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검강을 수련하게 된 지 7일이 지났다.
아직 실전에선 검강을 발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만간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됐다. 또 검강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검기의 제어력 또한 크게 상승했다.
푸르스름한 검기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봤자 반 치 정도 늘어난 것에 불과했지만, 실전에서 적절하게 활용한다면 적에게 상당한 위협을 줄 수 있다.
거기에 쾌검과 환검을 조합한다면···.
짜릿!
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이러다가 무공 변태가 되어버릴 수도···.’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흐르는 땀을 닦고, 검을 허리춤에 찬다.
저 멀리서 이새붕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에게 사천당문으로 가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라 시켰다. 가끔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을 시키다 보면 경험이 쌓일 것이다. 모든 일에 내가 직접 움직여서 상황을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미래를 위해 이새붕에게 조금씩 일을 시키기로 했다.
“어떻게 됐어?”
“이제 곧 청성파의 장문인께선 청성파로 돌아가실 것 같아요. 청성에 돌아가시면 바로 봉문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제 청성파와의 일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여기서 청성파를 압박하여 더 얻을 것도 없었으며, 이미 그들은 봉문까지 선언했다. 청성에게 소청단까지 받은 마당에 더 이득을 취하겠답시고 구파일방 중 하나인 청성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다.
“예정대로 됐네.”
“예! 참, 그리고 당 공녀님께서···.”
“응? 당옥정?”
“예, 조만간 지부를 찾아오신다고 하셨어요.”
다다다닷!
멀리서 발소리가 들린다. 지부원 하나가 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헐떡대고 있었다.
“부, 부지부장님···! 그분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왔군.”
밖으로 나가니 당옥정이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볼 때마다 뭔가 감성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장룡.”
“음?”
“왜 직접 안 오고 새붕이가 왔던 거야?”
“으음, 문제라도 있었어?”
청성파의 장문인이나 사천당문의 가주와 직접 마주해야 한다면 직접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당문의 가주인 당허도도 일이 있으면 서신을 전해주면 된다고 했었다. 그들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이새붕이 몹시 당황하여 허리를 숙인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만약 그랬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무림의 법도를 아직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해서···.”
그러자 되려 당황한 것은 당옥정이다.
“아, 아니···! 난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건데···.”
새침했던 표정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럼 무슨 일인데?”
“···정말 몰라?”
끄덕.
당옥정이 흥, 하며 콧김을 내뿜는다.
“같이 반점에 가기로 약속했잖아.”
“아, 그랬었지.”
“···.”
묘한 눈빛으로 날 흘겨보는 당옥정. 최근 열심히 수련했으니 잠시 쉬어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또 그녀에겐 물어볼 것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 가자.”
“어? 정말? 바로 가는 거야? 괜찮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당옥정.
자기가 가자고 해놓고 저리 반응하는 건 뭐지?
“수련도 끝났고, 너한테 할 말도 있어서.”
“나한테? 무슨 말인데? 지금 해주면 안 돼? 나 궁금한 건 못 참는데···.”
“참아 봐.”
내 말에 당옥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으응···.”
“그럼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어? 새붕아 너도 가야지.”
당옥정의 말에 이새붕이 머리를 긁적인다. 아직도 예쁜 여자를 보면 당황하는 것은 크게 고쳐지지 않았다.
“저, 저는 수련을 해야 해서··· 그렇죠, 도련님?”
도와달라는 눈빛.
그렇게나 부담되는 건가.
“그래, 수련하고 있어라.”
“옙!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당옥정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공을 수련한다는 이새붕에게 같이 가자고 더는 조르지 못했다.
난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반점 말고 이야기하기 좋은 곳으로 가자. 청월 객잔이라고 했던가?”
“응, 알겠어.”
그렇게 당옥정과 나란히 걷는다.
“참, 너 별호가 생겼더라?”
“별호?”
무림에선 이름보단 별호로 부르길 좋아한다.
최근 청성파의 장로를 꺾었으니 어쩌면 별호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뭔데?”
“성도잠룡(成都潛龍).”
성도 잠룡이라···.
보통 지역명과 함께 붙은 별호는 그리 높게 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성도는 결코 작은 현이 아니었고, 사천성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더군다나 잠룡이라는 의미는···.
