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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내는 주루로 향해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무공에 대한 진지한 토론까지. 처음엔 단목장룡을 평가하려던 위지풍은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천룡관 무사부(武師父)의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공 이론이 잘 정립되어 있었다.
또한, 성격도 모나지 않았으며 시종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편견도 없는 듯했다.
여러모로 괜찮은 사내라는 걸 느꼈다.
‘옥정과 잘 어울린다···.’
미소와 함께 술자리가 마무리됐지만, 씁쓸한 감정이 그를 옭아맨다.
뭐가 무림오룡인가? 뭐가 위지세가의 소가주인가?
술기운이 더해져서인지 당옥정에 제대로 된 마음도 표현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고작해야 한 것이 단목장룡이 당옥정에게 어울리는 사내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자괴감에 위지풍은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아직 안 자나?”
근력 훈련을 마치고 온 팽염호.
오늘 두 사람은 사천당문의 접객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객잔에서 묵기로 했다.
“넌 그를 어떻게 봤어···?”
어떤 기대감일까?
위지풍은 가장 친한 친우에게 질문했다.
팽염호는 고민하지 않고 외친다.
“멋진 사내더군!”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
바닥에 웅크려 누워있는 위지풍을 빤히 바라보던 팽염호.
그가 솥뚜껑만 한 손바닥을 휘둘러 위지풍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짜아아악-!
“악! 뭐 하는 거야! 아프잖아!”
“술이 깨는가?”
“지금 무슨···!”
화를 내려던 위지풍.
하지만 팽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도 멋진 사낼세!”
“···.”
그 말에 위지풍이 입이 다물어진다.
“어떤가? 장룡을 보고도 당옥정을 포기할 생각이 들던가?”
세 사람은 나이가 같았기에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위지풍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토록 간사했던가? 분명히 단목세가의 지부로 찾아갈 때만 하더라도, 괜찮은 사내라면 마음을 접기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모르겠어. 그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팽염호는 위지풍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룡은 장룡이고, 자네는 자네야.”
“···.”
“장룡을 보고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그냥 부딪치게!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일세! 내가 더 관여할 문제는 아닌 듯하군!”
팽염호는 말을 마치고 침상으로 가 벌러덩 눕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코 고는 소리가 방을 들썩인다.
위지풍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않고 고민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그렇게 긴 고민의 시간이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그는 확실히 결정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다음 날 위지풍과 팽염호는 객잔을 나서 사천당문으로 돌아갔다.
위지풍은 방바닥에 누워 고민하며 수십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사내대장부답게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할 것인가.
아니면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마음을 접을 것인가.
두 선택 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근본적인 부분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자신이 정말 당옥정을 좋아하는 게 맞는가? 그렇다면 왜 좋아하는가? 그녀에게서 뭘 원하는가? 만약, 아주 만약 그녀가 마음을 받아준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위지풍은 확실하게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그 결정을 존중하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위지풍의 말을 반 시진 동안 경청한 팽염호의 첫 한마디였다.
위지풍은 어린 나이에 위지세가의 소가주가 되었으며, 천룡각에서도 최상위급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날고 긴다는 다른 지역의 후기지수들. 더군다나 천룡각의 평균 나이는 20대 중반. 10대 중반부터 그들과 경쟁하여 살아남았던 위지풍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위지풍은 후기지수일 뿐이었다.
소가주이기도 했지만, 아직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할 권한은 없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위지세가와 사천당문.
분명히 두 가문은 친분이 두텁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혼인을 결정할 수 있을까? 사천당문은 대대로 데릴사위제를 고집했다. 당문의 직계가 다른 곳에 시집을 간다면, 독 제조법 등이 유출될 수 있었다. 보통 무가(武家)에서 여식들에게 가문의 절기를 알려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당옥정은 여인이면서도 대부분의 절기와 독 제조법을 배웠다.
만약 당옥정과 위지풍이 혼인한다면?
사천당문에선 당연히 위지풍이 사천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위지세가도 가주가 될 위지풍이 사천당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사천당문이 오대세가라 해도 정도가 있었다.
