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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 도착한 뒤로 두 달이 지났다.
부지부장으로 성도지부에 왔지만, 제대로 된 업무를 맡은 건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지부에서 날 감시하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뭐 마냥 좋아할 상황은 아니긴 했다.
지부 내에서 서열 2위였지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이제 슬슬 나가볼까.’
태상가주가 날 이곳에 보낸 이유는 틀어박혀 수련만 하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분명히 있다. 단목산산을 수련시켰던 것처럼 지부원들을 가르쳐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나 부지부장으로 있으며 경험을 쌓으라는 의미로 보낸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구룡환이라는 영약까지 내어줬겠지.
날 믿어준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과거처럼 내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신교에서 내가 조금만 더 책임감이 있었다면··· 그런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좋아서 맡은 부지부장의 자리는 아니었지만, 자리만큼의 책임을 진다.
그렇기에 최근엔 전각을 나와 지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지부의 인원은 총 100명.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적은 것도 아니다.’
그중 무공을 익힌 이들은 30명이다.
사실 너무 많은 것도 좋지 않았다. 잘 수련시킨 무림인 하나가 100명을 대체할 수 있다. 지부원들의 재능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곳의 인원은 총관이 모두 뽑았다더니··· 안목은 그럭저럭 괜찮군.’
지부원들은 내가 지나가면 형식적으로 인사하며 수군대긴 했지만, 첫날처럼 마구잡이로 시비를 걸어오진 않았다. 역시 첫날엔 총관의 지시로 문지기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친선 비무 대회를 연다고?’
사천성하면 아미파, 청성파 그리고 사천당문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중소문파가 존재한다. 이곳 성도에도 단목세가 성도지부 뿐 아니라 수십 개의 문파과 가문 그리고 무관이 존재한다. 이번 비무 대회에서는 그래도 사천성에서 퍽 이름이 알려진 문파가 참가한다고 했다.
‘나도 참가해볼까?’
두 달 동안 꽤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살은 빠지고, 근육이 붙었으며, 내력의 제어가 더 수월해졌다.
지부의 부지부장이 참가하지 못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마침 비무 상대도 필요하고 말이야.’
내가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 알아보려면 비무가 제격이다. 중소 문파라도 실력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들어보니 태천문의 대제자는 일대에서 유명한 기재로 소문이 났단다. 적당히 힘을 뺀다면 멋진 비무를 선보일 수 있을 테지.
지부의 명성도 올리고, 비무로 내 실력도 확인해볼 수 있었다.
‘가보자.’
난 그대로 지부장에게 찾아갔다.
그에게 비무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부장님, 저도 친선 비무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지부장이 내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쉰다.
“조용히 지내다가 갑자기 왜 그러는가? 심심해서 그러는가?”
“심심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후우우···. 미안하네. 이미 비무 대회 참가자들의 이름을 모두 올렸다네. 자네는 참가할 수 없어. 다만, 관전은 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 참아주게나.”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참가하고 싶다고 계속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게.”
뒤에서 지부장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지부 내에서의 인식을 바꿀 때가 다가온 듯하다.
망나니의 미친 인맥
친선 비무 대회 당일.
이번 비무 대회엔 태천문, 교룡문, 악호문, 백결문 총 네 개의 문파가 참가한다. 각 현에서는 이름을 날리는 문파들이다. 특히 태천문의 대제자는 그 무재가 상당히 뛰어나다고 한다. 내년에는 천룡각에 입각시험을 치르러 간다고 했다. 언젠간 강호의 영웅이 될 이와 연을 맺어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각 문파의 수장들이 지부장의 주위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비무에 참가하지 않고, 제자들의 비무를 관전한다. 가볍게 술을 한 잔 마시고 있었기에 분위기가 상당히 화기애애했다.
백주 한 잔을 모두 마신 태천문의 문주가 막 생각났다는 듯이 지부장에게 말한다.
“참, 단목세가의 본가에서 부지부장이 새로 왔다고 들었소. 가주님의 둘째 아드님이라 하던데 오늘 비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오?”
그 말에 지부장 단목필이 찔끔한다.
그걸 어찌 알고···.
“아, 부지부장은 이번 비무 대회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우관이랑 같다고 들었소. 비무를 하며 우애를 쌓으면 본문과 단목세가의 관계가 더 두터워지지 않겠소이까?”
그가 말한 우관이라는 인물은 태천문의 대제자인 양우관을 말하는 것이다.
