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휘영은 잡힌 손을 같이 흔들어줬고, 준은 눈을 마주치며 짧게 오른쪽 눈을 깜빡였다. 7년 동안 쌓아온 정이 여기서 이렇게 나오는구나. 한마디 말도, 미리 주고받은 신호도 없는데 다들 나서서 저렇게 해주는 걸 보니까.
“아, 작업실에 자주 가나요?”
“네. 작곡 때문에.”
드디어 패널들이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자 지구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집에 비워두는 사람처럼 작업실에서 먹고, 자고 하진 않지만, 가끔 필요에 따라 밤을 새는 경우도 있긴 했다. 다행히 더 이상 몰아갈 생각은 없는지, 웃으며 상황이 종료됐다.
“집에도 작업실이 있네요? 혼자 이렇게 다 하는 거예요?”
“저희 노래는 가사도 지구가 쓸 때가 많으니까요.”
“와, 대단하네요.”
지구는 정말 성실하게 본인의 일과를 여과 없이 보여줬다. 작업실에 있다가, 거실에 나와서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놓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좋아하는 영화도 한 편 봤다. 정말 한적하고 조용하게 하루를 보냈다. 뭐 방송 분량을 뽑을 만한 행동도 없었다.
“원래도 저렇게 조용히 있나요? 집에서?”
“아, 네. 평소에도.”
“컨셉 같은데? 하루 종일 안 심심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패널이 소리 내서 웃으며 영상을 가리켰다. 7년간 쭉 지구의 룸메이트이자 실질적 동거인이었던 내 눈에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색해 보일만 했다. 그래서 줄곧 같이 살아온 애인으로서 증언을 해줬다.
“원래 저래요, 하루 종일. 게임 같은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가요? 게임 안 좋아하면 대체 뭐 해요?”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노래도 듣고 그래요.”
본인이 말하기도 전에 내가 이렇게 떠들어도 되나, 싶었지만 같은 멤버인데 뭐 어떤가 싶었다. 그렇게 지구의 차례를 겨우 넘긴 후에 준의 영상으로 넘어가자마자 분위기가 편해졌다. 막내인 준이 이런 촬영에서 구석에 몰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오늘 역시 엉성하게 치운 바람에 옷장에서 튀어나온 옷자락 하나로 잔뜩 놀림을 당했다.
촬영이 끝나고, MC와 패널들의 요청에 같이 사진도 찍었다. 예능인이라 그런지 말하는 게 거침이 없고, 말이 쉴 새 없이 날아와서 당황한 게 여러 번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매니저 형에게 물병을 받아 마시고, 옆에서 손을 내미는 지구에게 넘겨줬다.
“다들 장난기가 너무 많으신데?”
예준이 안전벨트를 하며 한 마디 던졌다. 매니저 형이 썼던 모자를 벗으며 머리를 한 번 넘겼다.
“요즘 예능 많이 나오는 사람들이야. 잘 나가는 사람들만 섭외한 건데……좀 미스였던 것 같다. 이게 그냥 예능이 아니라 리얼리티라는 걸 더 감안했어야 하는데.”
“찔리는 부분은 골라서 푹푹 찌르던데.”
“근데 지구 넌 왜 그렇게 집이 휑하냐?”
매니저 형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시동을 걸다 말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막 벨트를 매고 있던 지구가 천천히 매니저 형과 눈을 맞췄다. 누가 봐도 찔리는 구석이 많은 얼굴이었다.
“네?”
“솔직히 말해봐, 너 연애하냐?”
눈을 가늘게 뜬 매니저 형이 정곡을 찔렀다. 정확히 연애를 시작한 지는 7년이 다 되어갔지만, 매니저 형은 각자 독립을 한 이후에 시작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지구가 워낙 이것저것 주변에 티를 내지 않으니 연애도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지구의 대답이 늦자, 매니저 형은 이미 결론을 내린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해체하는 마당에 뭐라고 할 생각도 없어. 아까 너네 열심히 실드 쳐주는 거 보니까 다 아는 것 같더라.”
매니저 형이 멤버들을 차례로 쭉 쳐다봤다. 예준은 모르는 척 휴대폰으로 계속 게임을 했고, 휘영은“전 그냥 곤란해 보여서.”하고 변명을 했다. 와중에 준이 대놓고 시선을 피했고, 매니저 형은 확신을 가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눈 피하네.”
“안 피했는데요.”
“너 지금 피했잖아. 너희들끼리만 아냐?”
매니저 형이 짐짓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갑작스러운 출발에 몸이 덜컹거리며 앞으로 쏠렸다. 뒤늦게 안전벨트를 채우고 등을 뒤로 편하게 기대는데 매니저 형이 한 마디 더 얹었다.
“내가 그래도 6년 넘게 매니저 하고 있는데 어디 가서 말할 사람 같냐?”
