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9
▶ 한국예술고등학교 대신 전해드립니다
익) 실용음악1반 온지구 선배ㅠㅠ 여자친구 없으면 연락하고 싶어요 2학년 뮤지컬과에용!! 댓글 달아주시면 페메할게요~~
└ @온지구 고백만 한트럭받으면서 정작 여친없는 지구^^
└ @온지구 얘 이번달만 몇번째임
└ @온지구 ㅋㅋㅋㅋ 이번에는 함가자
또 올라왔다. 하현이 눈을 찌푸리며 빠른 속도로 댓글을 훑었다. 여러 댓글에서 지구를 언급하며 웃어대고 있었다. 한 번 연락드리라는 말에 살짝 심기가 불편해진 한국예대 학생 하현은 졸업생 신분으로 댓글을 달았다.
└ 지구 페북 지웠어요.
진짜였다. 어플은 지운지 오래였고, 글이 올라오지 않는 거로 봐서 접속도 안 하는 게 확실했다. 한국예대 대나무숲을 들락날락하느라 익스플로러로 매일 접속하는 지구를 알지 못하는 하현은 그냥 알려주기만 한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좀 유치한 댓글이긴 하지만 그 누구도 지구가 애인이 있다는 걸 모르니까 어쩔 수 없었다.
└ 엥 박하현 뭐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오랜만
└ 박ㅡ하^^ 작년에 자기 찾는글에는 댓글 안달더니ㅋㅋㅋㅋㅋ
└ 희대의 오지라퍼ㄷㄷ
└ ㅎㄹㅋㅋㅋㅋ 근데 온지구 페북 안하는건 맞아염
잘생긴 실무과 선배를 찾는 글들은 전부 무시해놓고, 졸업한 다음에 남 찾는 글에 와서 이런 댓글이나 달고 있으니. 다른 학생들도 신기했는지 답글이 멈추지 않고 달렸다. 뭔가 부끄러워져서 하현이 휴대폰 화면을 껐다. 와중에 지구한테 간접적으로 고백한 2학년 뮤지컬과 학생이 자신의 댓글을 봐야 하므로 삭제는 하지 않았다.
하현이 한국예대에 입학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새내기를 환영하는 봄과 과제에 시달리는 여름이 지나고, 결국 개강을 맞이한 9월이었다.
수석 합격을 한 하현은 입학하자마자 학교 내의 슈퍼스타가 됐다. 사실 그 이유 중 연예인 뺨치는 얼굴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새터에서부터 시작된 수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의 관심은 하현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과모임, 동아리 모임, 엠티……. 빠지려고 해도 너는 절대 안 된다는 말에 억지로 질질 끌려다닌 술자리만 몇 개인지 셀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하던 지구도 어느 순간부터 서운해하는 게 눈에 보여서 요즘은 웬만한 자리는 다 거절하고 다니는 상태였다. 하루에 몇 번씩 들어오는 소개팅 제의도 꾸준히 변명을 대며 거절하고 있는데…….
[야 박하현 실음과랑 5:5 갈래?]
화면이 반짝거리며 카톡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리 썩 친하지 않은 같은 과 동기였다. 학교의 수많은 학생들과 전부 안면을 텄지만 솔직히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관계는 귀찮고 힘들었다. 친구 같은 건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한데 주변에서 하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 안간다고]
신경질적으로 문자를 전송한 하현이 걸음을 빨리했다. 오늘 수업이 다 끝났으니 어서 빨리 캠퍼스를 벗어나서 집에 가고 싶었다.
[아 왜ㅠ 실음과 애들 존예래]
하현에게는 실용음악과에 다니는, 예쁘게 생긴 애인이 이미 있었다. 한국예대는 아니고 한국예고 학생이지만. 아마 지금쯤 학교 끝났겠지. 고작 한 살 차이인데 대학생과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됐어]
[아 제발ㅠ 너 와야 이 자리 성립되는거 몰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애원에 들어간 동기의 문자를 본 하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인 있다고…….”
귀엽고 착하고 다 잘하는 애인 있다고. 분명 애인이 있다고 얘기하면 여기저기서 보여 달라고 난리를 칠 텐데, 보여줄 수가 없으니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어디에도 할 수 없는 애인 자랑을 아무도 듣지 못하는 허공에 해본 하현이 땅을 걷어찼다. 갑자기 졸음이 급격하게 밀려왔다.
매일 걸어서 등교하다가 지하철을 타고 다니니 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그나마 지하철역이 바로 학교 앞에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사실 어머니는 대학 근처로 자취방을 옮기길 권했지만 하현이 거절했다. 한국예고랑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살면 정말 지구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지니까. 그냥 저가 좀 멀리 다니고 지구를 자주 보는 게 더 좋았다.
[오늘 과모임 필수 참석할 것!]
딱 캠퍼스 밖으로 나가려는데 날아온 문자에 하현이 입을 벌리고 그 자리에 섰다. 오늘 모임이 있었나? 뒤늦게 단톡에 들어가 확인해봤더니 정말이었다. 원래 같으면 그냥 집에 갔을 텐데, 저번에 다음 모임은 꼭 가겠다고 약속하고 빠진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귀가할 수가 없었다. 까먹은 척도 못했다. 왜냐하면.
“야! 톡 봤냐? 오늘 삼겹살집이라던데?”
마침 딱 다가오는 같은 과 선배 때문에. 4학년이면서 과모임에 항상 필수 참석하는 눈치 없는 선배 하나가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쳤다.
