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4
아무리 형이 잘 춰봤자 하현과 비할 바가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지구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형이 춤추는 모습도, 하현이 춤추는 모습도 바로 옆에서 여러 번 지켜봤으니까. 지구가 살짝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배가 더 잘 춰요.”
“직접 보면 파워가.”
“저희 형이에요.”
갑작스럽게 태양이 지구의 형임을 알게 된 하현은 급격한 충격을 받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하나도 닮지 않은 형제의 얼굴을 한 번씩 살펴본 하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제대로 좋아해 보기도 전에 그 순간 바로 탈덕했다. 좋아하던 가수가 지구의 형이라는 사실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렇게 하현이 친형에게 입덕하는 것을 무사히 막아낸 지구는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같이 TV도 보고, 책장에 꽂혀있는 책 중에 알고 있는 게 있어서 그걸로 한참 대화도 나눴다. 한 번 가보니 두 번, 세 번은 더 쉬웠다.
지구가 점점 하현의 집에 가는데 익숙해지는 동안, 하현의 일상의 대부분은 대회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슬슬 작품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는 학원 선생님의 말에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닥치는 대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게 먼저였다. 교내 대회는 물론이고 교외 대회를 밥 먹듯이 나가서 상을 휩쓸어왔다. 이제 월요일 조회시간에 단상 위에 올라가는 건 거의 일상이 됐다.
“선생님이 저녁 사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저 먼저 가볼게요.”
학원 선생님이든, 학교 선생님이든 대회장에 함께 온 보호자들은 항상 뒤풀이를 요구했지만 하현은 칼같이 거절했다. 동아리 대회 같은 건 분위기상 최대한 남으려고 하는 편이지만 혼자 나온 대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밥 먹으면서 그날 무대에 대해 얘기하는 건 스스로와 해도 충분했다. 물론 항상 완벽했기에 주로 질책보다는 칭찬을 해줬다.
대회장에서 빠져나오면 각자 부모님들과 함께 있는 참가자들이 눈에 띄었다. 원래 같았으면 보러 올 가족도 없으니 조용히 집으로 갈 텐데, 요즘은 꼬박꼬박 뒤풀이에 참석하는 중이었다.
“선배.”
저 멀리서 손을 살짝 들어 올린 지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회장 내부가 더워서 그런지 볼이 빨개져 있었다. 잔뜩 들뜬 표정으로 다가와 수고했다며 말을 건네면서도 어깨를 툭툭 치거나 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이였지만 둘은 꽤 친밀했다.
“이 주변에 맛있는 닭갈비 집 있대요.”
그런 정보는 어디서 찾아낸 건지 지구가 자연스럽게 하현을 데리고 공연장 앞에 있던 닭갈비집으로 들어갔다. 넉넉하게 4인분이나 주문한 지구가 저번에 선배가 샀으니 이번에는 꼭 자기가 살 거라며 쐐기를 박았다.
학원에서 하는 웬만한 고강도 헬스 뺨을 후려치는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 때문에 온몸이 뻐근했다. 타고난 재능과 별개로 힘이 살짝 부족한 하현은 실제로도 체육과는 담을 쌓고 사는 타입이었다. 춤과 운동은 다르니까. 다른 것들로 커버를 친다고는 하지만, 힘이 필요한 춤을 위해서 운동은 필수였다. 최근에는 대회 준비하랴, 작품 준비하랴 더 열심히 해서 여기저기가 아팠다.
억지로 다리 찢고, 크런치에, 플랭크 2분, 팔굽혀펴기….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하루에 몇백 개씩 하고 있으니 아무리 근육이 잘 안 생기는 몸이라고 해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입시가 서서히 다가올수록 단단해져 가는 몸도 슬슬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선배, 복근 생겼네요.”
지구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 더운지 상의를 펄럭이며 숨을 몰아쉬는 하현을 보며 툭 뱉었다. 그러다 뒤늦게 자기가 뭘 본 건지 깨닫고 사레가 걸려서 마시던 물을 콜록거리며 토해냈다.
“계속 운동하니까 생기더라고….”
복근 있는 것만 보면 튼튼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랐지. 파워 있는 춤보다 부드러운 현대무용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하현을 가만히 쳐다보던 지구가 휴지로 물이 묻은 입가를 살짝 닦아냈다. 아무래도 더 먹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볶음밥도 두 개나 시켰다.
결국 다 남아버린 밥이 가득한 철판 위 허공에 숟가락질을 하며 눈치를 보는 지구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웃는 하현을 보고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지구는 다시 눈치를 보며 밥을 한 숟가락 퍼먹었고, 그렇게 술 대신 사이다와 함께하는 뒤풀이는 가득 남은 볶음밥을 가운데 두고 훈훈하게 끝났다.
* * *
한국예고는 한 달에 한 번씩 급식으로 샐러드가 나왔다. 학생들의 체중 관리를 돕는다는 취지로 깔끔하고 신선한 고급 샐러드가 한 통씩 배식됐는데, 그 날은 매점으로 학생들이 잔뜩 몰리는 날이었다. 바로 그날이 어제였고, 다음 날인 오늘의 급식메뉴는 매우 우수했다.
“야, 바삭한 돈가스에 눈꽃 치즈 떡볶이래.”
친구들이 급식 메뉴를 읽으며 잔뜩 신이 난 목소리를 냈다. 기계에 학생증의 바코드를 찍고 들어가는 친구들 뒤로 하현 역시 조심스럽게 식판을 잡았다.
맛있기로 유명한 한국예고 급식답게 식판에 꽉 차게 담아놓고 보니 군침이 넘어갔다. 오늘 역대급이라며, 페이스북에 올리기 위해 친구들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하현아. 체중 관리 안 하냐.”