‘내 가능성을 높게 쳐준다는 거군.’
“마음에 들어?”
“나쁘진 않네.”
“아빠가 그러는데 넌 언젠간 이름을 크게 알릴 무인이래. 아빠는 그때 한 번 보고 네 재능을 알아봤나 봐. 나도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다르단 걸 알아봤다니까?”
그녀는 자신이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렇게 봐줘서 고맙네.”
“후후, 나중에 더 유명해지면 나 모른 척하기 없기야?”
“사실 유명하기로 따지면 네가 나보다 유명하지 않아? 무림오화 중 하나라면서?”
그 말에 당옥정이 몸을 비비 꼰다.
“으윽, 너무 오글거려. 무림오화라니···.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무림의 다섯 꽃이라고 불리는 게 너무 이상해. 난 꽃처럼 대접받을 생각도 없는데 말이야. 난 실력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거든.”
하기야 옆에서 지켜본 당옥정은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려는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 뇌공검법을 익히고 있잖아?”
당옥정은 이제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암기도 나쁜 무기는 아니지만, 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화경에 경지에 접어들면 병기의 한계 따위는 무시할 수 있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어! 후후!”
당옥정이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짓는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미 청월 객잔에 도착했다. 확실히 유명한 객잔이라 그런지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일 층은 거의 만석인 듯했다.
“공녀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방문해주시는군요.”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다가와 인사한다.
당옥정이 이곳에 많이 들리긴 한 모양이다.
“총관님, 오랜만이에요! 혹시 3층에 자리 있어요?”
“예, 3층은 언제나 한적한 편이지요. 매번 앉던 자리로 안내해드릴까요?”
“네, 고마워요.”
1층은 만석이었고, 2층은 자리가 반 정도 차 있었다.
그리고 3층엔···.
‘손님이 두 명뿐이군.’
일단 탁상끼리의 거리부터가 달랐다. 1층은 최대한 효율을 극대화한 자리 배치라고 한다면, 2층은 그보다 더 넓었고, 3층은 탁자끼리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아마 3층은 자릿값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3층을 둘러보고 있을 때.
‘으음?’
두 명의 손님.
의아할 정도로 얼굴에 특징이 없는 사내와 지나가다 눈이 돌아갈 만큼 빼어난 외모를 가진 여인이 마주 앉아 식사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외견에 주목하는 건 아니다.
‘무림인.’
그리고 고수였다.
공자님의 흥미로운 이야기
객잔 내부엔 한 쌍의 남녀만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식사하고 있었다.
사내는 튀지 않은 흑색 무복을 입고 있었고, 여인은 몸매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는 뇌쇄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내라면 무조건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고, 한 번 시선을 주면 다시는 고개를 돌리기 힘든, 그러한 몸매였다.
“푸훗··· 재밌네, 정말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자신보다 약한 여인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말에 암천회의 소회주 갈유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직접 내뱉는 사람이 어딨는가? 그렇기에 더 흥미롭기도 했지만.
‘재밌겠어.’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유흥일 뿐이다.
정파의 후기지수와 금단의 사랑을 꿈꾸는 소녀 따위는 절대 아니었다. 흔히 보아왔던 사내와 다르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그가 자신의 매력에 홀딱 빠져 허덕이게 되면 더 좋았고 말이다.
“음··· 자연스럽게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잠시 고민하던 곡위가 천천히 입을 연다.
“낭인들을 고용하여 단목세가의 지부를 공격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단목장룡의 발언으로 볼 때 강한 여인을 동경하는 듯합니다. 소회주님의 실력을 보여주면 분명히 효과가 클 겁니다.”
그 말에 갈유화가 고개를 휘휘 젓는다.
곡위는 똑똑했지만, 이상한 곳에서 허술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너한테 물어본 내 잘못이지.”
“죄송합니다.”
“그냥 단목세가 지부 앞에 가봐야겠어. 우연이 운명이 되고 그런 것 아니겠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의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의례적인 대답에 갈유화가 한숨을 내쉰다.
“그냥 먹자.”
“예, 소회주님.”
다시금 식사 자리엔 침묵이 감돌았다.
