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용봉지회라···.”
팽염호와 위지풍과 이야기를 나누며 용봉지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용봉지회는 매년 다른 문파에서 개최되는데, 이번에는 무당파가 주최한다고 한다. 용봉지회는 이름을 알리지 못한 후기기수들에겐 최고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또한, 본선에 진출한 이들에겐 소정의 상금과 상품이 지급된다.
이번 용봉지회의 우승 상품은 한목신검(寒木神劍)이라는 이름을 가진 명검이라 했다. 육왕 중 하나인 검왕(劍王)이 후기지수 시절 사용하던 검이라 그 가치는 상당히 높았다.
당연히 난 그 우승 상품에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뇌왕검이면 충분해.’
뇌왕검을 사용하면서 느끼는데, 나와 잘 맞았다.
중원에는 이보다 더한 명검이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굳이 바꿀 필요는 없을 듯하다. 또 이미 참가 신청이 끝났다고 들었다.
‘내년의 용봉지회는 화산에서 개최된다고 했지.’
지부장에게 물어보니 역대 화산파에서 개최됐던 용봉지회에선 대부분 우승 상품이 영약이라 했었다. 아마 이번에도 영약을 내걸지 않을까? 보통 사람이었다면, 우승 상품을 생각하기보단 그곳에 참가하는 것에 의의를 두겠지만.
나에겐 용봉지회의 우승이 잠시 거쳐야 할 관문에 불과했다.
‘그때쯤이면 슬슬 부지부장직을 내려놓아야겠군.’
언제까지고 부지부장으로 있을 생각은 없었다.
태상가주 또한 자신에게 경험을 쌓게 할 요량으로 이곳에 보낸 것이다. 그도 용봉지회에 참가해 이름을 떨치고 싶다고 하면 자리를 내려놓는 걸 허락해줄 것이다.
사실 지부에 가만히 수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마 이대로 몇 년이 지나면 꽤 높은 경지에 안정적으로 오르리라.
하지만 그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아마 소교주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해졌을 거다. 그리고 자신만의 세력을 착실하게 키워놓았겠지.’
천마신교의 제 1공자였던 사도명.
그는 내가 죽을 시점 소교주에 등극했다. 그는 소교주가 된 이후 천마신공을 익혔기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 강해지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천마.
10년이라는 세월은 절대 짧지 않았다.
재능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보단, 몸으로 부딪치는 게 좋아.’
용봉지회에 참가하면 수많은 정파 후기지수들과 비무를 할 수 있다.
또 그곳에서 우승하면 그 명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단목세가 성도지부의 부지부장이라는 명성으로는 무림의 명숙들에게 비무를 청하면 대부분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용봉지회의 우승자라면?
대우가 다르리라.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 당장 비무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굳이 용봉지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비무 상대는 있지.’
더군다나 오대세가 중 하나.
내가 용봉지회에서 우승하지 않았더라도 반겨주는 곳.
‘당문으로 가야겠군. 팽염호와 위지풍은 아직 있으려나?’
그들과도 한번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 * *
사천당문에 도착했다.
검문 없이 외당의 입구를 통과한다. 청성파와 유가상단의 일로 몇 번 방문했더니 내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다. 사천당문은 외부에서 보면 폐쇄적이지만, 내부에 들어오면 참으로 살가웠다.
하지만 내당부터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사천당문의 직계들이 살고 있으며, 이 안에는 독을 실험하고 제조하는 만독전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공방이 존재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복면을 쓰고 장보도를 찾아 헤매던 당옥정과 만난 게 참으로 운이 좋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천당문에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겠지.
“1공녀님을 만나러 오신 겁니까?”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너무 갑자기 사천당문에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때.
내당으로 들어갔던 무인이 돌아왔다.
“공녀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만독전이나 가주전으로 향하는 게 아니다. 당옥정이 거주하는 전각으로 향하는 것이다. 조금 기분이 묘하다.
그렇게 도착한 전각.
당연히 우리 지부에서 내가 거주하는 전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그곳으로 들어가니 깔끔하게 차려입은 시비들이 날 맞이했다. 손님을 접객하는 방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장룡!”
당옥정이 문을 확 열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수련하고 있었어?”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응! 요새 정말 검법에 푹 빠졌다니까? 나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
“그래? 잘하고 있네.”
“후후후···!”
당옥정이 내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른다.
그러다가 그녀가 묻는다.
“근데 어쩐 일이야? 너 수련하느라 바쁜 거 아니었어?”
“너랑 같이 수련하고 싶어서. 정확히는 비무를 해보고 싶어. 같이 수련하면 좋잖아?”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이새붕과 비무를 했지만,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새붕에겐 큰 배움의 기회였겠지만··· 내가 얻는 건 거의 없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며 배우는 것도 있다지만, 이새붕과 내 실력의 차이는 상당하다.
