깜짝 놀라서 대충 고개를 숙이고 급히 문 앞을 벗어났다.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방금 전에 문득 봤던 격한 춤을 떠올리며 괜히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막 시작하려는 아이들이라 그런가…….

괜히 멀쩡히 잘 잡고 있는 커피를 고쳐 잡으며 지구 작업실 앞까지 쭉 걸어갔다. 노크를 해도 들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형. 왔어요?”

문을 열자마자 앉아있던 지구가 의자를 틀어 이쪽을 바라봤다. 당연히 몰입해서 뭔가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도 안 하고 갑자기 찾아온 건데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마치 들어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지구가 작업하던 것을 저장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사용해온 작업실에는 지구의 흔적이 가득했다. 데뷔 초에는 그냥 간단한 기계만 놓여 있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저것 생겨서 이제는 웬만한 큰 작업실 뺨치게 좋았다. 물론 여기 있는 것들 중에 내가 다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만지고 있는 저것도 어떻게 쓰는 건지 잘 몰랐다.

“이거 마셔.”

라떼를 받아든 지구가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제 새벽 스케줄 때문에 많이 자지도 못했을 텐데,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으니 아직 피곤할 게 뻔했다. 건네준 라떼가 조금이라도 피곤함을 달래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내 몫의 아이스초코를 들고 바로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음료 속의 얼음이 서로 부딪히며 이리저리 요동쳤다. 따뜻한 라떼를 꽉 잡고 있느라 뜨거워진 손을 얼음 담긴 컵이 식혀줬다.

“너 나 오는 줄 알았어?”

“매니저 형이 방금 전에 문자했어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몇 번 터치한 지구가 화면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회사1층 카페인데 좀 있다가 하현이 너 작업실 간다]

[네]

아까 카페에서 음료 주문할 때 보낸 문자인 것 같았다. 작업실 들르는 게 큰일도 아닌데 일일이 이렇게 문자를 해주나.

“이런 거 매니저 형이 다 문자로 알려줘?”

“아, 그 저번에…….”

지구가 갑자기 말을 흐렸다. 저번에? 뭔가 들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새에 작업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습생이 작업실을 헷갈려서 이쪽으로 들어왔거든요. 중요한 거 작업 중이었는데, 사고를 쳐서……. 그날 소리를 좀 쳤거든요.”

사고를 쳤다는 걸 들어보니 대충 뭔지 알 것 같았다. 회사에 있는 작업실들 문이 전부 똑같아서 충분히 잘못 열 수 있었다. 따로 표시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무슨 사고 쳤는데?”

“놀라서 나가려다가 넘어졌어요. 발이 걸려서…….”

지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뒤는 듣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였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지구가 소리를 쳤을 정도면 뭔가 날려 먹었겠지. 기계에 연결된 선이 여러 개고, 건반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악기가 놓여 있어서 뭐 하나 꺼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따로 얘기를 안 했더니, 그냥 작업 중에 갑자기 들어와서 화낸 줄 알고 미리 문자해준 것 같아요. 요즘 계약 만료 때문에 예민한 줄 알거든요.”

“왜 말 안 했어. 애가 사고 쳤다고 하지.”

“걔가 어리거든요. 열다섯 살인데…….”

아이돌 평균 데뷔 나이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요즘에, 열다섯 살 연습생이 그리 어린 건 아니었다. 다만 열다섯 살에 처음 소속사를 들어갔던 지구한테는 남 같지 않았을 뿐이었다.

“언제 데뷔하게 될지 모르는데, 괜히 마이너스 요소 될까 봐요.”

진지하게 작업할 때는 진짜 예민한 앤데, 착해가지고. 이런 부분이 좋은 거지만. 염색이 다 빠진 지 오래된 까만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잦은 염색으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내 머리카락과 다르게 엉키는 거 하나 없이 잘 흐트러졌다.

“흑발이 베스트라 좋겠다. 난 염색 너무 많이 해서 다 상했는데.”

“형은 이것저것 다 잘 어울리니까요.”

공백기 동안 염색을 하지 않아서 점점 원래 색을 찾아가는 머리카락을 지구가 손가락으로 살짝 잡았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면서 웃더니, 사람이 잠깐 숨을 멈춘 사이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의자를 빙글 돌려버렸다.

