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난 설비연에게 이제까지 얻어온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가 객잔에 발을 붙이고 있는 날이 줄어들자 무언가 있다고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마교가···.”
“그래, 그들은 이미 중원에 나와 있다. 십만대산에 박혀 있는 게 아니야.”
물론, 실질적으로 그들이 중원인들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단지 수라마검을 암천회의 상품으로 제공했을 뿐이고, 칠교공자는 귀문의 실험체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예상할 수 있는 점은.
“마교는 확실히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 암천회도 그것과 관련이 있어.”
설비연의 눈빛이 증오로 가득 찼다.
그녀는 나만큼이나 신교에 복수를 꾸미고 있었다.
“암천회는 마교와 결탁한 걸까요?”
“그건 확실하지 않다. 곧 알게 되겠지.”
설비연이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그걸 어떻게 알아내죠?”
“조만간 정보를 가진 사람이 날··· 벌써 왔군.”
“단목 공자님, 저예요. 갈유화.”
바깥에서 갈유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빨리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상당히 급했던 모양이다.
“설비연, 잠시 네 방으로 가있어라. 그녀와 이야기해야겠어.”
“위험하지 않을까요? 만약 암천회가 정말 마교와 결탁하고 있다면, 이 객잔을 습격할 수도 있을 거예요.”
설비연의 걱정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옥 팔찌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보수에 공을 들였다. 지금도 방 내부에는 인위적인 자연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진법이 있으니 괜찮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계획했던 대로 행동하면 된다.”
“예, 그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설비연이 방문을 연다.
그 앞에는 갈유화가 서 있었다. 두 여인이 잠시 눈을 마주쳤지만,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다. 설비연은 방을 나섰고, 갈유화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저기, 공자님···.”
“앉아.”
갈유화가 설비연이 앉아 있던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녀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동자였다. 사실 이제는 슬슬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연기가 아니라는 걸. 난 그녀에게 많은 것을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만약 신교와 결탁했다면··· 이미 난 공격받고도 남았으리라.
사실 갈유화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말해줬던 것은 의도한 것이다.
상대의 반응으로 정보를 얻어내는 방법도 있었다.
“죄송해요. 단목 공자님과의 신뢰를 회복하고 싶어요. 제가 아는 거라면, 공자님께서 궁금해하시는 거라면 뭐든 알려드릴게요.”
“일단 묻고 싶군. 내가 처음 칠교공자와 맞붙겠다고 했을 때, 넌 그가 강하다고 했다.”
“네.”
“그가 마교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맞아요. 전 알고 있었죠.”
“암천회는···.”
“마교와 결탁하지 않았어요.”
“···.”
갈유화의 대답이 빨랐다.
너무 단호해서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랍니다. 암천제는 사파인은 물론이고 정파인들까지 참가할 수 있는 대회에요. 물론, 정파인들이 참가하면 견제를 받긴 하겠지만··· 참가에 제한을 두진 않아요. 그건 마교도 마찬가지랍니다.”
암천제는 그 누구도 참가할 수 있다.
그것이 첫 번째 규칙이다.
“그렇다면 수라마검은···.”
갈유화가 잠시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것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칠교공자의 말과 비교해도 딱히 모순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암천회가 수라마검을 얻게 된 경위.
그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신교에서 사람이 찾아와 화합의 의미로 그것을 선물했다고 한다. 하지만 암천회주는 선물만 받고 마교의 사절을 내쫓았다고 한다.
“마교와 연을 맺으면 좋지 않나? 왜 내쫓은 거지?”
“아버지는 마교를 싫어하시거든요. 선물로 받은 수라마검을 떡하니 암천제의 상품으로 내걸 정도였으니까요.”
그랬던 건가.
슬슬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마교는 왜 암천회와 손을 잡으려 했던 거지? 수라마검이라는 무공서까지 줘가면서?”
“확신할 순 없어요. 단지 제 기억에 남는 것은··· 사절로 왔던 자들은 아버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게 기억이 남아요. 사실 그런 사람은 정말 흔하지 않거든요. 어쩌면 그들은 아버지가 쫓아낼 것을 예상하고···.”
그때.
난 바로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갈유화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공자님···?”
하지만 그녀는 탕백환희소를 사용하지 않았다. 큼지막한 두 눈을 뜨고 날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내 검이 노리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뭐지? 이 감각···.’
