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24화 (124/130)

#외전 5-8

그렇게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졸업식은 시작됐다. 학교 정문에 붙은 현수막 때문에 하현의 한국예대 수석 입학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다른 반, 심지어 모르는 애들까지 강당에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수많은 관심을 받으며 하현은 홀가분하게 자리에 앉았다.

3년 동안 자신을 옭아맸던 한국예고와의 인연은 졸업장을 건네받는 순간 끝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현에게 상현이 다가와 꽃다발을 건넸다.

“학교 앞에서 샀다. 잘했지.”

“…….”

사탕이 잔뜩 박혀 있는 귀여운 꽃다발을 잠시 바라본 하현이 고맙다고 인사한 뒤 다시 상현의 품에 안겨줬다.

“야. 네가 들고 가야지.”

내심 들고 있기 부끄러웠던 상현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허둥지둥 꽃다발을 다시 내미는 상현을 내버려 두고 강당 밖으로 나간 하현은 그대로 지구와 마주쳤다.

“선배 졸업 축하해요.”

지구가 꽃다발을 건네주며 웃었다. 이건 또 언제 샀대. 연보라색 꽃다발은 보기만 해도 따뜻해 보였다. 향긋한 꽃 가운데 얼굴을 묻고 숨을 쉬고 싶은 충동을 살짝 참아내고 고맙다고 말했다.

“뭐야, 친구?”

“아니, 후배.”

“안녕하세요.”

“어, 안녕. 후배가 잘생겼네.”

뛰어난 친화력으로 지구와 인사를 나눈 상현을 하현은 툭 쳤다. 왜 그러냐며 표정으로 묻는 상현에게 하현이 손짓했다.

“이제 끝났으니까 형 집에 가.”

갑작스럽게 귀가 명령을 받은 상현이 놀라 입을 열었다.

“어? 나 시간 내서 왔는데?”

“집에 가서 맥주 마시면서 스포츠 봐.”

“좋긴……한데, 그래도 너 졸업식인데.”

“괜찮아. 오늘 할 거 있어서 그래.”

지구와 하현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 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유가 있겠지. 사실 남동생과 우중충하게 식당에 가서 밥 먹는 것보다는 집에서 혼자 스포츠를 보는 게 더 좋았던 상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간다. 꽃다발은 가져가야지.”

“마음만 받을 테니까 형 가져가.”

“야, 쪽팔리게 이걸 어떻게 들고 가.”

“쪽팔린 거 알면서 나는 왜 줘. 형은 차 끌고 왔을 거 아니야.”

“그러네.”

금방 납득한 상현이 손을 흔들며 사탕이 가득 박힌 꽃다발을 들고 학교 밖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선배네 형도 잘생기셨네. 와중에 이런 우월한 유전자는 태어나서 처음 본 지구는 신기한 표정을 겨우 숨겼다.

“친구들이랑 안 놀아?”

“같이 놀 사람 없어요.”

사실 같이 놀자는 제안을 각각 다른 무리에서 총 8번이나 받았지만 또 거짓말을 했다. 얘는 인기 많아 보이는데 왜 맨날 놀 사람이 없지. 그 아무도 안 믿을 거짓말을 또 철썩 믿은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본인도 매일 같이 놀자는 친구들을 거절하며 지구랑 시간을 보내온 몸이었다.

“일단 가자.”

오늘은 꼭 지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꽃다발과 졸업장을 품에 안은 하현이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뒤따라오는 지구에게 맞춰 발을 늦췄다가, 다시 지구의 속도에 맞춰 발을 조금 빨리했다.

추운 2월의 바람에 휘날리는 하현의 머리카락을 보며 지구가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을 놓치면 평생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대학을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되면 더 이상 저따위랑 이렇게 꾸준히 만날 일도 없을 거고, 어쩌면 여자친구를 만들게 될지도 몰랐다. 여자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하고, 페이스북에 연애 중을 띄우는 날에는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았다.

지구가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 하현은 얕은 숨을 내쉬었다. 학교 내에서 지구의 인기가 항상 많았던 것 정도는 재학생이면 다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연습생 신분도 아니니까 연애하는데 제약도 없을 테고. 예쁜 여자친구 한 명 만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 같았다. 그동안은 끈질기게 붙어 다니느라 사귈 틈이 없었다고 쳐도 더 이상 자신은 한국예고 재학생이 아니었고, 지구는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게 될 터였다.

대학으로 가면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질 것이 분명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관계도 점점 거리를 벌릴 게 분명했다. 지구가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어쩌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는 순간이 분명 올 텐데 그 허무함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숨이 턱턱 막혔다.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날이 선 예민한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란히 운동장을 절반쯤 걸어왔을 때 하현이 결심했다. 여기서 그냥 이대로 교문을 나가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고. 고등학생 때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사라질 작은 것이겠지만 그러기 싫었다. 이 관계와 기억만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되든 안 되든 이대로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꺼버린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구야.”

