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18화 (118/130)

#외전 5-2

“안녕하세요.”

매일 밤마다 메시지를 나누던 지구와 다시 만나게 된 건 동아리 면접이었다. 예고 댄스 동아리인 만큼 위상이 높아서 매년 신청자가 많았다. 보통 무용과 애들이 많이 면접을 봤고, 간혹가다 다른 과도 있긴 했다. 이번 학생은 실음과였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연습생이라 그런지 실력이 괜찮았다. 기초가 잘 잡혀 있어서 보는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초보자들이 연습곡으로 많이 쓰는 노래가 끊기고, 지구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현이 허리를 살짝 세우고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노래 부르는 거 들어보고 싶다.

“잘하네. 연습생이라 그런가?”

부장은 이미 합격을 준 듯 흐뭇한 얼굴이었다. 춤 실력보다는 얼굴에 합격을 준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펜을 쥐고 있더라니. 하현이 웃고 있는 부장을 힐끔 쳐다보다가 지구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딱 눈이 마주쳤다. 약간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문자로 합격 통보를 하겠다던 부장은 즉석에서 합격을 준 뒤 밝게 인사했다. 잘생긴 명예 부원쯤으로 뽑은 느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합격을 받은 지구가 동아리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현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제 선배랑 같은 동아리네요]

[너 실음과인데 여기 들어와도 돼?]

[춤 잘 추고 싶어서요]

춤에 욕심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상 회사에 가서 연습하기 바쁜 지구에게 동아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어제 동아리 관련해서 메시지를 하다가 하현이 댄스 동아리라는 걸 알게 돼서 신청한 게 이유의 80%였다. 정말 붙을 줄은 몰랐지만 이왕 합격하니 기분은 좋았다.

이제는 하현과 메시지로 일과를 나누는 게 익숙해진 지구가 쉴 새 없이 타자를 치며 연습실로 향했다. 휴대폰을 장식품으로 들고 다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잘 보지 않던 지구가 최근에는 쉬는 시간만 되면 휴대폰을 잡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바빴다. 그 모습을 A-3반 연습생 형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너 여자친구 생겼냐?”

바닥에 누워 셀카를 찍던 서진이 툭 물었다. 그 말에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던 A-3반 연습생 모두가 지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온지구 연애하냐?”

“얘랑 여자만큼 안 어울리는 것도 없는데 웬일이야? 목석같은 새끼가.”

“사진 있어? 예쁘냐?”

성원이 앉은 상태로 몸을 끌어 지구의 옆으로 다가와 사진을 요구했다. 너무 빠르게 다가온 덕분에 화면을 다 숨기지 못한 지구는 메시지 화면을 그대로 노출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휴대폰을 아예 뺏겨버렸다.

“얘야? 뭐야, 프사 없네?”

기본으로 설정된 프사를 보고 실망한 성원은 기어코 계정까지 찾아 들어갔다.

“뭐야, 친구 수 존나 많네? 유명한 애야?”

맨 위에 뜨는 친구 수까지 본 성원은 지구가 인상을 찡그리며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았기에 더 이상 화면을 내릴 수 없었다.

“짜식, 알았어. 안 봐.”

성원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뒤로 물러났다. 지구는 휴대폰을 조용히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연습에 열중했다.

약 한 달 뒤에 지구를 제외한 A-3반 연습생들의 데뷔가 확정됐다. 축하해주던 지구는 더 열심히 해서 2년 안에만 데뷔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수혁이 웃으며 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지구는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는 연습에 매진했다. 수행평가도 빼놓지 않고 챙기면서, 월말평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동아리 시간마다 늘어있는 지구의 춤 실력에 하현은 항상 칭찬을 해줬다.

너는 되게 빨리 배우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좋아지네. 남에게 말로 칭찬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하현이 이렇게 말해주면, 지구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웃었다.

실력은 바람대로 늘었고, 존경하는 선배에게 칭찬을 받았다. 가끔 시간을 만들어 하현의 대회를 보러 가고, 방과 후에 잠깐 연습실에 남아 연습하는 것도 지켜봤다. 또 전화번호를 주고받아 이제는 페이스북 메시지 대신 문자를 했다. 그런 행복이 깨진 건 성원이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이 커뮤니티에 올라오면서부터였다.

“지구야, 스페이스 네가 들어가자.”

사장은 지구에게 데뷔 조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다. 지금 회사에서 당장 데뷔해도 손색이 없을 게 딱 너뿐이라며 데뷔 조 명단에 지구의 이름을 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데뷔의 기회를 얻은 지구에게 하현은 당연하게도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축하를 건넸다.

“잘 됐다. 데뷔하고 싶어 했잖아.”

“아… 감사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선배에게 축하를 받으며 지구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정말 맞는 건가. 남의 자리를 뺏은 것 같은 기분에 명치가 답답했다. 데뷔가 결정된 이유로 상태가 영 좋지 못한 지구를 보며 하현은 긴장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부담스럽고 걱정되겠지.

데뷔 준비 때문에 지구는 한동안 학교에 오지 못했다. 그러다 5일 만에 등교한다는 메시지가 날아왔고, 연습을 위해 항상 이른 시간에 등교하는 하현은 연습실 대신 실음과 교실을 찾았다. 뒷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민 하현은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동그란 뒤통수 하나를 발견했다.

“지구야.”