오늘 지구가 학교 끝나자마자 온다고 했는데. 선배의 팔을 확 꺾어버리고 집으로 도망가고 싶었으나 실천은 역시나 마음속으로만 했다.
한편 그렇게 하현이 선배에게 잡혔을 때, 오늘도 역시나 한국예대 대나무숲을 염탐하러 페이스북에 들어간 지구는 무의식중에 알림을 눌렀다. 잘 모르는 애들이 잔뜩 언급을 해놓은, 평소 같으면 그냥 휙 넘겼을 글을 보다가 발을 멈춘 건 댓글들 사이에 보인 익숙한 이름 때문이었다.
“아…….”
└ 지구 페북 지웠어요.
의도가 훤히 보이는 댓글에 지구가 휴대폰을 양손으로 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절대 이런 댓글을 달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더 놀랍고 귀여웠다. 잠깐 휴대폰 화면을 거꾸로 뒤집고 망부석처럼 서 있던 지구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걷기 시작했다.
하현의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 '페북은 지웠지만 글은 읽었고 댓글은 달지 않았다'를 간접적으로 알린 지구가 바로 문자를 했다.
[형 집 거의 다 도착했어요]
사귄 지 몇 달이 됐는데도 지구는 하현의 자취방에 가기 전에 이렇게 꼭 방문을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아무것도 없는 프로필 사진에서 뭐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행복하게 휴대폰을 쳐다보던 지구가 계속 걸음을 옮겼다. 꼬박꼬박 물어보는 건 그냥 배려였다. 자고 있으면 깨우기 싫고, 뭔가 몰두하고 있으면 방해하기 싫으니까.
[지구야 미안해 나 오늘 늦을거 같은데.... 진짜 미안 과모임 있는줄 몰랐어]
곧 날아온 문자는 굉장히 절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가볍게 걸어가던 발이 다시 뚝 멈춰 섰다. 하지만 어른스럽고 마음이 넓은 지구는 금방 납득했다. 저번 과모임도 저랑 놀아주기 위해서 빠졌는데 또 뺄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괜찮아요]
[미안해 금방 빠지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비번 0609 누르고 별 한번 눌러]
처음으로 자취방 비밀번호를 받은 지구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비밀번호는 털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하현의 생일이었다. 이런 거로 집 비밀번호를 해놓으면 어떡하지. 진짜 조심성 없다.
[형 집 오면 일단 비밀번호부터 바꿔요]
[그래]
진짜 복잡한 거로 바꿔야지. 하현이 기억할 수 있으면서 어려운 비밀번호를 생각 중인 지구와 다르게 문자를 받은 하현은 다른 생각을 했다. 졸업식 날짜로 할까, 아니면 지구 생일로 할까.
그냥 집에 가 있을까 하다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지구는 가방을 현관 앞에 두고, 얌전히 거실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 확인하지 못했던 한국예대 대나무숲에 뒤늦게 들어가 올라온 게시물들을 확인하는데, 미팅하자는 글마다 언급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 한국예대 대나무숲
익) 방영과 여자 셋이랑 3:3 미팅할 실무과 있나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하현 찾으세요??
└ @김지성 4학년도 가능한가?ㅋㅋ
└ 졸업학년은 양심상 빠지자ㅋ
└ @민우진 실무과 존잘남 가자~~!
└ 존잘남 따로있잖아 시발롬아 엿먹이냐?
└ ㅈㅅㅋㅋ
└ @이다희 방영과 여신
└ 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마;;
└ @박하현
└ 묵묵히 그분 언급만....
형 애인 있는데. 그걸 자기라고 알릴 수가 없는 게 서러웠다. 어쩔 수 없이 비밀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잘난 애인을 두고도 항상 솔로인 척해야 했다. 아, 솔로구나- 로 끝나면 정말 좋을 텐데 잘생긴 얼굴은 사람을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지구야 됐다고 쳐내면 그만이었지만 하현은 대학생인 데다가 1학년이었다. 특히 실무과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해서 짓궂은 장난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사회성이 그리 좋지 못한 하현이 온갖 술자리에 빠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대학은 고등학교랑 많이 달랐다. 미팅도 허다했고, 과 혹은 동아리가 모여서 술을 마시는 일도 많았다. 신입생이라면 누구나 바쁘겠지만 하현은 해도 해도 부르는 곳이 너무 많아서 지구를 속 타게 했다. 지금은 좀 지나서 나아졌지만 학기 초에는 정말 멀쩡한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지구의 앞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셔본 하현의 술버릇은 지구를 충격에 빠뜨렸다. 하현의 술버릇은 단연 최악이라는 칭얼거림이었는데, 그걸 평소에 절대 안 그러는 사람이 하니까 너무 귀여워서 충동적으로 동영상을 몇 개 찍었다. 다음날 아침에 하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걸 왜 찍었냐고 화를 내서 다 지우긴 했지만. 와중에 잘생겨서 두 시간이 넘게 그렇게 칭얼댔는데도 화가 하나도 안 났다.
술자리에서 취할 정도로는 절대 먹지 말기로 약속하긴 했는데,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더 불안했다. 축 처진 지구가 바닥에 누워 암울한 명상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마음 같아서는 데리러 가고 싶은데, 어디인지 몰라서 갈 수가 없었다. 연락도 안 받았다.
빨리 온다던 하현은 자정이 다 되어갈 때까지 소식이 없었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겉옷을 입으려던 지구를 진정시킨 건 도어록 풀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