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번쩍!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목을 만져본다. 혈우검마의 예리한 칼에 잘렸던 목이 붙어있다. 이혼대법이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흔히 말하는 저승이라는 곳에 당도한 것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목을 수십 번이나 확인한 이후, 이곳이 저승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일어나보자.’
상체를 일으킨다. 본래 내 몸이 아니라서 그런지 대단히 무겁다. 상체를 들어올리는 것조차 버겁다. 뭐지? 이혼대법의 부작용인가?
꾸르륵-!
배가 요동친다.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내 눈에 큼지막한 허벅다리와 뚱뚱한 손이 눈에 들어온다.
“···?”
이게 사람 손인가?
순간 사람이 아닌 돼지 따위에 혼이 옮겨온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살에 파묻혀 있었다.
드르륵.
살더미에 놀라 눈만 끔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온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까 싶은 사내였다.
“도, 도련님···?”
“···.”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설마 이런 기적이···.”
“깨어나? 기적?”
“예!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기억이라···.”
난 사실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혼’과 관련된 부분인지 이 육신의 원주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역시 머리를 다치셔서 기억하지 못하시나 보군요···. 추 의원 말로는 다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사실상 죽은 것이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했었다고요···! 도련님이 이렇게 깨어나신 건 정말 기적이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쏟아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말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내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얼마 뒤.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이 몸의 원주인은 기녀들과 나들이를 갔다가 높은 언덕에서 굴러 머리를 다쳤다. 의원의 말로는 조만간 죽을 것이라 했는데, 기적적으로 내가 깨어났단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따끔한 것이 상처가 있는 듯하다.
‘···곧 죽을 운명이었던 도련님의 몸에 들어온 것이로군.’
깨어난 망나니
‘단목세가라···.’
당연히 이름은 들어보았다. 중원의 최고 명문가라 불리는 오대세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랜 전통을 이어온 가문. 호북성에선 명문 세가로 퍽 이름을 떨친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단목세가의 2공자의 몸을 차지했다.
‘얼마나 몸이 둔하면 언덕에서 굴러서 죽는단 말이야?’
배교의 이혼대법은 남의 육신을 강제로 빼앗는 무공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혼이 육신에 깃든 상태라면 내가 이렇게 들어올 수가 없었다. 혼이 없는 상태. 즉, 거의 죽음에 도달한 육신에 내 혼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
아마 단목장룡이라는 놈이 언덕에서 굴러 바로 죽어버렸다면 나와 맞는 몸을 찾지 못하고 혼이 소멸했을 수도 있었다. 사실 죽기 싫다는 마음으로 도박을 해본 것인데 이렇게 성공할 줄은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10년이 지났다니.’
혈우검마가 나를 죽이러 서녕지부에 찾아온 것이 계유년(癸酉年)이다.
그런데 지금은 계미년(癸未年)이라 했다. 어떻게 육신으로부터 보호받지 않은 혼이 10년 동안 떠돌았는지 의문이었다. 내 혼이 특별한 것일까? 운이 좋았던 것뿐일까?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혼대법의 구결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혼대법은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마다 혼을 옮겨 다닐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생이 아닌가? 뭐 다시 그런 위험천만한 도박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혼대법은 연구해보고 싶긴 했다.
‘아무튼, 새로운 기회를 얻은 건가···.’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안도와 분노. 어느 쪽이 더 클까? 지금은 분노보다는 안도감이 더 큰 듯하다. 10년이 지났다지만 나에게는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어둠이 정신을 좀먹은 다음 바로 단목장룡의 몸으로 깨어났으니까.
후우우. 후우우.
그런데 점점 숨이 차오른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서 몸이 반응한 것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지친 것이다. 대체 이놈은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단목세가는 무림 세가다. 더군다나 가주의 둘째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이런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니?
‘조금 걸었다고 숨이 차다고? 분명히 무공은 익혔는데···.’
아랫배에 자그마한 단전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내공심법은 그래도 꾸준히 익혀왔는지 세맥은 조금 단련이 되어 있었지만, 육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무공 수련을 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로 살이 찌려면 대체 얼마나 먹어야 했던 걸까?
