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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잔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날.
아침을 먹고 있는 중, 참으로 의심스러운 복색을 한 사람이 객잔으로 들어온다. 흑색 무복에 황갈빛의 죽립을 푹 눌러 써 얼굴을 가리고 있다. 걸음걸이만 봐도 무공을 익혔다. 발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무림인이군.’
뭐 강호에서 무림인을 만나는 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굳이 시비만 걸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저 말입니까?”
그 사람은 뚜벅뚜벅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날 알고 있다기보단··· 탁상에 걸쳐놓은 검을 보고 온 듯했다.
“그래, 아 미안. 식사하는데 방해가 됐나? 금방 묻고 나가지. 혹시 이 근방에서 얼굴에 흉이 심하게 난 두 중년 사내를 보지 못했어? 뱀을 어깨에 달고 다녔을 수도 있는데.”
누군가를 추적하는 무림인인 모양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확실히 여인이라는 것을 알겠다. 목을 꾹꾹 눌러 저음을 내긴 했지만, 날 속일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것을 지적할 생각도 없다.
“보지 못했소.”
“그래···? 흐음, 알겠어.”
그녀는 잠시 죽립 아래로 날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다른 탁자로 간다. 그리고 내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을 묻는다.
이새붕이 잔뜩 긴장하며 내 눈치를 본다. 다짜고짜 말을 놓은 것을 보니 예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비를 걸러온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
“옙, 도련님!”
이새붕과 식사를 마치고, 객잔을 나선다.
하지만 오래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객잔에서 만났던 그 수상쩍은 인물이 내게 볼일이 남았는지 날 미행하고 있었다. 나는 무공을 익히며 감각의 활용을 최대한 발전시켰다. 혹시 모를 위협을 대비할 수 있는 건 극한으로 단련된 감각이었으니까.
뒤를 돌아보니 당연하게도 시야에 들어오진 않는다. 나무에 숨어 있었다.
“도련님? 왜 그러시는···.”
“할 말이 있는 듯한데, 그만 나오시오.”
죽립 여인이 나타난다.
“내가 찾는 두 사람이 말이야 변장에도 능하거든. 거기에다 너희와 체격이 너무 비슷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내 말을 좀 따라···.”
뭘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인피면구라도 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나는 그 의심을 단번에 지워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두 팔을 올린다. 죽립 여인이 움찔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든 공격해올 수 있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두 볼을 쭈욱 늘렸다.
인피면구 따위로는 이러한 짓을 절대 할 수 없었다.
소저가 속은 듯하오
“뭐··· 뭐 하는 거야?”
“인피면구를 썼다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오?”
내 말에 죽립 여인이 고개를 갸웃한다.
“볼살이 그렇게 늘어나면 인피면구가 아닌 거야?”
허당인가?
행색은 마치 마치 비밀스러운 단체의 은밀한 자객 같은데 말이지. 걸음걸이로 볼 때 확실히 제대로 무공을 배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그녀가 찾는 사람이 인피면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변장할 수 있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이제 증명이 됐소? 어떤 문파의 소저인진 모르겠으나 나는···.”
“뭐야? 너···!”
그녀의 눈에 의심의 빛이 깃든다.
“뭐가 말이오?”
“어떻게 내가 여자라는 걸 알지? 수상한데···!”
“딱 보면 알 수 있소. 무림인 사내치고는 근육이 크게 없이 홀쭉하고,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티가 나는군.”
“티가 많이 나?”
“뭐 그렇게 많이 나는 건 아니오. 보통 사람들은 특이한 목소리의 사내라 생각할 것이오.”
“목소리를 더 굵게 내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으응, 그래. 이건 더 연습이 필요··· 아니지! 너 지금 난 혼란에 빠트리려고!”
갑자기 분개하며 자세를 낮추는 죽립 여인.
아주 잠깐의 대화이지만 그녀의 성격을 알 것 같았다. 뭐 이것이 철저히 계산된 연기가 아니라면야···.
‘애초에 나를 상대로 그런 연기를 펼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다가 결국 신교에서 배척당했다. 강호는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곳. 그러니 좀 더 주의해야 한다. 나 혼자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이새붕이 위험해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그만. 더 가까이 오지 마시오.”
내가 경계하기 시작하자 죽립 여인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한다.
“네가 더 의심되거든?”
“소저가 찾는 사람과 체격이 비슷해서 말이오?”
“그것도 그런데··· 눈썰미가 너무 좋단 말이야.”
“후우···. 아무튼 난 소저가 찾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인피면구를 쓰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줬으니 이만 가봐도 되겠소?”
“···.”
잠시 침묵하며 고민하던 여인.