기묘한 기의 비틀림. 옥 팔찌가 놓여 있는 쪽을 바라본다. 그곳에선 쉴 새 없이 인위적으로 자연의 기를 순환시키고 있다. 기의 순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난 단번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묘한 느낌만 들 뿐이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데,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내가 단목장룡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이후, 이런 감각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끼르르륵···!
기괴한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린다. 아니, 먼 곳에서 들린 소리가 맞나? 그런데 왜 이리 크게 들린단 말인가? 감각의 혼돈? 난 바로 검을 들어 방어했다. 아득히 먼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없어?’
그런데 검에는 아무것도 부딪쳐오지 않았다.
분명히 강렬한 일격이 닥쳐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순간, 갈유화의 몸에서 거대한 음기가 소용돌이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옥 팔찌의 기운에 막혀 제대로 기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흐윽···!”
난 갈유화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외친다.
“아버지, 그만하세요!”
끼르르륵···!
끼르르륵···!
까아아악-!
사방에서 무언가가 갈라지는 아니, 까마귀의 울음과 같은 것이 들린다. 환상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난 그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저 소리가 무엇인지 판단한다. 흑룡단주는 눈을 잃고 다른 감각을 일깨웠다고 한다.
그것을 나 또한 따라할 수 있었다.
‘이게 암천회의 무공이군. 뭔가 기묘해.’
갈유화의 외침은 들었다. 그녀의 아버니는 하나밖에 없었다. 암천회주. 정파에 육왕이 있다면, 사파에는 오성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사파에서도 두 손가락에 꼽는 고수. 그가 이곳에 와있었다.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난 흥분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공격하려면 이미 시작했을 것이다. 계속 저 끔찍한 소리로 장난질을 하는 것은···.
‘내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화경에 이른 자들의 싸움.
초절정과 화경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 경지가 얼마나 강한지. 혈우검마가 극마에 도달했다는 걸 알고, 난 싸움을 포기했다. 당시의 사공천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천장인가? 아니면 이미 방 안에 들어와 있는데 내가 알아차리 못하는 건가? 아니다.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왔다면 옥 팔찌가 반응했어야 한다.’
하지만 옥 팔찌는 갈유화가 내력을 끌어올리자 반응했다.
그때까진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데···.
‘지금!’
단전에서 한 번의 천둥소리가 울린다.
뇌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내 검은 작은 유성처럼 순식간에 뒤를 찔러 갔다.
그리고.
까앙···!
꽤 내력을 담은 일격이었지만, 힘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 검 끝에 위치한 사람은···.
“하하하하핫! 이거 물건이로구나! 마고파심탁(魔叩破心鐸)을 알아채는 것도 모자라 대응까지 하다니?”
“아버지!”
갈유화가 외친다.
30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그의 속은 육십이 넘은 노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관으로 보자면 귀공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갈유화랑 취향이 비슷한지, 화려하면서도 특색있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갈천능.’
그는 갈유화의 아버지이자.
암천회의 회주이며.
현 무림에서 천하제일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사내 중 하나였다.
갈천능
단목장룡의 몸이 굳어진다.
갈유화랑 엮이면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간 한 번은 그와 마주할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확실히 느껴진다.
‘강하다.’
며칠 전 보았던 나찰마궁의 대존자.
그 또한 단목장룡을 긴장하게 했다. 얼마나 강할까? 그와 싸우게 되면 나는 또 얼마나 발전할 수 있을까? 사실 긍정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를 보면서 몸이 흥분하는 걸 느꼈으니까.
하지만 갈천능은 다르다.
암성(暗星)이라는 별호처럼 그는 모습을 감춘 별이었다. 눈앞에 있음에도 그의 실력을 온전히 감지할 수 없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말이다. 깊이를 가늠하려 다가가면 그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
하지만 단목장룡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갈천능은 극마에 이르렀다.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았지만, 단목장룡은 꿋꿋이 서서 그를 마주했다. 아무리 그가 극마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기세만으로 꽁무니를 빼는 것은 최악의 수였다.
기세에서 밀려 물러나는 순간, 일수에 제압당하리라.
단목장룡은 그러려고 무공을 익힌 게 아니었다. 그는 한번 목숨을 잃어보았다.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친 경험이 있다. 어떤 강적이 나타나더라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해우심법의 기운이 단목장룡의 신체를 보호한다.