젓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의 고요함. 아래에서 그 고요함을 깨는 발소리가 들린다. 다른 손님이 올라오는 것이다.
갈유화의 표정이 언짢다는 것을 알아챈 곡위가 묻는다.
“올라오지 못하게 할까요?”
“됐어. 그 일도 있는데, 성도에서 소란을 키울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 일이라는 말에 곡위가 움찔한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래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봉봉계가 일품이야. 너도 한 번 먹으면 확 빠질걸?”
“그래, 기대해볼게.”
“후후, 놀라지 마.”
한 쌍의 남녀가 3층에 올라선다. 처음엔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던 갈유화였다. 하지만 계단쪽을 바라보던 곡위의 눈썹이 꿈틀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고개를 돌린다.
‘어···?’
갈유화는 실로 오랜만에 당황했다.
암천회가 터를 잡은 해남도. 그곳에선 단연코 그녀가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또 해남도를 나와 강호에 나와서도 외모로는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 무(武)와 미(美)를 겸비했다는 정파의 무림오화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실제로 본다면 자신이 절대 꿇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3층에 올라온 여인은···.
‘예쁘네? 청순하면서도··· 귀여워. 20살이랬나? 나보다 7살이나 어리긴 해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이 짙다. 화장을 다르게 한다면 전혀 다른 분위기도 연출할 수 있는 얼굴. 강호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강적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내는···.
‘뭐 봐줄 만한 얼굴이긴 한데.’
단순히 얼굴로 따지면 여인보다 못하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그녀는 질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다.
사마련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암천회. 그 거대한 세력 내에서 그녀는 공주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살아오며 쌓아온 자부심은 이런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다. 단지 한낱 객잔에서 마주한 여인이 저 정도의 외모라니 의외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이 곡위의 전음으로 인해 조금 흔들린다.
- 사천당문의 당옥정과 단목세가의 단목장룡입니다.
- 뭐?
갈유화가 다시 시선을 돌린다.
저 사내가 단목장룡?
적당히 얼굴 반반한 사내라 생각했는데, 단목장룡이라면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무림오화 중 하나라는 당옥정? 그렇다면 배경 또한 갈유화에게 밀리지 않는다. 암천회가 사천당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흐응···.’
단목장룡은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았다.
특히 여인에게 시선이 조금 더 머물렀는데, 꽤 경지가 높은 당옥정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왜 기분이 나쁘지?’
저렇게 몸매를 훤히 드러낸 여인은 처음 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부끄러움을 모르고···.
“앉자.”
“어? 으응, 가자.”
당옥정과 단목장룡이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동시에 당옥정과 갈유화의 시선이 겹친다.
‘뭘 봐?’
갈유화는 그런 시선을 던졌고.
당옥정은···.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나 버렸다···.’
사실 당옥정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었다. 그녀 스스로는 부인하고 있었지만 만독전에서의 대법이 끝난 날, 단목장룡은 일이 있다며 그녀와 반점에 가지 않았다. 부지부장이기에 밀린 일이 많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귀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단목장룡의 기루 방문!
‘기루···.’
사내들이 기루에 가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당옥정이 겉으로 맹하게 보였지만, 그녀도 사천당문에서 직계 교육을 받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목장룡이 그런 곳에 방문한다는 것에 꽤 큰 충격을 받았었다.
처음엔 자신과의 식사 자리를 파하고 기루에 갔다는 것에 분노했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 왜 분노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종국에는 자신이 단목장룡에게 그걸 따질 입장이 아니라는 걸 자각했고, 지금은 겨우 잊고 있었었다. 그런데 마치 기녀처럼 옷을 입고, 아름다운 갈유화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물론, 기녀라고 해도 저런 의상은 거의 입진 않긴 했지만 당옥정은 기루에 가본 적이 없었다. 상상 속의 기녀들이 저런 옷차림을 했을 뿐이다.
“당옥정,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 아니, 내가 뭘?”
“아니다.”
단목장룡은 처음 시선을 준 뒤로 갈유화와 곡위 쪽으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미 사파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사실 그도 강호 경험이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신교와 사파의 무공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은 풍기는 기세부터가 정파와는 다르다.