다 안다. 매니저 형이 입이 무거운 사람인 것도 알고, 우리를 담당 연예인보다 친한 동생쯤으로 생각해주는 것도 알고. 하지만 우리 사이를 받아들여 주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먼저 눈치 채고 얘기한 멤버들과는 다른 경우니까.
“어쨌든 그, 집이 너무 휑한데 나가 사는 거 아니냐…… 그 부분은 편집될 거야. 아니, 그래서 진짜 연애 안 해?”
“형 온지구 몰라요? 우주가 두 쪽 나도 여자 안 만나게 생겼잖아요.”
“그래?”
매니저 형은 끝까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파트에 다다랐을 때는 장난스러운 말투로“말 안 해줄 거면 얼른 내려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매니저 형이 수십 번을 더 투덜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
“난 거짓말 안 했다. 진짜 여자 안 만나잖아.”
예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우리를 차례로 한 번씩 봤다. 그래, 여자는 안 만나지. 예준은 정말 결백했다. 장난스러운 얼굴을 향해 손을 몇 번 흔들어주고 나란히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 지구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까 화면 속의 깨끗한 집을 보면서 계속 생각한 게 있었다. 해체하면 아예 같이 살고 싶다고. 집에 들어가서 해도 되는 말이지만 왠지 지금 바로 말하고 싶었다.
“우리 해체하면 같이 살까?”
지금도 충분히 같이 살다시피 하고 있지만 아예 집을 하나로 합치면 저런 썰렁한 공간이 생길 일이 없을 테니까. 물론 지구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다. 해체를 한 뒤에 같이 산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니까. 어쩌면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당분간은 조금 먼 곳에 떨어져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왜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요. 그럼 우리 따로 살아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지구가 되물어왔다. 나란히 서 있던 몸을 앞으로 숙여서 얼굴 앞으로 확 다가왔다. 뭘 그런 걸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지구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난 형이랑 죽을 때까지 같이 살려고요.”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놀라운 타이밍이었다. 우리 집이 있는 층이었고, 지구는 아무렇지 않게 먼저 내렸다. 그리고 왜 안 내리냐는 듯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마에서부터 뜨끈하게 흘러내린 열이 턱 끝까지 타고 내려가 온 얼굴을 잠식했다. 빨갛게 변했을 것 같아 옆에 있는 거울을 몰래 훔쳐봤다. 다행히 얼굴색은 멀쩡했지만,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 멍청하고 얼빠진 얼굴을 지구가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아, 진짜…….”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잘 뱉지. 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넘긴 뒤 그대로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빠르게 뛰어내렸다.
“왜 가려요?”
쓸데없는 걸 물어보는 지구를 붙잡고 그대로 현관문을 열었다. 밀치듯 집 안으로 들여보낸 후에, 옷자락을 붙잡고 똑바로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얼굴은 뜨거운 상태였다.
“살자. 같이 살자.”
분명 내가 잡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현관 전신거울에 기대고 있었다. 등 뒤가 차가웠지만, 무엇보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숨이 제일 뜨거워서 그대로 정신을 놓고 키스했다.
따뜻한 입술 사이로 아랫입술이 먹혀들어 갔다. 익숙한 행동인데도 갑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몸을 비틀었다. 다리가 살짝 엉키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기우뚱할 새도 없이 지구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다시 몸이 거울에 부딪혔다. 그 작은 쿵, 소리에 놀란 듯 감았던 눈을 뜨고 지구가 손을 뻗어 등을 감쌌다.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은 자세로 위태롭게 입술을 부딪히고, 혀를 섞다가 숨이 차서 머리가 띵하게 울릴 때쯤에 살짝 떨어졌다. 곧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아서, 지구의 팔을 붙잡고 방으로 끌어당겼다. 계속하려면 현관보다 침대 위가 편할 것 같아서였다.
* * *
팬들에게 선물할 마지막 곡의 작업이 끝났다. 깜짝 놀랄 정도로 좋았던 반주에 가사가 붙고, 가이드본을 지구가 직접 녹음했다. 완성된 노래를 처음 들어본 모두의 감상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야, 이걸 어떻게 불러?’
노래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화음 맞추기도 힘들고 음도 높았다. 대충 연습해서는 따라 부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춤 연습을 하다가도, 수록곡 녹음을 하다가도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연습을 했다. 오늘은 그 노력의 결과를 마이크에 담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회사 녹음실에 도착해서, 녹음 부스에 첫 타자가 들어가고 2시간. 생수를 세 통이나 비운 휘영이 녹음 부스 안에서 번쩍 손을 들었다.
“10분만 쉬었다 하자.”
간곡한 부탁에 녹음실 밖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만지던 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도 좀 쉬어야 하니까요.”