“비무? 나랑 왜? 무슨 이유로?”
그녀가 다다닥, 말을 뱉는다.
그러다가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설마···?”
“뭔 설마?”
“아, 아니야.”
“부담되면 하지 않아도 돼.”
내 말에 그녀가 황급히 대답한다.
“아니야! 할게! 근데 나, 암기 써도 돼?”
“암기까지? 나한테 정말 이기고 싶나 보네.”
“이, 이기면 좋지 뭐!”
오히려 좋다.
당옥정이 뇌공검법을 익히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리 수준이 높지 못할 거다. 하지만 암기술은 어릴 때부터 익혀왔으니 수준이 상당할 터였다. 강호에선 검만 사용하는 게 아니다.
‘내당주님과도 비무를 하면 더 효과가 좋겠지만··· 나중에 옥정이에게 슬쩍 운을 띄워봐야겠군.’
사실 당옥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어쩌면 당문의 가주와 비무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 그것까진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는 품고 있었다.
“일단 좀 쉬고! 나 수련해서 힘들어!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하지 않겠어?”
“그래, 그럼 난 몸 좀 풀고 있을게. 참, 팽염호와 위지풍은 갔어?”
내 물음에 그녀가 왠지 묘한 시선을 보낸다.
목소리도 좀 낮아진 것 같고.
“어, 갔어. 왜?”
“있으면 그들과도 비무를 해보고 싶어서.”
그 말에 당옥정이 중얼거린다.
“···나로 만족해.”
“응?”
“아, 아냐! 그럼 몸 좀 풀고 있어! 시비가 안내해줄 거야!”
당옥정이 도망치듯 사라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시비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선다.
그러다 문득 입구에 걸린 커다란 동경이 보인다.
그 동경 속에 비친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더 강해질래
‘진지하군.’
이제까지 보아온 당옥정의 모습으로 볼 때, 진지하게 비무에 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몸에 꽉 달라붙는 전형적인 살수의 복장을 하고, 머리엔 두건을 썼다. 허리춤과 허벅지엔 여러 종류의 암기를 장착한 상태. 검을 휘두르다가도 언제든 암기를 출수할 수 있는 복장이었다.
나 또한 마음을 바로잡았다.
대충 비무에 임한다면 그녀에 대한 실례였다.
‘그러고 보니 당옥정이 무공을 펼치는 건 처음 보는군.’
과연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와 있을까?
무림오화.
무림오룡과는 달리 무공 실력보다는 아름다운 외모가 더 부각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절대 무공의 수준이 낮진 않다. 백독이흉에게 납치를 당했던 것도 자고 있을 때 산공독에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당옥정은 대법을 통해 독에 대한 내성을 길렀으며, 뇌왕의 무공을 익히며 더 강해진 상태였다. 사천당문의 직계이니 내공도 부족하지 않을 터.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뇌왕검을 뽑았다.
그러자 당옥정이 결의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간다? 나 정말 제대로 할 거야. 실전처럼.”
“그래.”
내가 대답하자마자 당옥정이 거리를 벌린다.
“···!”
쉬이이잇!
파공음과 함께 거무튀튀한 암기가 스쳐 지나간다. 일부러 내 몸을 노리지 않았다.
그 이후.
슈우우웃!
쉬이이잇!
당옥정이 연발로 암기를 출수한다. 당연히 몸을 떠난 암기에 내력을 담은 수준은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암기는 정확하게 내 급소를 노려왔다.
타앙!
카아앙!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검으로 막아낼 수 있는 건 막아내며 전진한다. 당옥정은 정말 실전처럼 비무에 임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날카로워.’
당옥정이 다시 보인다.
맹한 구석이 보여 귀엽게만 생각했는데, 이런 점을 보면 사천당문의 직계다웠다.
“하앗!”
하지만 계속해서 거리는 줄어들었다.
암기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거리까지 오자, 당옥정이 내게 검을 휘두른다. 뇌왕검법. 극한의 쾌를 추구하는 그 검법은 속도로 상대를 제압한다.
보법을 펼쳐 순식간에 접근한 당옥정.
미약하지만 검 끝에는 뇌기가 맺혀 있었다.
사악!검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당옥정의 경지가 더 높았다면, 흩뿌려지는 뇌기로 내게 피해를 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직 그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빨라.’
나 또한 유성환상검의 초식을 펼쳐낸다.
차아앙! 카아앙!
“윽···!”
그녀는 검으로 내 공격을 막아냈지만, 힘의 차이로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타닷!
당옥정이 내 빈틈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지, 발끝을 세워 내 복부를 노린다. 유연한 공격 방법. 검을 쓴다고 해서 발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
하지만 당옥정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발길질을 피해냈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발바닥에선 길쭉한 침 모양의 암기가 발출되었다.