돈가스를 집어 들고 겨우 한 입 먹으려던 하현이 손을 멈췄다. 담임선생님이었다.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인 것 같았다. 어제 급식이 샐러드였어서 모두 신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제지당한 건 하현 혼자였다.
아직 입도 안 댔는데. 돈가스를 놓아준 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아있는 급식을 전부 잔반 처리통에 던져 넣었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속에 게워낼 것도 없는데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충분히 마른 몸이었지만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가는 금방 살이 붙기 때문에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체중 관리는 필수였다.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건 아니었다. 잦은 인스턴트 섭취는 당연히 위험했다. 하현 역시 알고는 있지만 배가 고파서 한 입만 먹으려고 했다. 딱 그 순간에 나타나서 눈치를 주는데, 차마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선배 벌써 다 먹었어요?”
매점을 지나쳐서 그대로 급식실 밖으로 나오던 하현은 동그라미와 마주쳤다. 춥지도 않은지 마이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친구들과 급식실로 들어가려던 지구가 방향을 틀어 무리에서 벗어났다.
“안 먹었어. 입맛 없어서.”
급식 맛있던데. 입맛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급식실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점이라도 들렀나 싶었는데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아서 지구가 하현의 손을 잡았다.
“속 비면 안 돼요. 뭐라도 먹어야죠.”
하현이 말릴 새도 없이 매점에서 물과 김밥 두 줄을 주문한 지구가 막무가내로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데우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따끈따끈한 김밥을 받아든 하현이 멀뚱멀뚱 서 있자 지구가 어깨를 살짝 잡고 문 쪽으로 돌려세웠다.
“교실 가서 먹을래요? 아니면 동아리실? 전 아무 데나 괜찮은데.”
“급식 안 먹어? 애들 들어갔잖아.”
“저도 오늘 급식 별로라서.”
왜 두 줄이나 주문했나 했더니. 자기도 급식이 별로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며 지구가 하현의 손을 잡아 학교 건물로 이끌었다. 하현이 대답을 하지 않아서 지구는 그냥 멋대로 동아리실을 오늘의 런치 장소를 정했다.
사방에 거울이 붙어있는 동아리실로 들어간 지구가 일단 창문부터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동아리실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 밑에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아 함께 초라한 김밥 두 줄을 펼쳐 놨다. 입맛 없다던 말과 다르게 하현은 나무젓가락을 쪼개 잘만 집어 먹었다.
“왜 급식 안 먹었어요?”
“선생님이 체중 관리하라고 하셔서.”
담임과 멀어지니 다시 입맛이 살아난 하현은 일정한 속도로 입에 김밥을 집어넣었다. 잘 먹는 게 보기 좋아서 하현이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에 김밥 하나를 몰래 옆으로 옮긴 지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선배 하루 운동량만 보면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어도 모자라요.”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운동량도 많은데 무슨 체중 관리를. 지구가 단호한 표정으로 예쁘게 쪼갠 나무젓가락을 내려놨다.
“뭘 먹어야 운동을 하든지 춤을 추든지 하죠. 전 다른 거 먹고 싶으니까 매점 다녀올게요. 이건 선배 먹어요.”
“어? 그래.”
그러면서 남은 김밥을 죄다 떠넘기고 비장하게 나간 지구에, 영문도 모르고 하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식단 관리를 하긴 해야 하는데…….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 하현은 신기할 정도로 깨끗하게 쪼개놓은 지구의 나무젓가락을 보고 살짝 입을 벌렸다. 이 정도면 재능인데? 못 하는 거 빼고 다 잘하는 지구는 능력을 젓가락 쪼개기에도 어김없이 발휘했다. 그래봤자 고백할 생각만 하면 갑자기 시들해져 버리는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 * *
여름이 되면서 하현은 완전히 페이스를 잃었다. 그 수많은 압박감을 다 견뎌내면서 스스로를 컨트롤하던 것이 드디어 깨져버렸다. 여느 다른 학생들처럼 슬럼프가 찾아오고 온몸에서 위험 신호를 보냈다. 과거에 지구에게 해줬던 말을 본인이 지키지 못하고 있는 꼴이었다. 아직 어리니까, 기회는 많으니까 천천히 하라는 말은 본인에게 해당되지 못했다. 1년 더 달릴 자신은 없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 붙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꼬리표처럼 뒤를 따라다녔다.
춤을 전공으로 삼는 애들은 천재든 범재든 피를 토해가며 연습을 했다. 웬만한 헬스 뺨치는 운동량과 수많은 천재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례도 흔했다. 취미와 전공은 달랐다. 특히 전공으로 삼으면 머리 빈 양아치 취급을 심심찮게 받는 춤은 더 그랬다.
“연습 열심히 하고 있지?”
“네.”
“그래, 너야 항상 잘하니까 걱정이 안 된다. 그래도 관리는 해야지.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너 맨날 인스턴트로 때운다며. 자취하니까 음식 챙기기 힘들지? 근데 그런 거 계속 먹으면…….”
길고 긴 설교가 끝나고 하현이 한숨을 쉬며 교무실을 나왔다.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3학년에 담임을 완전히 잘못 만났다. 담당 과목보다 한본쌤으로 더 유명한 담임은 '한 명만 본다'는 별명답게 학생 한 명을 찍어서 죽어라 관리하는 선생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매년 한국예대 합격자를 배출해냈고, 수석으로 입학한 하현이 올해의 담당 학생으로 걸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예고 내에서도 전공을 포기하고 뒤늦게 수능을 잡은 아이들도 꽤 찾아볼 수 있었다. 3학년이 되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전히 예대 경쟁률을 뚫기 위해 피 튀기는 전쟁터로 나가는 아이들과 한 발 뒤로 빠진 아이들. 하현은 전자인 데다가 선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