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236)

팽염호는 온갖 인상을 다 써가며 버티고 있었으며, 언철진은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위태로워 보인다. 더 마시다간 위험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자존심이 강해서 적당히 끊어주지 않으면 몸이 상할 때까지 마실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시죠.”

“뭐어···? 그마안?”

언철진이 발끈하며 일어선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소···!”

“끝을 보면 위험할 텐데요. 많이 취하셨습니다.”

“전혀! 전혀 취하지 않았소! 난 이렇게 멀쩡··· 어엇···!”

쿠당탕탕!

언철진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상 위로 넘어진다. 육중한 몸을 가지고 있다 보니 상이 부서질 듯이 흔들린다. 양주아와 모용란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선다.

“크으윽···!”

만취한 상태임에도 부끄러움은 느낄 수 있었다.

언철진의 몸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취하신 것 같군요. 그만···.”

그때 언철진의 몸에서 술 냄새가 폭발하듯 퍼져나간다.

모두 그 냄새에 인상을 찌푸린다.

장원의 규칙이 뭐니 떠들었던 언철진이지만,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술기운을 몰아낸다. 이대로 끝내면 그가 쌓아온 체면이 모두 무너진다.

“크, 크으으음!”

“언 소협, 지금 술기운을···?”

손님으로 온 무인 중 하나가 의문을 표한다.

“술에 취해 추태를 보일 순 없잖소! 내가 이 장원의 주인이거늘!”

언철진의 머릿속엔 조금 전의 추태가 떠나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더욱 큰 소리를 내야 했다. 언철진의 고함에 의문을 표한 사내가 찔끔하며 물러난다.

“이건 단목 소협이 이겼소! 내 인정하지! 정말 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마시는구려! 내 정말 감탄했소! 인정하리다!”

그 모습에 모용란이 작게 혀를 찬다.

그녀는 언철진이 단목장룡을 어찌 여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단목장룡에 관하여 물었을 때, 그는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기루에 미쳐 있었다느니, 철부지 같은 생각으로 혼사를 깨버렸다느니 말이다.

‘정말 추하네. 작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모용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철진이 단목장룡에게 외친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긴 섭섭하지 않겠소?”

“뭘 하시려는 겁니까?”

“비무로 결판을 내는 것이오!”

비무?

뜬금없는 제안에 단목장룡이 고개를 갸웃한다.

“모두 어떻소? 단목 소협과 나 언철진의 비무를 보고 싶지 않소?”

당연히 다른 이들의 입장에선 비무를 관전할 수 있다면 좋았다. 소문의 단목장룡이 얼마나 강한지 코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옥정이 발끈하고 나선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술을 먹다가 갑자기 비무라뇨! 장룡은 이제 본선을 준비해야 하는데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저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아아!”

팽염호는 술 기운을 몰아내지 않은 채로 인상을 팍팍 써가며 말했다.

그 뒤로 모용란과 양주아가 반대하자, 슬슬 여론이 바뀌려 한다. 솔직히 이 상황에 비무를 한다는 게 참으로 웃기긴 하다.

“하시죠, 비무.”

언철진이 미소짓는다. 당사자가 수락했는데 삼자가 뭐라 할 수는 없다.

“좋아! 단목 소협의 용기에 내 감탄했소!”

언철진은 자신이 단목장룡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와 정치력으론 다른 이들에게 밀릴지는 모르겠으나 무력으로는 재능이 상당했다. 언가의 절기를 모두 이어받아 그의 육신은 돌덩이와 같았다. 팽염호가 없었다면 이미 그가 무림오룡의 한 자리를 차지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내가 패배하면 단목 소협께 이 장원의 권리를 모두 양도하리다! 어떻소? 이 정도면 비무할 가치가 있지 않소?”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렇기에 언철진은 회심의 수를 던졌다. 평소 생각이 짧은 언철진이 생각해낸 것 치고는 좋은 수라 할 수 있었다.

“중앙 전각 내부엔 지하 연무장도 마련되어 있소! 수련광인 단목 소협이니 내 제안이 마음에 들 것이오!”

“괜찮군요. 좋습니다.”

단목장룡은 번복하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 대답에 언철진이 미소짓는다.

“좋소! 내가 승리하더라도 단목 소협껜 아무것도 받지 않겠소!”

그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아량이 넓다고, 배포가 크다고 으스대는 듯했다. 극소수는 언철진의 의도대로 생각했지만, 대부분 사실 언철진이 조금 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의복엔 아까 넘어졌을 때 묻은 음식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잔치를 벌이던 옆에는 공터가 있다.

그곳에 모두 모여 단목장룡과 언철진을 바라본다. 누가 이길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무리 단목장룡이 예선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고 해도, 언철진은 천룡각에서 높은 성적을 내던 무인이다. 더군다나 진주언가의 장남이 아닌가?

“옥정아, 넌 누가 이길 것 같아?”

모용란의 물음에 당옥정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장룡이 이겨요.”

“정말 단목 공자님을 믿는구나.”

“네, 믿어요.”

“···.”

전혀 흔들리지 않는 당옥정.

순간 모용란은 씁쓸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실 그녀는 그 정도로 단목장룡을 믿고 있지 않았다. 이미 당옥정은 저 멀리 나아가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모용란은 그녀에게 더 말을 걸지 않은 채로 단목장룡과 언철진에게 시선을 돌린다.

단목장룡은 언철진을 주먹으로 상대해보고 싶었지만, 그가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검을 든다.