점차 몸이 편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이 풀린다. 갈천능이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인다면, 단목장룡의 검 또한 빛을 발하며 궤적을 그리리라. 그것이 설사 갈천능에게 닿을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두 사람의 대치에 갈유화가 당황한다.
“아버지, 장난은 그만두세요.”
“음.”
딸의 부탁에 갈천능이 단목장룡을 슬쩍 바라본다.
처음 단목장룡은 분명히 흔들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처럼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당연히 암천회주의 입장에선 단목장룡의 그 기세가 무섭다거나 하진 않았다.
단지 놀라웠다.
처음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찰마궁의 소궁주는 분명히 사파 내에서 입지가 상당했지만, 암천회주의 시선에선 애송이일 뿐이다. 그와 시비가 붙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만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해구분타주인 흑면패왕의 보고를 듣고 그는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자신의 딸이 매번 찾아갈까?
갈천능은 해남도에서 갈유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을 모두 지켜본 아버지였기에 당연했다. 혈세귀막의 화무기나 나찰마궁의 뢰극찰도 갈유화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었다. 그만큼 그녀의 눈이 높았다. 갈천능이 그렇게 키워왔으니까.
‘마고파심탁을 막아내고, 나를 마주하고서 저리 당당할 수 있다라···?’
피식.
갈천능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재밌는 놈이군.’
흥미가 생겨난다.
‘그리고 저건···.’
갈천능의 시선이 구석 탁상에 올려져 있는 옥 팔찌로 향한다. 그곳에서 퍼져나오는 기운이 방 내부를 휘감고 있었다. 신물(神物)이 분명했다. 기가 담길 수 있는 물건은 그 넓은 중원에서도 쉬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암천회주라도 그것이 단목장룡이 진법을 이용해서 만들어냈다곤 생각하진 않았다.
가만히 옆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갈유화는 갈천능의 표정을 보고 황급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어요. 이런 야심한 밤에 말이에요.”
“야심한 밤에 다른 사내의 침소에 찾아드는 딸 아이를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이 그렇지. 놀랐느냐?”
갈천능이 능글맞게 답했다.
그의 외모가 젊다 보니 부녀지간의 대화라기보단 남매끼리의 대화 같았다.
“조금 놀라긴 했죠. 저보단 오히려···.”
갈유화가의 시선이 단목장룡에게 향한다.
“장 공자님이 더 놀라셨을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안 그래도 단목장룡과 분위기가 그리 좋다곤 할 수 없었다. 단목장룡은 자신에게 실망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었다. 그에겐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괜찮다. 암천회주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천이라고···.”
“네 이름은 장천이 아니지 않나?”
단목장룡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갈유화였다.
“아버지···?”
“유화야, 이 아비는 암천회의 회주다. 네가 아는 정보를 내가 모르고 있겠느냐?”
갈유화의 두 주먹을 꽉 쥔다.
이렇게 되면 단목장룡이 자신을 더 신뢰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단목장룡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딱히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단목 공자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시구나···.’
그렇게 단목장룡에게 감탄하는 것은 덤이었다.
갈천능은 그런 갈유화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 단목장룡을 마음에 품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단목장룡이 정파인이라는 것은 크게 상관없었다.
애초에 암천제는 정파인들도 참가할 수 있는 대회였다. 비록 정파인들의 참가가 드물긴 했지만, 간간이 가명을 쓰고 참가하는 이들이 있었다. 갈천능은 그들을 배척하거나 하지 않았다. 정파나 사파나 결국 이념적인 차이가 있을 뿐, 결국 같은 인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싯적 후기지수라 불릴 시절의 갈천능은 이렇게 여유가 넘치진 않았지만, 초절정을 넘어 극마의 경지에 오르고 나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최근엔 쾌락을 추구하기보단 오히려 산에 올라 도(道)를 닦는 도사처럼 무공을 갈고닦을 뿐이었다.
“다 알고 계셨군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단목세가의 단목장룡이라 합니다.”
“흑룡단이기도 하지?”
“···예.”
“내가 앞에 있는데 긴장되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명실상부 무림의 최고수 중 한 명. 더군다나 사파인이다. 사파와 정파가 조약을 맺어 충돌하고 있지 않다지만, 사실 매년 두 세력 간의 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그게 크게 번지지 않을 뿐이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네 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는데?”
“아버지!”
“그러려고 하셨다면, 이렇게 기세를 거두진 않으셨겠지요.”
