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구름이 많이 끼어 평소보다 어두운 새벽.
팽염호는 아침 수련을 위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육중한 근육은 타고난 체질도 있었지만, 규칙적인 수련 또한 필수였다. 어제 술을 줄창 마시고도 외공을 단련한 그였으니···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가뿐하다.
사천당문의 손님들이 묵는 접객당엔 연무장이 하나씩 있었다.
팽염호는 수련을 위해 일어나자마자 그곳으로 향한다.
“술을 마셨더니 상쾌하군! 응?”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 의외의 인물이 연무장 중앙에 앉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축 처진 어깨.
“풍아!”
움찔!
뭘 하고 있던 건지 팽염호가 오는 줄도 몰랐던 위지풍이다.
“뭐 하고 있나? 축 처져서는?”
“염호구나.”
“표정이 좋지 않군! 수련하다가 무공이 막히기라도 한 건가?”
피식.
팽염호는 단순했지만, 친우를 위할 줄 아는 착한 사내였다. 뭐 타고난 성격 탓인지 눈치가 없긴 했지만. 아마 천룡각의 다른 후기지수였다면, 위지풍이 왜 이러고 있는지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팽염호가 더 믿음이 간다.
그는 위지풍이 아는 가장 사내다운 무인이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그 누구에게 발설하지 않을 사내.
“고민이 있어.”
“고민? 네가?”
팽염호는 고개를 갸웃한다.
위지풍은 무슨 일이든 척척 해결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대단한 사내라 생각하곤 했었다. 친우이기 전에 존중받을 만한 사내였다.
그렇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이 형님에게 다 털어놔 보아라!”
그는 목숨같은 수련을 잠시 제쳐두고 위지풍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위지풍은 그런 친우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사실 옥정이를 좋아하고 있어.”
“···.”
반응이 없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후.
“응? 뭐라고 했나?”
“당옥정을···.”
“뭐엇!”
팽염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위지풍이 당옥정을? 이십 평생을 곁에서 지켜봤지만,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던 팽염호다. 그리고 어떻게 당옥정에게 연정을 품을 수 있는가? 얼굴이 예쁘장하긴 하지만, 그게 끝이다. 여인으로선 매력이 없다!
팽염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네, 제정신인가?”
“멀쩡해.”
“···.”
팽염호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언제부터?”
“꽤 오래됐지.”
“왜 이제야 밝히는 건가?”
팽염호가 이렇게 작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위지풍. 평소에 이렇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그냥··· 굳이 우리 세 사람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달까? 변명일 뿐이겠지만···.”
맞다.
변명이다.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후우, 사실 풍 자네가 이해가 되진 않지만··· 아니, 이해하네! 사내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지 않은가!”
여인의 마음 아닌가?
그리고 그 말이 이 상황에···.
도리도리.
위지풍이 고개를 젓는다. 팽염호의 말을 모두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뭐가 고민인가! 당옥정에게 고백해! 여인의 마음은 사내가 쟁취하는 거라네!”
팽염호가 단순해 보여도 여인의 경험은 위지풍보다 훨씬 많았다.
뭐 위지풍이 여인을 멀리한 탓도 있지만.
“고백? 그건 좀···.”
아직 그건 이르다고 보았다.
그라고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만약 당옥정이 거절이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답답하군! 그러다 다른 사내가 당옥정을 채가기라도 하면 어쩔 텐가? 그냥 포기할 셈인가? 남자라면! 사내대장부라면! 실패할 것을 알아도 부딪쳐야 할 때가 있다네!”
움찔.
위지풍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위지풍이 보기에 당옥정은···.
“옥정이가 좋아하는 사내가 있는 것 같아.”
“응? 그걸 어찌 아는가?”
“오늘 옥정이가 말했던 단목장룡. 그를 마음에 품고 있는 듯하더군.”
“확실한가?”
“내 추측이야.”
그 말에 팽염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직접 물어보고 오겠네! 여기서 기다리게!”
“자, 잠시만! 그걸 대놓고 물어보면 어떻게 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옥정에게 가려던 팽염호를 잡는다.
“오늘 보니 내 친우 위지풍이 참으로 겁이 많았군!”
“맞아.”
선선히 인정하니 팽염호도 할 말이 없다.
그는 근육으로 가득 찬 머리를 열심히 굴린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는 친구가 확실하게 마음을 정할 방법.
“자네, 당옥정을 정말로 좋아하나?”
위지풍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렇게 하지! 그 사내를 직접 만나보는 걸세!”
“만난다고? 단목장룡을? 직접? 왜?”
“난 남녀의 사랑을 아껴주는 마음이라 생각한다네! 만약 그 사내가 자네보다 더 그릇이 크다면, 옥정을 포기하게.”
“···.”
친우로서 그게 할 말인가?
살짝 짜증이 났던 위지풍. 하지만 팽염호의 눈빛을 보자마자 분노가 사라진다. 팽염호는 그의 방식대로 자신을 응원하는 것이다. 친우인 자신을 믿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정말 옥정이를 위한다면···. 그녀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위지풍이 위지세가의 소가주든, 무림오룡이든 간에 아직은 어린 청년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을 꿈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