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허허.”
32강에서 탈락했지만, 무연하는 화산파의 대제자였다. 한 번 패배했다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화산파의 장문인 군명은 그가 이번 용봉지회를 관전하며 많은 것을 배우길 바랐다. 하지만 오히려 비무를 보며 배운 것은 환왕 그 자신이었다.
‘후기지수들의 비무라고 하기엔 수준이 높구나. 특히 단목가의 아이는···.’
장문인이 된 이후엔 무공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 쓸 때가 많았다.
수많은 제자를 관리하고, 다른 문파와의 관계를 신경 써야 한다. 그런데 오늘 비무를 보고 왠지 열정이 가득했던 후기지수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무공 하나만 있으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단목장룡이라···.’
그 또한 나이가 들며, 세월이 지나며 자신처럼 세속에 물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단목장룡은 이 틀에 박힌 무림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군.’
군명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화산의 대제자인 무연하를 이긴 단목장룡이 우승했다. 그걸로 화산의 명예는 어느 정도 지켜졌다. 하지만 지금 군명이 미소짓는 이유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 * *
“장룡! 정말 고생했어!”
비무장에서 내려오자 당옥정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순수한 축하에 짜릿했던 승리의 도취감이 따스함으로 바뀐다.
“고마워.”
당옥정이 다가와 내 온몸을 훑는다.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왠지 날카로웠다.
“왜?”
“다친 곳은 없지? 남궁 소협은 내상을 크게 입은 것 같던데···.”
뒤를 돌아보니 기절한 남궁일몽을 업고 달려가는 화산파의 장로가 보인다. 남궁일몽이라면 아마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몸을 회복할 것이다. 오히려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 것이다. 그걸 이겨내는 것은 순전히 그의 몫이겠지만.
“조금 피곤한 것 빼곤 괜찮아.”
“정말이지? 아픈 곳은 없지?”
“아프면 치료해주게?”
“응! 물론이지. 나 의술도 배웠어!”
“그럼 나중에 아프면 널 찾아갈게.”
내 말에 당옥정의 얼굴이 멍해진다.
“알겠어! 더 열심히 의술을 익힐게.”
“일단 가자. 쉬고 싶네.”
당옥정이 날 지키듯 앞장선다. 보통 무림에선 사내가 여인을 지키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녀가 날 지켜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지.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모용란이나 양주아 그리고 장원에 머무르는 손님들이 다가왔지만, 당옥정의 선에서 알아서 정리됐다.
모두 아쉬워했지만, 비무를 끝내서 피곤하다는 말이면 모두 물러났다.
나는 당옥정 덕분에 편하게 장원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고마워,”
“후후, 이 정도로 뭘.”
“이제 수련할 거야?”
“응, 그래야지···!”
당옥정의 눈망울에 투지가 불타오른다.
그녀 또한 결승에 진출한 상태. 결승 상대는 모용세가의 모용란이다. 사실 이제까지 비무를 보며 느낀 건데 지금 둘의 실력은 거의 엇비슷해 보였다. 뇌왕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아마도 별 무리 없이 모용란이 우승했을 테지만···.
‘이건 나도 예상할 수 없군.’
그래도 모용란보단 당옥정이 우승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금 쉬다가 무공을 봐줄게.”
“정말?”
“그래, 특훈이니까 단단히 각오해.”
“응응. 정말 열심히 할게. 꼭 나도 우승할 거야!”
당옥정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비무장으로 떠나간다. 가볍게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한 사내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광풍개였다.
“아주 깨가 쏟아지는구나?”
“광풍개 대협.”
“대협은 무슨. 그냥 조장님이라 불러라.”
그는 흑룡단의 2조 조장이라 했었다.
“예, 조장님.”
난 흑룡단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흑룡단의 근본적인 존재의의는 천마신교와 사마련의 견제. 사실 현 무림은 거대한 세 세력의 균형으로 유례없는 평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언젠간 신교와 결판을 내야 한다.
‘따로 알아보니 이제는 흑룡단의 세가 많이 약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편이 내게 좋다.’
구파일방이 주축으로 있는 적룡단이나 오대세가가 주축인 청룡단에 들어가면 아마 내 목표를 향해 나아가긴커녕 온갖 정치적인 일로 진을 다 빼놓을 게 분명했다. 상대적으로 흑룡단이 현재의 내게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었다.
‘직접 가보지 않곤 확실히 어떤 분위기는 알 수 없겠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네 형과는 이야기를 모두 끝냈느냐?”
“예, 흑룡단에 들어갈 수 있을 듯합니다.”
“좋군, 좋아! 화끈해서 좋구나!”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어간다.
“그럼 맹에서 다시 이야기하자.”
“같이 가시는 것 아닙니까?”
의외였다.
같이 무림맹으로 가자고 할 줄 알았었다.
“보아하니 당가의 아이와 분위기가 좋은 듯한데, 나처럼 흉흉한 아저씨가 곁에 있으면 되겠느냐? 용봉지회가 끝나면 적당히 즐기다 오거라. 요즘 것들은 약조를 하찮게 여겨 보통은 내가 데려가곤 하는데··· 너는 믿을 수 있겠다. 용봉지회를 우승하겠다는 말도 지키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해?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인데.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지쳐 보이는구나.”
광풍개는 내 상태가 어떤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유성일락을 펼쳐 내력을 많이 소진했다. 남궁일몽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마 그가 천재성을 과신하지 않고 열심히 수련한 상태였다면, 오늘 결승에선 내가 패배했을 수도 있을 정도로.
“예, 조장님. 그럼 무림맹에서 뵙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광풍개가 설렁설렁 떠나간다.
잠시 대화한 것뿐이었지만, 광풍개를 보니 흑룡단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인 듯했다. 물론 하나를 보고 전체를 판단할 수 없긴 하겠지만.
‘용봉지회가 끝나면 생각하자.’
내가 우승했으니 다음은 당옥정이다.
난 꼭 그녀가 우승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