그래도 이번엔 적당히 상대해주려 했다.

이미 승리는 확정되어 있었다. 굳이 그를 놀림감으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비무.

언철진이 땅을 쿵쿵 울리며 달려든다.

육중한 근육으로 무장한 언철진이 자세를 낮추며 빠르게 돌진하는 것은 제법 매서웠다.

수우웅!어찌나 강하게 주먹을 휘둘렀는지 바람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언철진의 움직임에 모두가 탄성을 내지른다.

“역시 언 소협의 움직임이 정말 대호와 같군···!”

언가권.

언가의 대표적인 권법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파공성만 들어도 그 위력을 짐작하게 한다. 제대로 맞는다면 뼈가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손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권기까지···! 정말 언 소협이 제대로 하실 작정이군!”

“단목 소협은 피하기에 급급해. 역시 언 소협이 더···.”

여러 의견이 난무했지만, 단목장룡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언가의 제대로 된 권법을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언승지는 여인이었으니 언가의 절기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언철진은 언가의 장남이었다.

부우우웅!

쿠우웅!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라 주먹을 내려찍는다.

제대로 맞으면 머리통이 부서질 위력. 뭐 땅이 갈라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언철진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은 듯이 바로 튀어올라 단목장룡을 압박한다.

‘크하하하! 어떠냐! 어때! 예선에서 조무래기들만 만나다 보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지? 이노옴! 내가 하늘이다!’

오만한 생각을 하며 언철진이 단목장룡을 계속 압박해나간다.

그렇게 언철진이 얼마나 맹공을 퍼부었을까? 그의 의복이 땀으로 젖어가고 있을 때쯤.

단목장룡이 반격을 시작한다.

‘언가의 주먹은 단단하다. 권기를 두른다면 예리한 검과도 부딪칠 수 있다. 하지만 권법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사정거리가 짧다는 것.

언철진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지만, 그것보다 더 빠르게 단목장룡이 뒤로 물러선다.

동시에 단목장룡의 검을 밀어 넣는다.

“헙···!”

언철진은 쇄도해오는 검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단목장룡이 그걸 놓치지 않는다. 마치 뱀처럼 움직이는 검이 표독스러운 눈을 하며 언철진의 움직임을 쫓았다.

‘피할 수 없다···!’

언철진은 순간적으로 판단하여 주먹을 내질렀다.

검 끝에 주먹을 내지르는 것은 미친 짓이었지만, 그의 주먹엔 권기가 맺혀 있었다. 저걸 압도적인 힘으로 쳐내고···.

쿵!

어깨까지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 만약 단목장룡이 검기라도 사용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갈!”

언철진이 고통을 잊어보려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돌격하려 한다. 단목장룡도 방금의 충격으로 분명히 멈칫하고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언철진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샌가 단목장룡의 검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언철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언철진의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언제 움직인 거지? 분명히 검이 튕겨 나가는 것을 내가 느꼈거늘···!’

언철진의 주먹에 담긴 힘은 컸다. 분명히 검을 쥔 손에 충격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듯이 검을 움직였단 말인가? 자신의 힘을 흘려냈다고? 그게 가능한가?

“이제···.”

단목장룡은 비무를 끝내려 했다.

목에 검을 겨눈 상태이니 언철진이 포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철진이 고함을 지르며 주먹으로 검의 옆면을 주먹으로 때려버린다. 이제 단목장룡의 상체가 열릴 것이다. 강인한 주먹으로 복부를 한 번만 가격하면 단목장룡을 먹은 것을 게워내며 쓰러질 것이다.

까아앙!

주먹으로 검을 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

언철진은 바로 단목장룡에게 돌진하려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무슨···?”

주먹으로 검면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단목장룡의 검이 미동도 없이 언철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검의 중심축은 손잡이에 있다. 그리고 언철진은 온 힘을 담아 검면을 주먹으로 쳐냈다. 그렇다면 손목이 흔들리거나 꺾이는 게 정상이다. 아니, 보통의 무림인이라면 검을 놓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단목장룡의 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였다. 언철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단목장룡의 근력이.

‘나 언철진보다 더 강하다고? 그것도 압도적으로···?’

시작된 용봉지회

‘난 대체 이때까지 무얼 했단 말인가?’

언철진이 이런 생각을 한 계기는 다름 아닌 단목장룡이다.

현재의 그를 보면서 과거의 단목장룡을 생각했다. 언철진의 눈에는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해 살이 뒤룩뒤룩 쪄 있었고, 철부지 같은 행동으로 혼사를 깼던 단목장룡. 그가 주목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러지 않으려 했다는 게 정확할까?

그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목장룡이 장원에 온 뒤로 무림오화 중 세 명이 장원에 방문했다. 무림오룡 중 하나인 팽염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두가 단목장룡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했다.

망나니였던 본성을 숨기고, 모든 이들은 속고 있다.

진실을 아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진실이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지독한 현실이 언철진을 지배했다. 술자리에서 추태를 보인 부끄러움? 그것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감의 원천이던 무공에서 단목장룡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이다.

예선에서 들리던 소문이 사실이었다.

단목장룡은 강하다.

1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언승지와 비무하고 숨이 차서 죽으려고 했던 그는 지금의 단목장룡이 아니다. 그는 1년 만에 바뀌어 있었다.

‘난 뭐지?’

그는 용봉지회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단목청야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신도 충분히 무림오룡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패배했다.

그것이 언철진의 남아있던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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