“형 이거 들어볼래요?”

“뭔데?”

“마지막 선물이요.”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싶다던 그 곡이었다. 책상 위를 보니, 이미 가사를 다 적어두고 그 옆에 파트 분배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한번 들어보라며 헤드폰을 머리 위로 씌워주자마자 음악이 재생됐다.

“어…….”

“아직 마무리가 덜 됐는데, 마저 다듬고 이번 주 안에 가이드 녹음하려고요.”

지금까지 지구가 만든, 무수히 많은 노래들을 들어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최근에는 잔잔한 곡을 위주로 만들지만, 예전에는 밝고 경쾌한 노래도 자주 작곡했다. 항상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정성을 기울인 곡은 처음인 것 같았다. 생각한 것보다 밝은 느낌이긴 했다. 악기를 몇 개나 쓴 거지. 각 소리들이 적절하게 조화돼서 듣기도 편하고 전체적으로 풍성했다.

“악기 많이 썼네.”

“사운드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가장 최근에 지구가 만든 노래는 저번에 미국 가수와 협업을 하려다가 나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잠깐 중단된 곡이었다. 시간상으로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깜짝 놀랄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물론 그 곡도 당연히 좋았지만 이건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아, 마지막 선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정말 아끼는 곡이구나. 이 곡을 다 같이 불러서……. 머릿속에 녹음을 끝내고, 공식 SNS계정에 음원을 올리는 모습까지 미리 그려봤다.

반주만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좋으니까 가사가 붙으면 더 좋겠지. 팬들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 남은 부분을 계속 듣는데 점점 목이 메어왔다. 아직 가사 한 줄 없는데. 심호흡을 하며 답답한 목을 달랬다. 해체가 가까워져 오니 어딘가 고장이 난 것처럼 문득문득 가슴이 먹먹했다.

* * *

저번에 각자 집에서 촬영한 영상 편집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앞으로는 컴백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테니까, 빨리 촬영하고 끝내자는 의견에 급하게 스튜디오를 빌렸다.

“안녕하세요.”

스튜디오 촬영은 익숙한데, 단독 리얼리티를 이런 곳에서 찍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리 설치해둔 커다란 스크린 화면이 펄럭였다. 무슨 영화 보는 것도 아니고, 저런 큰 화면으로 스스로를 봐야 한다니.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MC는 평소 친분이 있는 개그맨이었다. 시상식에서 처음 만나 같이 사진 찍은 걸 시작으로, 저번 콘서트 때는 사회를 맡아주기도 했다. 나머지 패널들도 초면은 아니었다. 전부 방송국에서 한 번씩이라도 스쳐 지나간 유명한 예능인들이었다.

앞에 커다란 스크린을 두고, 그 앞 테이블에 일자로 앉았다. MC와 패널들은 우리 맞은편에 쭉 앉았다. MC가 한 명, 패널이 네 명. 마주 보고 앉아있으니 짝을 지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 됐다.

한 명씩 소개를 하고 리얼리티에 대한 설명을 했다. 긴 공백기 끝에 드디어 컴백을 하게 됐고, 그런 컴백 준비 과정을 하나하나 다 살펴볼 수 있는 리얼리티라고. 본격적으로 영상을 보기 전에 MC와 패널들과 함께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자, 그럼 각자 집에서 뭐 하고 사는지 좀 볼까요?”

영상이 켜지자마자 처음으로 예준이 등장했다. 물음표가 가득한 자막과 함께 나타난 예준은 상반신을 탈의한 상태였다.

“시작부터 우리 팬분들이 아주 좋아하시겠어요.”

MC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거실을 돌아다니던 예준은 곧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준은 시종일관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그 장면을 관람했다. 입에 주먹이 들어갈 기세였다.

“저, 저 형은 왜 옷을 벗고 돌아다니죠?”

“아아, 혹시 촬영하는 걸 몰랐나요?”

“아니요…… 잠이 덜 깨서.”

카메라 의식을 전혀 안 했는지 예준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웬일로 목소리 크기가 줄어든 걸 보니 정말 본인도 생각 없이 나온 행동인 것 같았다. 스스로 관심받는 걸 좋아한다고 밝힌 예준은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술술 나올 말도 망설이는 나와는 타고난 성격부터 달랐다.