즈으으으···!
이제까지 내력의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순수한 육신의 힘으론 피해낼 수 없었다. 해우심법의 내공이 순식간에 세맥을 통과해 온몸에 퍼져나간다. 전신의 감각이 개화하는 짜릿한 느낌. 길쭉한 침을 왼손으로 잡아채고, 그것을 바닥에 꽂는다.
침이 꽂힌 곳은 당옥정의 오른발 바로 옆이었다.
“···!”
고개를 드니 당황한 당옥정의 얼굴이 보인다.
사실 실력을 조절하며 비무를 더 끌 수도 있었지만, 대충 상대하는 걸 안다면 진중하게 비무에 임한 당옥정에 실례다. 그런 마음으로 숙였던 허리를 펴는 동시에 뇌왕검을 찔러넣는다.
검이 멈춰선 곳은.
“···딸꾹!”
당옥정의 목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그녀는 검을 놓치 않았다. 언제든 내게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사천당문의 대법을 받고, 청성파의 영약인 소청단을 취한 후로는 급격하게 성장했다. 살이 빠져 육신의 운신이 자유로웠으며, 내공의 모자람도 없었다.
이런 결과는 당연했다.
그렇지만 당옥정은 예상보다 훨씬 잘 해주었다.
이제 막 익히기 시작한 뇌공검법만 활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이 잘 다루는 암기를 사용했으며, 마지막엔 각법과 연계하여 암기를 출수했다. 또한, 검을 휘두를 때 흘러나왔던 미약한 뇌기. 그것만으로 그녀가 가진 재능이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있었다.
“잘했···?”
그런데 당옥정의 표정이 뭔가 묘했다.
오늘 비무에 진심으로 임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승부욕이 강한 여인이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주르륵.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상태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어? 얼마나 분했으면···.’
뭔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조금 봐주면서 할 걸 그랬나? 그랬으면 진지하게 비무에 임하는 당옥정에 실례라는 생각으로 철저히 승리만을 위해 움직였다.
나는 황급히 뇌왕검을 거두었다.
“넌 잘했어. 그러니···.”
도리도리.
당옥정이 고개를 젓는다.
“난 약해···! 너무··· 너무 약해···. 흐끅···!”
그러면서 휙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인다. 우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진 않을 것이다. 굳이 그녀의 앞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패배하더라도 당옥정이라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대체 왜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녀를 너무 가볍게 보았던 걸까?
아무리 평소에 밝아 보여도, 그녀 또한 무림인이다.
난 그것을 간과했다.
어찌하면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상처가 된다. 과거 서녕지부에 있을 때도 기녀들에게 서툰 말로 상처를 준 적이 많았다. 이 순간에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
‘당옥정은 내게 많은 걸 주었지.’
사실 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줬었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나 또한 곤란했을 상황이 많았다.
그녀 덕분에 무림오룡과 연을 맺을 수 있었고, 청성파의 일을 비교적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더 발전할 수 있어.’
비무를 복기한다.
그녀가 펼쳤던 보법과 검법 그리고 날 향해 날아왔던 암기들이 떠오른다.
찰나의 시간.
내 위주가 아닌, 당옥정의 위주의 상황이 상상 속에서 펼쳐진다. 이런 식으로 내 능력을 사용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온갖 무공들의 문제점을 개선하면서도 상상 속에서 그걸 펼치는 주체는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닌 당옥정이다.
‘거리를 벌렸던 판단은 좋았다. 하지만 암기의 위력은 내 움직임을 제약하지 못했어. 뇌공검법은 베는 것보다 찌르는 것이 더 위력이 강해. 그녀가 펼쳤던 보법의 움직임과 연계한다면···.’
번뜩이는 깨달음.
왜인지 기분이 상쾌해진다.
“옥정아.”
움찔.
당옥정의 어깨가 떨림을 멈춘다.
“내가 널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강하게···?”
“그래.”
이제야 그녀가 몸을 돌린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이 보였다.
“왜···?”
“더 강해지고 싶지 않아?”
“넌··· 내가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
“원해. 너는 어때?”
당옥정이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강해질게. 무조건 강해질 거야. 정말 열심히 할 거야!”
좋다.
당옥정이라면 내 능력을 사용해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또한, 조금 전의 상상으로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주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상상을 펼쳐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경험이 내게 녹아들었다. 어쩌면 더 높은 경지로 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좋아. 그 대신, 누구에게도 나와 어떤 방식으로 수련하는지 절대 발설하면 안 돼. 내가 뇌공검법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약조해줄 수 있어?”
그 말에 결국 당옥정은 미소지었다.
울다가 웃는 그녀였지만, 그 모습이 전혀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응···! 약조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