“크크크, 할 말은 다 하는구나.”
갈천능의 유쾌하게 답한다.
솔직히 그는 즐거웠다. 오랜만에 보는 흥미로운 후배. 사파니 정파니 나누어져 있다고 해도 넓게 보면 강호의 후배였다. 단목장룡은 암천회의 지존의 시선을 끌 정도로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앉지.”
가볍게 말하는 것임에도 그의 말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암천회라는 거대한 세력을 이끄는 자의 말이라 그런 것일까. 단목장룡은 문득 십만대산에 있던 교주가 떠올랐다.
세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리에 앉았다.
갈천능이 단목장룡을 보고 묻는다.
“이제 몇 번째더냐?”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교접을 몇 번이나 했더냐?”
“아버지···!”
갈유화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딸 아이가 왜 저리 화가 난 듯하지? 갈천능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이유는 단목장룡의 말로 알게 되었다.
“갈유화와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뭐?”
“···.”
갈천능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야밤에 남녀가 만나는 이유가 대체 무언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단목장룡의 말을 들어보니 두 사람은 아직 그런 관계가 아닌 듯했다. 이게 말이나 되나?
자신의 딸이지만, 갈유화는 어떤 사내라도 거부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그럴 수가 있는가? 그 또한 어릴 적엔 수많은 여인과 화끈한 밤을 보냈었다.
그리고 단목장룡은 단목장룡대로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해남도의 분위기가 개방적이라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보통은 저렇게 외모가 출중한 딸이면 아껴주려 하지 않나?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르자 갈유화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대화를 이어가다간 그녀만 손해를 볼 것 같았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는데, 갈천능의 등장으로 꼬여만 간다.
“아버지, 이만 돌아가요. 밤이 늦었답니다.”
하지만 갈천능은 깔끔하게 갈유화의 말을 무시했다.
“설마 너 사내를···?”
“아닙니다.”
단호한 단목장룡의 대답.
그것에 은근히 안심하는 갈유화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그렇다면 오늘 합방을 치러라.”
“아, 아버지?”
갈유화의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탕백환희소는 쾌락이라는 감정에 기반하여 발전하는 무공이었다.
단목장룡은 잠시 고민했다.
당연히 그녀와의 합방을 고민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갈천능의 저 말에 무슨 의도가 숨겨져 있을까 생각해본 것이다.
“왜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
고작 그게 이유인가?
갈천능이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유화도 네게 마음에 있는 듯하고 말이지. 그리 고민할 게 있느냐? 동자공(童子功)을 익힌 게 아니라면 유화와 하룻밤을 지내는 것으로 깨닫는 바도 있을 것이다. 유화 또한 좋은 씨를 받으니 암천회의 번영이라는 책무를 다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저···.”
갈유화는 그 옆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당장 아버지를 뜯어말리고 싶은 마음과 떠밀고 싶은 마음. 갈유화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저 보아라. 저 나이 먹도록 사내를 고르느라 유화는 처녀다. 정복욕이 마구 생겨나지 않느냐?”
슬쩍.
단목장룡의 시선이 갈유화에게 닿는다.
평소의 적극적인 모습은 어디 가고, 부끄러움이 가득한 표정이다. 욕정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단목장룡이 대답했다.
만약 사천성에서 당옥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그는 정파라는 틀에 묶여 있지 않았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고 하더라도 하늘이 무너져내리진 않는다. 오히려 암천회주의 환심을 사서 그것을 활용하려 했으리라.
그는 선은 지키고 싶었다.
이와 비슷한 유혹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에 복수하지 말고, 유유자적 과거처럼 살아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속삭임. 여기서 확실히 선을 그어두지 않으면, 언젠간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하하! 그러니 더 마음에 드는군. 너 같은 아이는 보기 드문데 말이야.”
두 사내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갈유화.
단목장룡의 거절과 오히려 그걸 좋아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 본 갈천능이 말한다.
“왜 돌아가려고?”
“···.”
갈유화가 슬쩍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자신이 가도 되겠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그녀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먼저 돌아갈게요. 두 분께서 이야기 잘 나누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만.”
갈유화가 도도한 걸음걸이로 방에서 떠나간다.
단목장룡은 은근히 그녀에게 미안했다. 아무리 그녀를 이용하려 했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거절하는 것은 당연히 상처가 됐으리라. 애초에 문제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낸 암천회주가 문제였지만.