태천문주는 일류의 경지에 문파를 개파하여 이제는 절정의 경지에 올라섰다. 절정이라는 경지는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없다면 오를 수 없는 경지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는 그보다 빨리 절정에 올라설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부장이 사천성에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이런 비무 대회를 개최한 것처럼, 태천문도 제자의 명성을 떨치고 인맥을 쌓기 위해서 비무 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단목세가의 둘째 공자라면 태천문의 대제자와 잘 어울리는 친우가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말한 것이다.
당연히 태천문주는 단목장룡이 의창현에서 평이 어떠한지, 지부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부지부장은 이제 막 지부에 적응하고 있어서 비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인사라도 나눌 수 있겠소? 나도 우관이를 이곳으로 부르겠소이다.”
“그건···.”
오늘 단목장룡은 비무 대회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혹여나 사고를 칠까 걱정된 지부장이 전각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총관이 나선다.
“지금 부지부장님께선 방에서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아, 그렇소···? 아쉽게 됐구려.”
영 찜찜했지만 태천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좋지 않다는데 어찌 불러내겠는가?
지부장은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일로 이제 부지부장의 얼굴을 보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도하는 지부장과는 다르게 총관은 양심이 찔렸다.
두 달 동안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았던 단목장룡. 전각에 박혀 무공 수련만 하는 듯했다. 최근 마주쳤을 당시 살이 더 빠진 상태였다. 어쩌면 이번 일로 크게 상심했을 수도 있었다. 단목장룡이 지부에 도착했던 날 기선을 잡으려 했던 총관이지만, 최근 들어 그가 정말 망나니가 맞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어제 단목장룡을 비무 대회에 출전시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지부장을 설득했던 총관이었다. 하지만 지부장은 단목장룡을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과거 본가에서 어떤 망나니짓을 했는지 직접 봤던 지부장이었기에 그런 반응을 보였겠지만···.
‘후우···. 이번 비무 대회가 끝나면 진솔하게 대화라도 나눠봐야겠군.’
망나니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대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이 생각하던 망나니가 아니라면··· 지부장을 설득하여 관계를 새로이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총관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첫 비무가 시작됐다.
교룡문과 태천문의 비무였다.
처음 비무에서부터 태천문의 대제자인 양우관이 출전한다. 모두 한가득 기대를 담아 비무장을 바라본다.
“허허, 역시 태천문의 검은 날카롭구려?”
“교룡문의 제자도 만만치 않소이다.”
두 문주가 덕담을 나눈다. 본래 실력으로라면 태천문의 대제자인 양우관이 앞섰지만, 친선 비무라는 틀을 깨지 않기 위해 힘을 조절하며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비무가 절정에 향해갈 무렵.
장원 전체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비무를 하던 두 제자도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입구를 바라본다.
“헙···!”
양우관이 눈을 떼지 못한다.
입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그가 살아오며 본 여인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무방했다. 단목세가에 이런 미녀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태천문의 문주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독봉(毒鳳)···!”
독봉이라는 말에 지부장의 옆에 있던 문주들이 모두 일어선다. 사천의 패자라 불리는 사천당문의 내당주. 그녀는 현 사천당문 가주인 독왕(毒王)의 하나뿐인 누이였다. 소문으로는 그 불같은 성정의 당문의 가주조차 독봉에겐 뭐라 하지 못한다고 한다.
각 문파의 문주들은 자신들의 체면도 무시하고 허겁지겁 달려나간다.
독봉은 사천당문 출신이 아니라 해도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여고수 중 하나였다. 배분으로 따져도 이곳에 모인 문주들보다 훨씬 높았다.
“안녕하십니까, 전 단목세가의 지부장인 단목필이라 합니다. 독봉께서 단목세가에서 주최하는 비무를 관전하러 오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단목필이 인사하자 태천문주를 비롯한 문주들이 앞다퉈 독봉에게 인사했다.
독봉은 살짝 눈웃음지으며 그들에게 포권지례를 했다.
“태천문주님은 과거 한 번 뵌 적이 있지만, 다른 분들은 처음 뵙는군요. 사천당문의 당용아입니다.”
당용아의 옆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도 인사한다.
“전 사천당문의 당옥정이라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허어···!”
사내들이 침을 꿀꺽 삼킨다. 당용아는 나이치고는 지금도 그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젊은 당옥정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봄에 활짝 핀 꽃과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당옥정이었다. 뭐 취향이 다르다면 농밀한 매력의 당용아가 더 매력있다고 평할 수도 있으리라.
“무림오화(武林五花) 중 한 명을 여기서 보다니···.”
“꿈이야 생시야···?”
각 문파의 제자들이 속삭인다.