“도련님!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시종 이새붕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장원에 들어선다.
그의 양손에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가득한 무언가가 가득했다.
“새붕아.”
“예,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얼른 상을 차릴게요!”
“이제부터 식사량 좀 줄이자.”
“···예?”
이새붕의 손이 멈칫한다. 마치 나라를 잃은 듯한 그의 표정에 순간 내가 말실수한 건가 싶었다.
“살 빼야지.”
“지, 진심이세요?”
“그래, 잠시 걸었더니 숨이 차네. 이대론 조만간 죽겠다.”
“또··· 말을 바꾸시는 건 아니겠죠···?”
아마 전적이 있었나 보다.
“이번엔 달라. 난 죽음과 마주한 후로 다른 사람이 됐다니까.”
“그, 그건 그래요. 도련님의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신 것 같긴 해요. 예전 같았으면 깨어나자마자 기루에 들르셨을 텐데···.”
유흥이라···.
예전엔 나도 그것을 많이 즐겼었지. 솔직히 지금도 그러한 즐거움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아니었지만.
“일단 밥이나 먹자.”
“옙! 그래도 지금 사온 건 다 먹으실 거죠?”
“아니. 적당히 덜어서 내와. 나눠서 먹으면 되겠네.”
“···!”
이새붕이 입을 크게 벌리고 날 바라본다. 그렇게 놀라운가? 단목장룡, 이놈은 얼마나 밥을 처먹었던 거야? 나도 망나니라 불리며 온갖 요리를 즐겼지만 양으로 승부를 보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놈은 양에 집착했던 성향이었던 것 같다.
“뭐해?”
“예에, 나중에 말 바꾸지 마세요?”
“알겠다.”
그래도 이새붕이 날 대하는 것을 보면 망나니치고는 인성이 좋았던 모양이다. 만약 성격이 개차반이었다면 시종이 이렇게 친근하게 대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시종과 마주 앉아 식사하며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어제 의원이 방문하여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기에, 아주 기본적인 것도 질문할 수 있었다.
“근데 왜 아버지는 날 찾아오지 않지? 아들이 깨어났는데 궁금하지도 않나?”
움찔!
이새붕이 젓가락질을 멈춘다.
“그게···.”
눈동자를 굴리는 모양새가 당황한 것이 틀림없었다.
“왜? 내놓은 자식이라도 되는 거야?”
“그,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면···.”
역시 맞나보네.
장룡아, 넌 나와 공통점이 많구나.
“그래도 완전히 포기하신 건 아니세요. 총관님께선 보름에 한 번씩은 도련님에 관해 보고하라고 하셨거든요. 가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시진 않을 테지만··· 계속 도련님을 살펴보고 계세요. 분명히요!”
이새붕이 날 위로한다.
“괜찮다. 내 몸을 보니 가족들이 부끄러워할 만도 하지.”
“아니에요! 얼마나 늠름하시고 멋지신데요! 저는 도련님의 볼살을 볼 때마다 참으로 복스럽다고 느껴요!”
이새붕의 칭찬은 과한 점이 있었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조금 눈치가 없는 것 같기도.
“···먹자.”
“예!”
그렇게 적당량의 식사를 마쳤다.
거대한 위는 부족하다고 자꾸 우렁찬 소리를 내뿜었지만, 무시하고 이새붕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무공을 수련하지 않았던 거야?”
“음··· 가끔 기루에서 검을 뽑으시긴 하셨어요. 여인들이 그런 모습을 좋아하신다고 하셨거든요.”
기루에서 검무를 췄다고···?
이 몸뚱이로?
“좋아하든?”
“그게···.”
“솔직히 말해 봐.”
“기녀들의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던 것··· 아, 아니에요! 분명히 도련님의 검술에 모두 반했을 거예요!”
“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
이새붕이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으음, 단목세가로 가야겠다.”
“예? 왜요?”
“왜긴? 무공을 익혀야지.”