그 미묘한 차이를 단목장룡은 느끼고 있었다. 보통의 무림인이라면 감지하기 힘든 그 미묘한 차이를 말이다.
‘당옥정에게 뇌왕에 관해 물어보는 건 객잔을 나가서 해야겠군.’
단목장룡은 굳이 사파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러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문한 요리들이 상에 척척 올라왔고, 확실히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은은하니 좋았다.
단목장룡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리에 앉은 이후 멍하니 있는 당옥정의 그릇에 닭 다리를 올려준다.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가?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그래, 알겠으니까 먹어라. 식겠다.”
“닭 다리···.”
홀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당옥정.
그녀는 조금 단순한 성격이긴 했다. 좋게 말하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포장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여우 짓은 꿈도 못 꾸는 여인이라 할까?
그런 그녀는 닭 다리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래, 기루에 간 게 뭔 상관이야? 나 혼자 무슨 상상을 하는 거람? 휴우, 이래서야 정말 내가 장룡을 좋아하는 것 같잖아?’
조금씩 입꼬리가 올라가는 당옥정.
그 표정의 변화를 정면에서 지켜보는 단목장룡은 기가 찼다. 설마 진짜 닭 다리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가?
‘역시 여인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많은 여인을 만나본 단목장룡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여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참,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나가서 말해줄게.”
“응, 알겠어.”
두 사람은 사사로운 대화를 이어나간다.
단목장룡과 당옥정을 바라보던 갈유화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나긋한 발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당옥정은 왠지 모르게 긴장했고, 단목장룡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머, 안녕하세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찌릿.
당옥정과 갈유와의 시선이 부딪친다.
“네, 이쪽 공자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보란 듯이 고개를 돌리는 갈유화에 당옥정이 헛웃음을 짓는다.
“날 아시오?”
이제야 갈유화에게 시선을 주는 단목장룡이다.
보통 사내들은 갈유화의 압도적인 몸매에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사내가 홀릴 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내는 그런 그녀의 앞에서 저도 모르게 은밀한 부위로 눈동자를 굴리곤 한다.
그런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네?’
씨익.
그것에 더 자극받은 갈유화다.
살짝 허리를 틀어 골반을 더 빼고, 가슴을 앞으로 내민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당옥정이 눈살을 찌푸린다.
“당연히 알죠. 지금 성도에서 단목 공자님을 모르는 이가 있던가요?”
“그래서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이오?”
무례하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은 말투.
단목장룡은 사무적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가 과거에 주색잡기에 빠져 살았던 건 맞지만, 아무 여인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은 얻은 이후에는 그런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었다. 뭐 그도 사내이니만큼 욕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상쇄하는 다른 쾌락이 존재했다.
바로 무공을 익히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단목 공자님의 소문을 듣던 중 흥미로운 걸 들어서 말이에요. 잠시 앉아도 될까요?”
“아뇨! 그냥 서서 말씀하시면 될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으려던 갈유화.
그녀는 당옥정의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랑하는 뇌쇄적인 눈빛을 단목장룡에게 보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우리끼리 할 일이 있어서 말이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소.”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갈유화.
당장이라도 자신의 배경을 밝히고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암천회가 있는 해남도가 아니었다. 또한, 단목장룡을 유혹하여 훗날 그가 번뇌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본래 그녀의 계획이 그것이었으니까.
“죄송해요. 두 분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데··· 연인의 시간을 너무 방해하는 건가요?”
“연인이라니! 아니에요!”
당옥정이 벌떡 일어선다.
하지만 갈유화의 미소가 묘하게 기분이 나빠 더 반박하지 않고, 자리에 앉는다.
“어머, 연인 사이는 아니셨구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핵심만 말해줬으면 좋겠소.”
단목장룡의 말에 갈유화는 웃음을 잃지 않고 말한다.
“진주언가의 여인과 혼인할 뻔했지만, 그때 단목 공자님은 자신보다 약한 여인과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혼사가 깨졌다고 들었답니다.”
“···.”
단목장룡 또한 그때의 일을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선언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다시는 혼사 따위가 들어오지 않도록 깽판을 쳤다고 할 수 있지만···.