꽤 큰 목소리로 불렀는데도 듣지 못해서 세 번이나 더 불렀을 때야 지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란 듯 급히 일어나 교실 뒷문 쪽으로 뛰어왔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아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못 들어.”

“아, 조금.”

나란히 섰을 때 지구가 하현보다 작았기 때문에 살짝 올려다봐야 했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동글동글한 눈을 마주한 하현이 들고 있던 음료 캔을 건넸다.

“이거 마셔.”

얼떨결에 두 손으로 캔을 받아든 지구가 차가운 온도에 한 손을 뗐다. 방금 막 뽑아온 듯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와중에 학교 자판기에 있는 음료 중에서 제일 비싸서 학생들이 잘 사 먹지 않는 거였다.

“감사합니다.”

“긴장 많이 했어?”

“네?”

“아니, 표정이 별로 안 좋길래. 데뷔 준비하는 거 많이 힘들지?”

해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부담감이 따르는 일이라는 건 확실했다. 하현은 무대 위가 익숙했지만 다른 의미로 평생 익숙해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지구는 모난 곳 없이 둥글지만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타입이었다. 같이 지낸 건 세 달 남짓밖에 안 됐지만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 무딘 것처럼 보여도 세심하고 예민했다. 지구가 유독 하현의 앞에서만 감정을 잘 드러냈기 때문에 알게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같이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까 봐 말을 하기 전에 고르는 모습도, 최대한 남들에게 맞추기 위한 선택을 하는 모습도.

“네… 감사합니다.”

부모님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이돌인 형은 바빴다. 그렇기에 이런 지구의 상태를 알아준 것은 하현뿐이었다. 꾸벅 인사한 지구는 반으로 들어가는 대신 하현과 복도에 서서 음료를 다 비울 때까지 대화를 나눴다.

하현이 온갖 대회를 준비하며 틈틈이 문자를 하는 동안, 지구는 생전 해본 적 없는 랩을 시작했다. 그룹에 보컬이 다 찼다는 이유로 주전공에서 밀려난 지구는 어쩔 수 없이 래퍼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만 두고 실력 비교를 해본다면 메인보컬 감은 지구가 맞았지만, 굴러들어온 돌 주제에 그런 자리까지 탐낼 수는 없었다.

“넌 톤은 좋은데 딕션이 좀 부족하다.”

“그러면.”

“뭐 어떡해, 입에 볼펜 물고 존나 연습해야지.”

성원이 소개해줬던 예준과는 여전히 괜찮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카롱 한 박스를 수업료로 랩 강습을 받으며 노력하던 지구가 모든 걸 다 때려치우게 된 건 데뷔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른 6월 말이었다.

“귀엽게 생겼네.”

지구보다 최소 20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무서운 눈빛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잡아먹힐 것 같았다. 여자는 그룹의 확실한 성공을 위한 스폰서였고, 그 앞에 내밀린 것은 지구였다.

“김 이사님, 얘 섹스는 할 줄 알아? 얼굴은 내 취향인데 너무 애기네.”

엄마뻘인 스폰서가 깔깔 웃으며 놀리듯이 구두 신은 발을 뻗어왔다. 양옆에서 멤버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어깨를 꾹 눌렀으나 결국 지구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뛰쳐나왔다.

헛구역질을 하며 술집이 가득한 골목을 빠져나온 지구가 처음 연락한 것은 부모님도, 형도 아닌 하현이었다. 마침 딱 자기 위해서 씻고 나온 하현은 침대 위에서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금방 발견했다. 보통 문자를 나눴기 때문에 전화가 온 건 처음이었다.

“여보세요?”

-선배.

목소리가 낮았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전화 너머에서 술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현은 본능적으로 중요한 상황임을 알아차리고 막 씻은 몸 위로 얇은 옷을 걸쳤다.

“어디야?”

-저 여기…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하현은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휴대폰을 귓가에 댄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대충 어딘데?”

-택시 잡으려고 도로가로 나왔어요.

“택시 타면 학교로 와. 먼저 가서 기다릴게.”

-아니, 아니에요. 더운데 집에서 쉬세요. 그냥 잠깐 통화만 가능한가 싶어서.

“너희 집 학교 근처라며. 아니면 그냥 너희 집으로 가. 주소 불러주면 앞에 가서 기다릴게.”

단호한 말에 결국 지구는 학교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곧 택시를 탔다는 말이 들렸고, 하현은 얌전히 교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7월이 코앞이라 날이 더웠지만 저녁이라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교문 앞에 낯선 택시가 섰다. 곧 안에서 지구가 내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색이 창백했다.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지구를 데리고 하현은 무작정 걸어 학교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앉아있어.”

편의점 앞 테이블 의자에 지구를 앉혀놓고 하현이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음식에 대해서는 세상 누구보다 빠삭했다. 자취하면서 매일 먹는 음식들이 모두 여기서 오니 당연했다. 제일 맛있는 것들로만 골라 집어 든 하현이 문득 문자로 나눴던 내용이 생각나 냉장고 앞에서 멈춰 섰다. 커피는 싫어해서 아는 게 없었다.

“저기, 라떼 어떤 게 제일 달아요?”

카페인에 빠삭할 것 같은 야간 알바에게 묻자 아주 친절한 설명이 돌아왔다.

“이거 골드가 제일 달아요.”

몇 종류 되지도 않은 라떼 중에 가장 달달한 것을 찾아낸 하현이 결제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