속삭인다고 해도 장원 내의 사람들이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으니 당옥정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자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네 사내의 안내를 받는 당용아. 그 뒤를 당옥정이 따른다. 그러면서도 당옥정은 무언가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순간 당옥정과 태천문의 대제자인 양우관의 눈이 마주친다.
양우관은 그 순간 다짐했다.
이번 비무에서 자신의 무공을 모두 펼쳐 보이자고. 무림오화 중 하나인 당옥정에게 잘 보일 기회였다.
- 내 지부장을 다시 봤소이다. 바깥 행차를 잘 하지 않는 내당주까지 모시다니··· 정말 대단하오!
지부장은 태천문주의 전음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성도에서 지부장직을 몇 년이나 해왔지만, 당문과는 제대로 된 연을 만들지 못했다. 사천당문의 외당주와도 잠시나마 인사를 나눈 것이 다였으니. 어찌하여 내당주가 이곳에 온 것일까?
‘아무렴 어때··· 이대로 당문의 내당주와 확실한 연을 맺는 거다.’
지부장이 꿈꿔왔던 목표에 큼지막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저 때문에 비무가 중단되어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비무장에 오른 두 제자도 독봉께 무공을 선보이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냐?”
“예!”
두 제자가 호기롭게 외친다.
당용아는 감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태천문주는 그녀의 완숙한 아름다움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당용가가 착석하자 심판이 비무가 재개됨을 알린다.
당연하게도 이제는 힘을 숨기지 않은 태천문의 대제자가 쉽게 승리를 거둔다. 그는 최대한 멋진 자세를 잡으며 당옥정을 바라본다.
‘크흠···.’
하지만 당옥정은 비무장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자꾸만 무언가를 찾는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걸 본 지부장이 묻는다.
“당 소저께서 무얼 찾고 계십니까?”
“아, 그게···.”
그 말에 당용아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을 뺏어간 그 아이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구나.”
“고모님!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당옥정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부들부들 떤다.
잔뜩 성난 가주에게 폐관하라는 명을 받고, 두 달 동안이나 갇혀 있었던 그녀다. 가끔 단목장룡이 생각나긴 했고··· 심지어는 꿈에서도 나왔지만, 마음을 빼앗겼다니? 절대 그런 게 아니다. 단지··· 사람을 죽이는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던 그 차갑던 모습이 눈에 밟혔을 뿐이다. 당옥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웃는 당용아.
어리던 당옥정이 이제는 꽤 컸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후후후···.”
지부장을 비롯한 다른 네 명의 문주는 입을 크게 벌린다.
이곳에 사천당문의 1공녀인 당옥정과 연을 맺은 사내가 있단 말인가?
문주들과 지부장이 서로 시선을 교차했지만, 모두 모른다는 눈치였다.
보다 못한 당옥정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친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크흠, 아무튼 당 소저가 찾고 계신 사람이 있단 말이지 않습니까? 같이 자리에 앉아 비무를 관전하면 어떻겠습니까?”
지부장의 말에 당용아가 대답한다.
“그거 반가운 소리군요. 저도 얼른 그 아이를 보고 싶어서 말이에요.”
당옥정은 뭐라 반박하려 하다가 입을 꾹 다문다.
그녀도 사실 단목장룡을 얼른 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절대 마음에 담은 사내였기 때문이 아니고, 그때의 일을 보답하고 싶었을 뿐이다! 당옥정은 속으로 소리쳤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구입니까?”
지부장이 당용아을 바라보며 물었다.
“단목세가 성도지부의 부지부장이라지 않았느냐?”
“네, 맞아요.”
응?
순간 지부장이 멍청한 얼굴을 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부지부장?
“···?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단목장룡이요!”
당옥정이 쐐기를 꽂는다.
그 말에 다른 네 명의 문주들은 부럽다는 듯이 지부장을 바라본다.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당용아의 말대로라면, 두 사람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사실. 만약 자신들의 문파에서 당옥정과 연을 맺을 사내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잔치를 벌일 경사였다.
그리고 정작 기뻐해야 할 당사자.
그러니까 단목세가의 지부장 단목필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던 단목세가의 총관.
그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런··· 부지부장님과 당 소저의 관계가 사실이라면···.’
그 관계를 알게 된 순간부터 단목장룡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두 달 동안 철저히 그를 배제하고 무시했는데, 당문과 연이 있다고 해서 태도를 바꾼다? 총관의 성격으로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단목장룡이 성도지부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겠는가?
여기서 태도를 싹 바꾼다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하하··· 우현아, 우현아···. 평생에 편견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너만큼 편견을 가진 사람이 또 없었구나.’
후회는 언제 하더라도 늦은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