“내가 얼굴을 만져봐도 돼?”
“안 되오.”
“왜?”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날 미행하던 사람에게 얼굴을 만지게 하겠소?”
“그건···.”
“누굴 찾는진 모르겠지만 꼭 찾길 바라오. 가자, 새붕아.”
그렇게 이새붕과 몸을 돌려 걸어가는데 그녀가 우릴 쫓아온다.
허리춤의 검을 쥐며 말한다.
“더 가까이 오면 검을 꺼낼 것이오.”
경고.
진심이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사람에게 거리를 허용할 순 없다.
“잠시! 잠시만! 내가 보니까 넌 내가 찾던 그 사기꾼 놈들이 아닌 건 알겠어! 인피면구도 쓰지 않은 것 확인했고! 네게 부탁할 게 있어!”
“부탁?”
“응! 나랑 같이 그 사기꾼을 찾아줘! 네 눈썰미라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거야!”
“싫소.”
단호한 대답에 그녀가 당황한다.
“뭐···? 왜? 나 돈 많아. 금화 한 냥 정도면 될까?”
꽤 많은 돈이다.
그 정도를 쉽게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만큼 찾는 사람이 중요하단 말인가. 후자였다면 애초에 사람을 부려 사기꾼들을 찾게 했을 것이다. 전자라면···.
“소저가 누군지도 모르며, 난 가야 할 곳이 있소.”
“아, 내가 누군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말하며 죽립을 벗어던진다.
턱과 입술만 봐도 제법 미인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루에서 수많은 여인과 마주하며 얻었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죽립을 벗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내가 단목세가의 도련님으로 빙의한 후에 본 여인 중에서는 제일이라 말할 정도였다.
방긋.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내게 신뢰를 주겠다는 듯.
“난 사천당문의 당옥정이야!”
“···당문?”
“응! 맞아! 이제 믿음이 가?”
사천당문의 여식이었던가. 어쩐지 보법이 남다르긴 했다. 당문은 독과 암기를 주로 사용하는 문파였다. 그리고 중원 무림에서 오대세가라 불리는 명가 중의 명가였다.
‘사천당문의 여식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사기꾼이라면 가문의 세력을 동원해서 찾으면 될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일단 오늘 객잔에서 들은 이야기부터 이상했다. 뇌왕의 장보도? 그게 아직 남아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설마 그게 정말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관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태상가주님이 당문에 예쁜 아이가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은근히 날 떠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여인에겐 관심이 없다고 답했었다.
“자, 봐!”
그녀가 은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패를 꺼냈다. 자세히 보니 커다랗게 사천당문이라는 글자와 아래엔 ‘당옥정’이라는 이름이 양각되어 있었다.
정말 사천당문의 여인인 듯하다.
“와···.”
그리고 내 옆에 있던 이새붕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외모에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언젠가 이새붕에게 여인에게 홀리지 않는 법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당옥정에게 말한다.
“당 소저를 뵙소. 난 단목세가의 단목장룡이라 하오.”
“어? 단목세가? 정말이야?”
“그렇소.”
“나 거기에 높은 사람이랑도 조금 친한데···!”
태상가주가 말했던 여인이 당옥정일 확률이 더 높아졌다.
하지만.
“아, 그렇소?”
“그래!”
“흐음···.”
“반응이 왜 그렇게 미적지근해? 아무튼, 이제 날 도와줄 수 있는 거지?”
고개를 젓는다.
“난 가문의 명에 따라 지부로 가는 길이오. 소저의 부탁을 들어줄 순 없소.”
잔뜩 실망했다는 표정의 여인.
하지만 표정과는 다른 말을 내뱉는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말하면서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하지만 나는 그녀와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이리 만나서 반가웠소. 그럼 우린 바빠서 이만.”
그렇게 떠나가려 할 때, 그녀가 외친다.
“뇌왕의 보물!”
“음?”
그녀가 숨소리를 낮추며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건 비밀이라는 듯이 속삭였다.
“그놈들이 내 장보도를 훔쳐 달아났어. 장보도를 찾으면 거기서 얻는 보물을 나눠줄게.”
또 뇌왕인가.
“장보도가 있었단 말이오?”
“맞아! 거기엔 뇌왕 대협의 절세 무공과 온갖 금은보화가 있어. 난 거기서 뇌왕 대협의 무공만 찾으면 돼. 나머지는 전부 너한테 줄게.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초롱초롱 눈을 빛낸다.
어쩌지?
‘허튼 정보는 아닌 건가.’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문의 여인이 장보도의 존재를 알고 있다. 객잔의 뜨내기들이 호들갑을 떨며 대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말 장보도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