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236)

* * *

“소회주님, 그냥 보내도 되겠습니까? 제대로 암천회의 위엄을 보여야···.”

“암천회의 위엄은 이런 일 하나로 떨어지지 않아.”

갈유화의 차가운 대답에 사내가 흠칫 떤다.

그녀는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종잡을 수 없는 미친년이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다가도 갑자기 차가운 눈빛으로 칼을 휘두른다. 저 음란한 옷차림과 미소를 보고 있자면, 그녀를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암천회의 무인들은, 아니 해남도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은 감히 그런 생각을 품지 못한다.

저 속에 얼마나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갈유화는 왠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녀의 뒤로 흑랑대의 대주 곡위가 나타난다.

곡위는 그런 갈유화에게 크게 겁먹지 않은 인물 중 하나였다.

아니, 겁을 먹지 않았다기보단···.

언제든 갈유화가 심장에 칼을 쑤셔 넣어도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이랄까. 그는 암천회에서 키워진 복종하는 사냥개였다.

“소회주님, 왜 그러십니까?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무언가 이상해. 너도 봤지? 장천이라는 사람. 분명히 목소리가 낯이 익었어. 난 한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않아.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잖아.”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은 어디든지 있습니다. 흑랑대의 소상원과 정항만 하더라도 목소리가···.”

“내가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 같아?”

“죄송합니다.”

곡위가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그 모습을 보던 갈유화가 한숨을 내쉰다. 사천성의 성도때부터 곡위는 갈유화가 가장 신뢰하는 수하가 되었다. 하지만 가끔 저런 눈치 없는 소리를 하면 답답해지곤 한다.

“중요한 건 목소리가 아니야. 눈빛이지.”

“눈빛이요?”

갈유화의 말을 듣고 있던 암천회의 무인들이 서로의 눈을 살핀다. 별다른 것은 없다. 몇몇 이들은 눈매가 쭉 찢어져 매섭게 보이기도 했다.

“눈동자. 인간의 눈동자엔 소우주(小宇宙)가 들어있다고 하지.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깊숙한 심연에 빨려 들어가. 남녀끼리 사랑에 빠지는 이유도 서로의 소우주를 엿보았기 때문이야.”

대부분 갈유화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난 동경으로 내 눈동자를 많이 보았어. 내 소우주를 탐할 사람은 나찰마궁의 그 변태도 아니고 혈세귀막에 무뚝뚝이도 아니었지.”

“그 사람은···.”

“맞아. 그분이지.”

“···.”

곡위는 조금 답답했다.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하고 계시는가? 암천회의 정보력은 중원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들이 미혼약을 공급하는 곳에는 그들의 정보가 닿아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무림맹에 있는 하남성도 마찬가지.

처음에 갈유화가 그를 생각하는 것을 한순간의 치기로 생각했다.

그녀가 문란하게 생활한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정말 누군가와 연인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정파와 사파라는 신분의 차이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곡위는 그런 인간의 감정을 이해한다.

중원에서부터 그 인간의 감정을 활용하여 사업을 확장했으니까.

하지만 갈유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이 흩어지기는커녕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당연히 이 내용은 곡위만 알고 있었다. 암천회주가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 장천이라는 사내와 관련이 있습니까?”

“모르겠어. 얼굴도 다르고, 성도에서 보았던 눈빛과도 다르지만··· 뭔가 비슷했어. 그것과···.”

갈유화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홍조가 일어난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뜨거워지자 그녀의 피부에 잔뜩 묻어있는 미혼약의 향이 퍼져나간다. 암천회의 무인들은 그것에 내성이 있지만, 갈유화가 뿌리는 향은 차원이 다르다.

“모두 돌아가라.”

“존명!”

곡위의 명에 이제는 갈유화와 곡위만 남았다.

“소회주님, 탕백환희소(蕩魄歡喜笑)의 기운이 더 강해지셨습니다. 운기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그 향을 내뿜는 게 이리 불편한 점이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는 암천회의 무공. 특히 쾌락과 환락을 추구하는 그들의 무공은, 현재 이런 갈유화의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얼른 이번 암천제를 마치고 그분을 찾아가 봐야겠어. 우승 상품을 잔뜩 선물하면 아마 좋아하시겠지?”

“일단 숙소로 돌아가시지요.”

갈유화는 그 사람의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부터가 바뀐다.

곡위는 그 부분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만큼 소회주님의 실력이 상승하는 거니까.’

소회주의 성장은 곧 암천회의 성장이다.

곡위는 암천회에 복종하는 사냥개. 주인이 강해지는 것엔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장천이라는 못난 사람에게 흔들렸군요. 저도 아직 수행이 부족한가 봐요. 만약 다시 만날 때도 이런 감정이 생기면··· 그를 기필코 죽이겠어요. 갈유화의 이름을 걸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갈유화는 몰랐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지독한 귀기가 서린 절대자의 눈빛을 가진 사내가.

방금 마주쳤던 사내라는 것을.