작곡가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들 좋을 대로 소파 위에 늘어졌다. 이 녹음이 끝나고 나면 바로 안무 연습을 하러 가야 하고, 내일은 앨범 자켓 촬영이 있었다. 요 며칠 리얼리티 촬영을 위해 우리를 쫓아다니던 카메라도 지금만큼은 옆에 없었다.
“다시 시작할게요.”
10분이 지나자마자 칼같이 다시 녹음이 시작됐다.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노래인 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부르고 불러도 밖에서 기각당했다. 지구는 우리한테 하는 것보다 본인에게 몇 배는 더 칼 같아서, 충분히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도 몇 번씩 반복해서 녹음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녹음은 생각보다 훨씬 늦게 끝이 났다.
“딱 생각한 것처럼 나왔어요.”
드디어 만족한 듯 지구가 웃으며 우리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오케이 받은 파트들을 하나씩 재생했다. 아무리 불러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이 밑에 반주가 깔리고, 가사들이 쭉 이어지면 정말 신기할 것 같았다.
“그래, 작곡가가 만족했다니 됐다……. 잘 나왔네.”
“며칠 전에 녹음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녹음 시간이 상상 이상으로 길었지만 투정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다들 지친 얼굴로도 착실히 연습실로 이동했고, 리얼리티 촬영용 카메라에 담기면서 안무를 연습했다. 다음 날에는 앨범 자켓을 찍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된 앨범이 회사로 도착했다.
“디자인 진짜 예쁜데요?”
빨간색과 초록색이 적절히 조화된 앨범 커버는 크리스마스를 연상시켰다. 다섯 가지 버전의 앨범을 각각 한 장씩 뜯었고, 운이 나쁘게도 내 포토 카드만 세 개가 나왔다.
“뭐야, 하현이 형 셀카 누워서 찍었어요?”
다섯 가지 버전 중에 셀카로 찍어야 하는 버전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찍었던 사진이 있었다. 그걸 귀신같이 발견해낸 준이 집어 들고 한참을 놀리는 바람에, 정신없이 소란스러운 그 장면까지 고스란히 리얼리티 촬영 카메라에 담겼다.
리얼리티 촬영과 동시에 진행된 컴백 앨범 준비는 순조로웠다. 마지막 활동인 데다가 준비 기간이 길었던 만큼 수록곡들까지 전부 퀄리티가 좋았다. 따뜻한 겨울 분위기의 타이틀곡, 수록곡들도 전부 잔잔한 곡. 안무도 전체적으로 가볍고 동작도 작았다. 대중적으로 히트를 칠 곡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에는 정말 잘 어울렸다.
컴백 직전에 예준의 집에 모여서 다 같이 술을 마셨다. 다들 술에 약해서, 회식 자리가 아니면 멤버들끼리 따로 술자리를 갖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웬만해서는 멤버들이 마신다고 해도 빠지는 편인데, 해체를 코앞에 두고 멤버들끼리 술잔 한 번 부딪혀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벌써 컴백해요? 연습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난 너무 오래 준비한 것 같은데. 해외 투어 끝나고 좀 길게 쉬었잖아.”
각자 한 마디씩 하며 술을 털어 넣는데, 꾸준히 말이 오가는데도 조용했다. 술은 쓰고, 분위기는 무겁고. 결국, 30분 만에 모두 말을 잃었다. 시간을 내서 모여 놓고 대화 없이 각자 술을 따라 마시는 게 어색하고 이상했다.
정말 힘들었을 때 빨리 이번 활동이 끝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있었지만, 해체하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컴백이 가까워질수록 정말 마지막이 맞나 싶어 혼란스러웠다. 스스로가 내린 결정인데도 믿기지 않아서 매일 휴대폰 캘린더를 확인했다. 그리고 뚜렷하게 적혀있는 컴백 날짜와 계약 만료일을 보고 아, 하는 식이었다.
리얼리티 촬영과 편집이 모두 끝나고 컴백 준비도 완전히 끝마쳤다. 리얼리티 방송 날짜가 나갔고, 앨범 예약이 시작됐고, 사전 녹화도 코앞이었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면 순식간에 전부 끝나겠지.
“야, 누가 냉장고에서 한 병 더 들고 와봐.”
다 꼬인 발음으로 예준이 한 병 더 마시겠다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세 명이 모두 쓰러진 상태라 가져다줄 사람이 없었다. 물론 나도 가져다줄 기운이 없었다. 더 이상 마시게 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평소보다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이 흐려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술김에 공식 카페에 접속했다. 팬들이 남겨준 편지들을 하나씩 읽고, 어떤 글을 올리는지 실시간으로 새로고침을 하며 지켜봤다. 취해서인지 감정이 이리저리 널뛰기를 했다. 검은 글씨들을 쭉 훑어보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별것도 아닌 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컴백만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라는 팬의 게시글을 보고, 충동적으로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댓글을 달았다.
서바이벌 ID 마지막 방송 이후, 7년 만에 마지막 활동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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