‘성도까지 와서 그때의 일을 들을 줄이야.’
슬쩍 당옥정을 바라본다.
그녀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로 단목장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냥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이리 뵙게 되니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숨기기 힘드네요. 그래서 이리 용기를 무릅쓰고 말을 걸어본 거랍니다.”
“···!”
당옥정이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키웠다.
지금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저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릴···.’
황당하긴 단목장룡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갈유화가 기습적으로 단목장룡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 쪽으로 가져가려 한다. 애초에 갈유화는 단목장룡이 손을 빼리라 예측했다. 이 행동의 의도는 신체 접촉에 있었다. 그녀의 살에는 ‘몽환’이 은밀하게 섞여 있기에 그 냄새를 맡으면, 밤에 자신을 생각하게 되리라.
멈칫.
단목장룡의 손이 바위처럼 무거워진다.
‘무슨 힘이···?’
단목장룡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강호에 나와 어떤 일에도 심경이 흔들리지 않았던 갈유화. 꽤 오래전부터 은밀히 거래해왔던 유가상단의 몰락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체 왜?
저 사내의 눈빛에···.
‘이게 무슨···.’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덜컥 겁이 났다.
암천회의 공주라 불리는 갈유화로선 난생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의 눈빛
“뭐 하는 거지?”
어느샌가 단목장룡이 갈유화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갈유화는 손을 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굳어있을 뿐이다. 단목장룡의 눈빛. 평범한 정파인의 눈빛은 아니다. 해남도에서 나와 경험 없는 후기지수를 수도 없이 보았다. 그들 대부분은 사람을 죽여본 경험도 없는 애송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단목장룡.
그는 달랐다.
귀기(鬼氣)가 깃든 눈동자.
‘무슨 눈빛이··?’
마치 갈유화의 아버지인 암천회주가 진심으로 분노했을 때를 보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파르르···.
갈유화가 몸을 떨었다.
단목장룡이 갈유화의 손을 잡아채자,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보던 곡위가 벌떡 일어섰다. 다행스럽게도 그 덕분에 단목장룡의 시선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갈유화가 겨우 입을 뗀다.
“어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가버렸네요. 죄송하지만··· 손을 좀 놓아주실 수 있으신 가요?”
곡위가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한다. 단목장룡 남은 손으로 뇌왕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곡위···. 허튼짓하지 마.”
“···공녀님.”
“가만히 있어. 내가 잘못한 거야.”
곡위는 조금 당황했다.
그의 기준에서 갈유화는 정말 성질이 더러운 여자였다. 그녀가 먼저 잘못을 했더라도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어도 그녀가 사과를 받으면 받았지 사과하는 경우는 없었다. 더군다나 목소리에 전혀 분노가 서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소회주님이 긴장했다고?’
암천회 흑랑대 2조 조장 곡위.
그는 상급자인 소회주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했다. 그게 암천회의 회칙이었다.
그는 검에 손을 뗐다.
단목장룡은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장룡···.”
그리고 옆에서 약간은 소심해진 당옥정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백독이흉의 목숨을 빼앗는 단목장룡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 단목장룡의 눈빛이 그때와 같아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싫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단목장룡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저 여인과 사내의 무공이 상당해. 장룡이 무조건 이길 테지만···! 괜한 일에 휩쓸릴 수도···.’
당연히 단목장룡도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손을 잡혀준 것도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금 지켜본 것뿐이다. 그녀가 대체 뭘 원하는 건지 말이다.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는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여인은 내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손목을 잡혀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갈유화는 처분을 기다린다는 듯이 가만히 눈을 깔고 있을 뿐이다.
‘다신 그 눈빛을 마주하긴 싫어.’
단목장룡이 손에 힘을 푼다. 갈유화는 혀로 말라버린 아랫입술을 살짝 핥고는 아주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싱긋.
약간 어색한 웃음의 갈유화.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단목 공자님.”
“네 이름이 뭐지?”
“전···.”
갈유화가 살짝 고민한다.
이미 단목장룡의 눈에 어려 있던 귀기는 모두 사라진 후였다. 그 급격한 변화에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이 다르게 느껴진다. 더 잘생겨 보인달까.