모임

해남도는 하루하루 큰 잔칫날이 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창밖에서 보이는 많은 사람이 그 분위기에 취한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다.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 용봉지회가 벌어지던 화음현과 비교해도 과했다. 물론 내가 이 장소에서 적응하지 못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었지만···.

‘암천회가 이곳을 이렇게까지 만든 이유가 뭘까?’

환락과 쾌락.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

분명한 것은 이런 분위기가 정상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해남도 어딘가엔 이 과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어두운 면이 존재하리라. 암천제가 아니더라도 해남도는 이런 분위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어쩌면 암천회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주공.”

설비연이다.

그녀는 경산현까지 나아가 탐색을 하고 왔다. 암천회가 벌어지는 동안 암천제의 참가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다. 물론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지만 암천회의 정보력은 이곳저곳 퍼져 있어 운신의 폭이 제한되어 있다. 지금도 은소 객잔 주위로 감시의 시선이 여럿 느껴진다.

하지만 참가자가 아닌 설비연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들어 와.”

설비연이 자신이 보고 느꼈던 것을 보고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경산현은 해구현과 조금 달랐어요. 해구현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약에 취한 것처럼 웃고 있다면··· 경산현에선 억지로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해도 중원의 다른 현과 비교하면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요.”

“여유가 된다면 반대편 현으로 가보고 싶군. 암천회는 결코 정의로운 이들이 아니야.”

“네, 그들도 아마··· 나찰마궁과 똑같겠죠.”

“아마도.”

그들이 사파라서 이런 의심을 하는 게 아니다.

정파인들도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지만, 뒤에선 썩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암천회의 무공을 한번 보고 싶군. 제대로 된 것을 말이야.’

무림인의 행동 원리는 사실 간단하다.

뭐 조금씩 다른 게 있겠지만, 결국 더 강해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가령 소림사는 강해지기 위해 인간의 욕망을 극도로 억제하고 수행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사파에선 그 욕망을 전혀 숨기지 않고, 오히려 활용한다.

나찰마궁은 성욕으로.

혈세귀막은 혈기로.

그리고 암천회는···.

‘으음···.’

신교에서도 암천회의 무공을 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암천회는 세 문파 중 가장 역사가 짧은 문파이며, 신교의 중원 정벌에도 해남도까지 닿은 적이 없었다. 결국, 맞붙어본 적이 없으니 무공서를 강탈당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암천회에선 수라마검을 상품으로 제공한단다.

“그건?”

내 물음에 설비연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사실 해구현에서 얼굴을 가리는 사람은 꽤 많아 의심되긴 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마교도라 확신할 수는 없었어요.”

설비연은 마교도로 의심되는 이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수라마검이 진짜라면 분명히 이곳에 마교도가 있으리라는 추측 때문이다.

“쉽게 찾아낼 순 없을 거야. 무언가 계기가 있어야 모습을 드러내겠지.”

“네, 아마 그렇겠죠. 그런데 주공?”

“왜?”

“왜 검을 쥐고 계시나요? 그리고 그건 피 냄새···.”

“아, 습격하려는 놈들이 있더라고. 암습하면 되는 줄 알았나 보더군.”

은근히 있었다. 소문을 믿지 않는 이들. 분명히 해남도에 장천이라는 이름은 퍽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그 때문에 접근하지 않는 자들도 있지만, 그걸 기회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어떨 때 내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타려고 했던 적도 있지만, 은소 객잔은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미리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사천당문의 대법을 통해 독에 내성이 생겼기에 큰 상관이 없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틈에···.”

“죄송할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던 중에 설비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최근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다. 설비연의 입에선 자연스레 주공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사실 다른 임무로 나가 있던 그녀가 지금 사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가요?”

“그냥. 너도 많이 착해졌구나 싶어서.”

“···.”

설비연의 눈썹이 꿈틀한다.

화가 났다기보단···.

당황이었다.

“아무튼, 암천회의 본선이 시작되면 이제까지보다 더한 위협이 생겨날 거다. 방 내부에 진법을 만들어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했다지만, 다른 이들은 이곳에 세력을 대동했어. 그 점을 잊지 마.”

“네, 알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강철패를 10개보다 더 많이 모은다고 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나찰마궁이나 암천회 그리고 몇몇의 대마두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딱 10개만 모았다. 본선이 시작되기도 전에 더 주목받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시 창밖을 내다보며 아래를 관찰한다.

굳이 은소객잔은 6층 높이의 건물이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까지 보인다.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을 때.

‘갈유화군.’

그녀의 옆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사천성 성도에서 보았던 사내. 표정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아서 이질감이 느껴졌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피부에 닿는 기묘한 감각.

‘이 기운은···.’

쩌릿.

갈유화의 앞에는 기다란 흉터가 새겨진 사내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기척을 감추었다. 사실 이 거리에서 시선을 알아챌 고수는 그리 흔치 않았지만, 저 사내라면 분명히 알아챌 것 같았다.

‘이 거리에도 피 냄새가 진동하는군.’

나는 그가 단번에 혈세귀막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문의 그 총대주인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