예준은 집에서 게임을 했다. 그러다가 스트레칭하는 걸 보여주더니, 갑자기 먹방을 찍기까지 했다. 역시나 컨텐츠가 없는 건 다들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예준은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무난하게 촬영을 끝마쳤다.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운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영상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가 제 집인데요.”

정신없이 예준의 하루를 지켜보다가, 순간 화면이 넘어가면서 등장한 내 얼굴에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색함에 스튜디오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어색하죠? 뭐 숨겨놓은 거 있나요?”

“집을 좀 급하게 치우느라.”

“많이 더러웠나 봅니다.”

‘집 소개 중……’ 자막과 함께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내가 2배속이 되어서 나왔다. 욕실까지 보여주는 나에게 패널이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진짜 할 거 없었나 보네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다음에도 프라이팬 위에서 이것저것 구워내고,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보고 싶지 않아 계속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패널들은 먹잇감을 잡았다는 듯이 자꾸만 말을 걸었다.

“게임 잘 안 해요?”

“잘 안 합니다…….”

“어쩐지. 다른 게임 하면 영영 브론즈일 컨트롤이라서요.”

열심히 요리하는 장면은 3분도 채 안 나오고 사라지고, 할 게 없어서 딱 한 시간 했던 게임 장면만 계속 나왔다. 멍청한 표정과 어정쩡한 손놀림의 조화가 영 불안해 보였다.

“깜짝이야.”

스스로 스킬이 나오는 K 버튼을 눌러놓고, 타격음에 놀라서 뭘 눌렀는지 찾아보는 모습이 눈 뜨고는 봐주기 힘들 만큼 멍청해 보였다. 차라리 다른 걸 할걸, 하고 후회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할 게 없었다. 저 때로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또 저 게임을 켤 것 같았다.

영상이 나오는 내내 놀림만 당하다가, 마지막에 겨우 ‘요리:부족 게임:부족’이라는 자막과 함께 스크린에서 사라질 수 있었다.

“여기는 집이 예쁘네요. 누구 집이죠?”

“아, 저요.”

내가 사라진 화면에는 휘영의 집이 잡혔다. 다 같이 만날 때는 주로 예준의 집에 모여서 몇 번 가진 않았지만, 처음 이사했을 때 가구 배치 진짜 잘했다고 칭찬한 기억이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손을 흔든 휘영이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면을 풍경 사진이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사진 찍는 거 좋아하나 봐요.”

“아, 네.”

“사람 사진은 없네. 왜 풍경만 찍어요?”

“풍경 말고 동물이랑 사물도 찍어요.”

카메라 앞에 선 휘영이 이 사진, 저 사진을 가리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계속 저 얘기만 했는지, 말이 2배속, 4배속으로 빨라지더니 결국 뒤쪽은 편집 당했다. 사진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 자막과 함께 화면이 전환되면서, 막 이사했다고 해도 무방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음…… 여기는 사람이 안 사는 것 같은데?”

MC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멘트를 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확실히 내가 봐도 화면 속 집은 그냥 깨끗한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가끔 지구 집에 같이 가도 침대만 쓰고, 거의 우리 집에 같이 있었으니까. 저거 찍은 날이 지구가 한 달 만에 자기 집에서 잔 날이었다.

“제가 정리하는 걸 좋아해서요.”

“맞아요. 지구 형이 진짜, 진짜 사람 사는 거 같지 않게 살거든요. 뭐 하나 바닥에 놓는 법이 없어요.”

지구 집에 사람 사는 흔적이 없는 이유를 눈치챈 준이 급하게 지원사격을 시작했다.

“그래도 저건 너무 생활 흔적이 없는데.”

“뭐죠? 집 사 놓고 어디 나가 사나요?”

큰일 났다. 아이돌이 독립하고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좀 걸릴 만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서만 있지 말고, 지구네 집에도 몇 번씩 갈걸. 당황한 탓에 뭐라 대신 변명해줄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방송에서, 게스트들을 이런저런 구설수로 은근히 몰아가는 진행을 즐기는 패널의 장난스러운 말에 휘영이 불쑥 끼어들어 한 마디 놓았다.

“지구가 회사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거든요. 그래서 집에 잘 안 들어가요.”

그 말에 예준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영혼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고갯짓이 제법 거셌다. 우리보다 더 열심히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멤버들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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