“무공이요···?”
“그래.”
이제부터 조금 달라지기로 했다. 솔직히 지금도 의문이긴 했다. 이 몸뚱이로 과거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다행인 점은 이제까지 보았던 그 수많은 무공의 구결이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
난 그날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나만 죽였다면 딱히 복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난 살아있으니까. 하지만 그날 서녕지부에서 나와 연을 맺었던 모두가 죽었다. 피는 피로.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들었던 피의 율법은 내 본능에 각인되어 있었다. 대상이 설령 혈육이라 하더라도, 복수는 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무공을 확실히 익혀야 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무공을 익히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나는 단목세가의 사람이다.
내놓은 자식이라 하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원칙은 지켜야 한다. 무공을 익히더라도 단목세가의 무공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했다. 갑자기 내가 화산파나 무당파의 검법을 익히면 일이 꼬일 테니까.
‘단목세가의 무공을 원형으로 하여 다른 무공을 조합하면 되겠지.’
지금도 수십 가지의 무공을 조합할 수 있었다. 무공을 상상 속에서 펼쳐내는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몸이 따라올 수 있을지가 문제였지만··· 예전처럼 단지 재미없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자. 새붕아.”
“예, 도련님.”
이새붕의 안내를 받아 단목세가로 출발한다. 초라한 장원을 나서 관도를 따라 쭉 걸으니 저 멀리 웅장함을 자랑하는 거대한 장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확실히 명문 세가의 태가 났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어억···! 제기랄, 이거 걷고 힘드네···. 허어억···.”
“도련님, 괜찮으세요?”
“자, 잠시만 쉬자.”
걷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가?
과거의 몸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쯔쯧, 돼지 도련님 지나간다.”
“웬일로 이 길을 걷고 있대?”
“그러게. 근데 병상에 누워있다고 하지 않았나?”
“몰라. 좋아하는 고기 먹고 일어났겠지.”
주변에서 대놓고 날 놀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난 단목세가의 공자가 아닌가? 명문세가의 도련님에게 들릴 정도로 험담을 나누어도 되는 건가? 날 놀리는 소년들의 차림새를 보니 그래도 꽤 있는 집 자식처럼 보였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목세가, 내가 아는 것과 다르게 그리 대단치 못한 가문인가? 아니면···.’
이새붕을 바라본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새붕아.”
“···.”
“이새붕.”
“예···?”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 말씀하세요. 도련님.”
“난 일상적으로 무시를 당해왔던가?”
“그게···.”
그의 어깨를 잡는다. 이새붕이 흠칫했지만, 내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줘. 기억이 없어져서 나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싶거든.”
“조금··· 아주 조금 그런 경향이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새붕은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피한다. 네가 미안할 건 뭐야?
“그래도 도련님이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화월루나 성성루에선 도련님은 다른 이에게 무시당하지도 않고 당당하셨어요! 누가 뭐라고 하면 바로 칼을 뽑으셔서 당당하게···.”
“그만.”
“예···.”
어떤 성격인 줄 알겠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런 인간이었나.
‘내가 짊어져야지.’
회피할 생각은 없다. 과거가 어떻든 난 단목장룡으로 살아가려고 생각했다. 과거의 연을 모두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당면한 상황을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도망만 치다간 결국 과거와 같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저놈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만용일 뿐. 오히려 더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나를 놀린 놈들의 허리춤에는 병장기가 있다. 무공을 익힌 놈들이다. 내가 가진 권세로 저놈들을 누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언젠간 나를 비웃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저놈들 이름이나 알려줘. 나중에.”
“예, 도련님!”
“그래, 가자.”
뭔가 이새붕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앞장서던 이새붕의 속도를 맞추려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잠시만 쉬자. 아버지한테 헐떡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구나.”
그렇게 단목세가의 장원 입구에서 쉬고 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야.”
단정하게 백의를 갖춰 입은 한 소년이 터벅터벅 걸어온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강렬한 적의가 엿보인다.
‘저건 내 옷과 똑같군. 단목세가의 사람이다.’