콩닥콩닥.
갈유화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갈유화라고 해요.”
“갈유화?”
당옥정이 미간을 좁힌다.
“설마?”
“공녀님.”
곡위는 당황했다.
정체를 숨긴 후에 단목장룡을 유혹하고, 훗날 무림오룡이 된 단목장룡을 골탕 먹인다. 분명히 그런 계획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저 소회주가 진짜 이름을 밝혀버린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누군지 알아?”
단목장룡의 질문에 당옥정이 답한다.
“암천회의 소회주야!”
“암천회···.”
당연히 들어본 적이 있다.
정파에 무림맹이 있다면, 사파엔 사마련이 있다. 그 사마련에서 거대한 한 축을 담당하는 암천회. 많은 무공서를 보았지만 그들의 무공서는 본 적이 없었다. 신교가 중원 정벌을 나섰을 때도, 해남도까진 닿지 못했으니까.
명문거파였던 해남파를 모조리 쓸어버리고, 해남도를 차지한 사파의 문파.
바로 암천회였다.
‘역시 배경이 있었군. 그런데 암천회의 여자가 왜 사천까지 온 거지?’
단목장룡의 의문 어린 시선을 이해한다는 듯, 갈유화가 말한다.
“강호을 여행하고 있었답니다.”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정말이에요. 그렇지, 곡위?”
“예, 맞습니다.”
곡위는 당연히 중원을 여행하는 임무를 맡고 사천에 있던 것이 아니었지만, 갈유화는 진짜였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암천회의 지부를 콕콕 쑤시고 다니긴 했지만···.
“믿어주세요.”
정파와 사파는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객잔에서 얼굴을 마주했다고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는다. 현재 무림맹와 사마련 사이에선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물론, 암중으로 두 세력의 알력 싸움은 존재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녀가 암천회 소속이라 하여 사천에 출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암천회가 내 뒷조사를 하는 건가? 내게 접근한 이유가 뭐지?”
“아니에요. 뒷조사라뇨. 전 강호를 여행하며 소문을 들었을 뿐이랍니다. 어떤 분이실까 궁금하던 차에 이리 우연히 단목 공자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제가 공자님이 어찌 이 객잔에 올 것을 알고 미리 대기하고 있었을까요?”
그것도 그랬다.
오늘 청월 객잔에 온 것은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당옥정이 암천회와 모종의 관계라도 있지 않은 이상···.
단목장룡이 고개를 돌려 갈유화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조금의 살기라도 느껴졌다면 네 손목은 오늘 잘렸을 거다.”
“···.”
“살기가 없더라도 다시 그런 방식으로 내게 접근하면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갈유화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자극된다.
“정말 비싸시네요, 단목 공자님은.”
“농담하는 게 아니다.”
“알아요. 진심이라는 거. 죄송했어요. 제가 마음만 앞서서 무례를 범했어요.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결코 없을 거예요.”
“···.”
“만약 제가 다음에 단목 공자님을 만지고 싶을 때가 있으면 먼저 행동하지 않고 직접 말씀드리겠어요. 그리고 혹여나 절 만지고 싶으시다면··· 공자님께선 굳이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전 화끈한 게 좋더라고요.”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옥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정말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만지고 싶다니? 어떻게 장룡에게 그런 생각을!
“어머나, 당 소저께선···.”
“그만. 더 이상 너와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단호한 단목장룡의 말투에 갈유화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라.”
축객령.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갈유화.
평소였다면 지금 그녀의 잔인한 성정이 드러났을 테지만···.
“네, 공자님.”
갈유화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그것을 지켜보던 곡위는 가슴이 답답했다. 굳이 저럴 필요가 있는가? 그녀는 암천회의 얼굴이었다. 고작해야 단목세가 따위에 고개를 숙일 사람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보다는 가만히 있으라는 소회주의 명령이 더 중요했다.
그렇기에 곡위는 침묵했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어요. 다음에 다시 뵐 수 있다면 제대로 대접해드릴게요.”
단목장룡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섭섭한 마음의 갈유화였지만, 여기서 더 농을 내뱉다간 다시 단목장룡의 그 눈빛을 마주하게 될까 봐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객잔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