“선배.”

타이밍이 딱 겹쳐서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살짝 주춤한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하현이 먼저 조심스럽게 권했다.

“먼저 얘기해.”

사실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갑작스럽게 결심한 거라 아직 고백할 말을 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기서 뻥 걷어차이면 지구가 하려던 말도 못 듣게 되니까. 하지만 이런 하현의 생각을 조금도 모르는 지구가 고개를 저으며 먼저 선수를 쳐서 한 발 물렸다.

“아니에요, 먼저 얘기해요.”

이런 순간까지도 배려심이 넘칠 필요는 없는데. 지구를 따라서 그냥 너 먼저 얘기하라고 자신도 한 발 빼보려던 하현이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2월의 차가운 바람이 몸 안을 파고들었다. 시린 감각에 정신이 들었다. 오늘 이 학교를 졸업했다. 쭉 용기 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순간조차 망설일 수는 없었다.

“좋아해.”

하현의 말이 끝나면 직구로 고백을 던질 생각이었던 지구의 계획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당황한 표정을 정면으로 마주한 하현은 그만 말할까 고민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그냥 계속 말하기로 결심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좋았어. 그냥 같이 연습하고, 놀고, 밥 먹고, 그런 게 다…….”

떨리는 목소리를 침착하게 잘 숨겨낸 덕에 생각보다는 평이하게 들렸다. 말은 아무렇지 않게 툭 뱉었는데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워서 하현이 고개를 숙였다. 지구가 건네준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게…… 그냥 네가 편해서 그런 줄 알았어.”

기분 나빠할 게 분명했다. 거의 2년을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사실 동성의 선배가 자길 좋아하고 있었다고 하면. 지구는 그러라고 잘해준 게 아닌데, 저 혼자 그 다정함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빠진 주제에 구해달라고 손을 뻗는 꼴이었다. 여기서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난다고 해도 전부 저의 탓이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전부 네가 좋아서 그런 거였어.”

지구가 아무리 착하고 화를 안 내는 성격이라 해도 이 정도면 한 대 맞아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몇 번을 돌이켜봐도 지구가 자신에게 해준 건 너무 많았고,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네가 그런 의미로 잘해준 건 아닐 텐데 미안해.”

지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결국 하현은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눈에 가득 들어차는 지구가 건네준 꽃다발을 볼 자신도 없어서 결국 눈을 감았다.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쥐고 있어서인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감당하기 힘든, 지구가 지금까지 준 순수한 후배로서의 애정의 무게가 하현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래로 떨어진 고개를 보며 지구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런 의미로 잘해준 게 아니면 뭔데요. 대체 누가 친절로 그렇게까지 해주는데요. 둥글게 살자는 말이 신조이긴 하지만 지구는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냥 친한 선배 입시를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챙기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걸 하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있나.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현실감이 없어서 도무지 입꼬리가 올라가질 않았다. 하현이 자신에게 고백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몇 번 행복한 상상을 할 때도 저의 마음을 하현이 받아주는 선택지는 있었어도, 하현이 먼저 고백을 해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꾹 다물린 입술을 겨우 벌린 지구가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 겨우 말 한마디를 뱉었다.

“좋아해요, 선배.”

하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귀를 의심하는 말이었다. 이제는 지구가 저보다 확실히 더 컸다.

“어?”

“선배 좋아해요. 제가 먼저 좋아했어요. 후배로서 말고, 동생으로서 말고.”

형이 이 학교에 없어도 계속 좋아할 거니까, 동경하는 한국예고 선배 박하현 말고 그냥 그 자체가 좋으니까. 좋아해요, 사랑해요. 선배. 하고 싶은 긴 말들은 결국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코가 시큰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중요한 상황에서 애처럼 울어버리면 안 되니까 필사적으로 참았다.

“어……?”

방금 전 귀로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하현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잠깐 멍해진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지구가 다시 쐐기를 박았다.

“저도 선배 좋아해요. 선배랑 연애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어떻게 망설이면서 기다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올곧고 직설적인 고백이었다. 조금의 우회도 없이 일직선으로 날아온 새로운 고백에 하현이 잠시 뭐에 맞은 것처럼 멈춰 섰다. 잘못 들은 건 아닐 텐데. 만약 제대로 들은 말이라면 너무 행복한 말이었기 때문에 현실 부정을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해. 진짜로.”

하현의 마지막 말에 드디어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망거리던 눈물이 터졌다.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처음 만났던 입학식 날과 달라진 게 없는 큰 동그라미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하현이 웃으면서 등을 쓰다듬었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학교의 운동장에 서서, 같은 온도와 감정을 공유하면서, 그렇게 2년을 선후배로 지내온 관계를 놓아줬다. 이제는 새로운 인연의 끈을 잡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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