어쩌면 형제일 수도.
내 예상은 맞았다.
“3공자님···!”
3공자라.
난 2공자였으니 저놈은 내 동생이란 소리다. 이름이 단목경이라 했던가?
“돼지. 여긴 무슨 낯짝으로 온 거야? 아버지께 또 매라도 맞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동생의 말버릇이 참으로 고약하다.
“네가 내 동생인가?”
“···정말 기억을 잃었나 봐?”
기억을 잃은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깨어난 이후로 단목세가 사람과 마주한 적은 없었다. 다만, 어제 의원에게 진료를 받았으니 그가 말해줬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동생아.”
“동생아? 우웩, 역겹다. 넌 내 형도 아니야. 같은 성을 쓴다고 너와 같지 않다고. 넌 가문의 수치일 뿐이야. 알아?”
사실 이런 취급은 예상했다.
집안의 망나니는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더군다나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정파라면 더더욱.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런 대접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다신 마주치지 말자. 응?”
그렇게 떠나려는 단목경의 손목을 붙잡는다.
“뭐야? 미쳤어? 안 놔?”
사실 처음엔 그냥 보내주려 했다.
하지만 그 물건을 본 순간 어쩔 수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게 왜 네 손목에 있는 거지?”
“···뭐?”
“어? 그건 우리 도련님이 노점에서 은화 하나에 사셨던 건데···.”
옥으로 된 팔찌. 사실 특별할 것 없었지만, 그곳에 작게 새겨진 이름이 중요했다.
사공천.
이제는 죽어버린 과거의 육신. 당시의 내가 항상 팔에 차고 다녔던 물건이다.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인다. 과거 내가 익혔던 무공은 무림에서 절세 무공으로 불리던 것이다. 전혀 방비하지 않고 있던 소년이 막을 수 없었다.
“커헉···!”
내 주먹에 급소를 맞은 단목경이 헐떡이고 있을 때, 놈이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뺏었다.
“허어억···!”
팔찌를 쥔 순간, 걷는 것도 벅차하는 몸뚱이가 격한 반동을 일으켰다. 숨이 꼴깍 넘어갈 듯했다. 공격을 받은 단목경와 주먹을 명중시킨 내가 동시에 헐떡이는 모습은 장관이리라.
그런데도 나는 팔찌를 놓치지 않았다.
‘령···.’
이 팔찌는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 내게 줬던 이별 선물이었다.
가주와의 만남
부서져 내리는 듯한 달빛이 흐르는 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의 세기가 조금 강해질 때면 그녀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 은은함이 참으로 좋았다.
“사 공자님.”
“응?”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린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이곳에 있으며 많은 미녀를 마주했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가···.
“왜?”
“공자님은 여기가 좋으신가요?”
“너랑 있으면 좋아질 것도 같고.”
가끔 이렇게 느끼한 말을 내뱉어주면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좋았다. 다른 이들에겐 어떠한 표정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내 느끼한 말에도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전 공자님이 이곳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공자님은··· 신교와 맞지 않아요.”
“···그럴지도.”
그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과한 기대감. 어머니의 욕심. 어른들의 탐욕. 또래의 질투. 모든 것이 별로였다. 내가 이곳에 있게 해주는 이유는 단 하나. 옆에 있는 그녀였다.
“떠나세요.”
“떠나라고? 갑자기?”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다.
“네.”
“···.”
어딜 가라는 말인가?
내가 있을 곳은···.
“공자님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에요.”
“왜? 난 너만 있으면···.”
“전 이제 사 공자님과 만나지 않을 거랍니다.”
예전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더 예민한 말투로. 자꾸 들러붙는 내가 싫다며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다르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슬퍼 보였다.
“진심이야?”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허튼 말을 할 여인은 아니다. 이제까지 어떠한 전조도 없었지만, 그녀가 저리 말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지?”
내 물음에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그녀가 살짝 입을 벌린다. 그래, 난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의 그녀를 보는 것이 좋았다. 아니, 그런 모습까지 사랑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