소가주로서, 무림오룡으로 불리는 무인으로서.
그는 결정했다.
“이번 용봉지회에서 우승하겠다고?”
그의 포부에 당옥정이 작게 입을 벌린다.
“그러려고 하북성에서 왔거든.”
위지풍이 이곳에 온 것은 당옥정에게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호북성 무당산에서 개최되는 용봉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하북성을 떠난 것이다. 일정을 넉넉하게 짜놓았기에 시간이 남아 사천성에 방문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목장룡이라는 변수가 생겨, 위지풍의 마음속에는 조급함이 생겨났다.
당장 고백하지 않으면 당옥정이 저 멀리 떠날 것 같은 기분에 극단적으로만 생각했다.
포기하느냐, 고백하느냐.
하지만 꼭 지금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만 할까?
현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이라 욕할 사람도 있겠지만, 위지풍의 의지는 단단했다.
위지풍이 여기서 좌절할 것 같았으면 천룡각에서 ‘그’를 보고 무공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제대로 수련도 하지 않고, 천룡각에서 주최하는 비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사내. 재능만으로는 정파에서··· 아니, 전 무림에서 역대급 재능을 가졌다고 칭송받는 남자.
더 먼 거리를 도약하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건, 위지풍에게 익숙했다.
그렇지만···.
“참, 어제 장룡을 만났거든.”
“뭐어? 장룡을 만났어? 너희 둘이?”
“그래! 참으로 멋진 사내더군!”
팽염호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러자 당옥정이 입술을 삐죽인다.
“뭐야? 왜 너희들만 만나고 온 거야? 장룡은 바쁘다고 했었는데···.”
“우리가 멋대로 찾아가서 만났다! 네가 하도 칭찬을 하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더군.”
“미안해. 다음엔 같이 보자. ‘친우’끼리 말이야.”
“···그럼 좋겠네.”
당옥정은 친우끼리라는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이 묘하게 위지풍의 마음을 안심시킨다. 그녀가 그를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확정된 것이 아니다. 단목장룡도 지금의 자신처럼 그녀와는 친우일 뿐이다.
조금 비겁한 행동일 수 있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팽염호는 조금 안도하는 위지풍을 바라보다가 당옥정에게 대뜸 물었다.
“당옥정! 넌 용봉지회에 참가하지 않을 건가?”
“응? 나도 한번은 참가하고 싶긴 한데··· 아직은 아니야. 내년에 참가하려고. 어차피 이번엔 참가 신청도 못했어.”
“내년?”
“응, 요새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있거든. 후후!”
그러고 보니 당옥정의 허리엔 검이 있었다.
“검을 수련하는 건가?”
“맞아. 너희들도 긴장해야 할걸?”
“그거 기대되는군! 그럼 내년엔 화산에서 볼 수 있는 건가?”
“그때 볼 수 있겠네.”
그때쯤이면···.
위지풍은 더 많은 걸 이루었을 것이다. 용봉지회의 우승을 시작으로 가문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간다. 그때가 되면··· 오늘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럼 내년에 보자.”
“벌써 가려고?”
“이제 가야지!”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후 헤어졌다.
떠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옥정···.
“칫, 바쁘다고 했었는데···.”
그녀의 시선은 금방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
단목세가의 성도지부가 있는 쪽이다.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당옥정이 우뚝 멈춘다.
그리고 그녀는 허리춤에 달린 검을 바라본다.
‘아니야.’
당옥정은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단, 당문을 벗어나 모험하는 것을 즐겼다. 낭인에게 구매한 장보도 한 장을 달랑 들고, 성도를 벗어났던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달라졌다.
‘뇌공검법을 열심히 익혀야 해. 고모님을 위해서.’
당옥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열의를 불태웠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암천회의 소회주인 갈유화가 뱉었던 한마디가 떠오른다.
- 약한 여인과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혼사가 깨졌다고 들었답니다.
당옥정이 홱 몸을 돌려 개인 연공실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