“후후, 유화가 저리 삐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군.”
“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겁니까?”
“이유는 이미 말하지 않았나?”
“···.”
“뭐 널 떠볼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갈천능은 단목장룡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어떤가? 암천회에 들어올 생각이 없나? 해남도도 그리 살기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유화에게 형제자매는 많지만, 난 저 아이에게 암천회를 물려줄 생각이다. 그렇다면 너도 암천회의 권력을 잡게 된다는 말이지. 끌리지 않나?”
단목장룡이 대답이 없자 다른 것으로 유혹한다.
“내 무공은 어떤가? 마고파심탁과 더불어 탕백환희소 그리고 암천검(暗天劍)까지 가르쳐주마.”
단목장룡은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믿고 정파 출신인 자신에게 저렇게 말하는 것인가?
암천회주는 그런 단목장룡의 표정을 읽었다.
“나 정도쯤 되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지. 넌 보기 드문 진짜로 보이는군.”
그의 말에 단목장룡이 조금은 멈칫했다.
암천회의 힘을 당장이라도 활용할 수 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보기 좋은 음식이 맛까지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암천회주는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면 또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단목장룡은 조금 전에 했던 선을 넘지 않기로 한다.
유혹의 손길이 뻗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죄송합니다.”
“하하, 이렇게까지 내가 저자세로 나오는데도 거절이라니? 그것도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긴 하군.”
갈천능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지만 단목장룡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만약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유화와 이야기하게. 난 유화를 달래주러 가야겠군. 한번 삐치면 풀어주기 힘들어서 말이야.”
바람처럼 나타났던 갈천능.
그는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암천회주··· 극마에 이른 고수라···.’
그가 떠나고 나니 후회가 남는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한 번 싸워보면 과연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단목장룡에게 들었다.
‘기회는 또 있겠지.’
오해
암천제.
사실 이번 암천제는 많은 참가자가 있었지만, 많은 구경거리를 제공하진 못한 대회였다. 강대한 세력은 갖춘 이들끼리 부딪치기도 했지만, 실제로 큰 싸움이 벌어지진 못했다. 오죽하면 예선이 더 재밌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단목장룡 그러니까 장천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그는 어떤 상대든지 합의를 보는 것이 없었다. 상대로 했던 마두들의 목을 대부분 베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사파인들은 생각했다. 존경할만한 새로운 고수가 등장했다고. 그의 행보는 실로 감탄스러웠다.
예선전부터 혈살마조부터 시작하여, 본선을 시작하고는 혈발악존과 흉면수라를 저세상으로 보내버린다. 또 나찰마궁의 뢰극찰과 멋진 대결을 선보였다. 대마두라 불리는 이들이라도 나찰마궁의 앞에서는 기가 죽기 마련인데, 장천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소문으로는, 상대방이었던 칠교공자 또한 장천이 처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사파인. 해남도에서 장천을 평가하는 말이었다.
“오, 장천 대협이다!”
사파인들의 시선이 단목장룡과 설비연에게 향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에 존경 어린 시선을 받고 있었다. 단목장룡은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정파처럼 협의가 넘친다고 존경하는 게 아니다. 화끈하게 상대의 목을 치는 모습이 대협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한다. 역시 정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라는 게 느껴진다.
“이제 상대가 몇 남지 않았으니 당연히 우승하시겠지?”
“그러니까 말이야. 나찰마궁도 혈세귀막도 그리 나가떨어질지 누가 알았겠나?”
두 사내가 단목장룡을 보고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가 마른 체구의 사내가 문득 말한다.
“근데 암천회가 남아 있지 않나?”
“이 사람아, 암천회가 이제까지 자신들이 주최한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았나? 무조건 우승은 장 대협이야.”
“그것도 그렇군. 그러고 보니 장 대협과 공주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허허, 정말 부럽군. 나도 저런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구나!”
갈유화는 해남도에서 공주라 불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의 지위는 정말 공주라고 해도 무방했다. 해남도의 어떤 이들도 그녀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으며, 그녀의 외모 또한 대단히 아름다웠으니까.
다만, 감각이 예민한 단목장룡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 같은 인생이라···.’
어찌 보면 부러울 수도 있었다.
과거로 따져봐도 천마신교 교주의 직계로 태어났으며, 무공 재능 또한 출중했다. 하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었다. 이혼대법이라는 괴이한 술법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얻긴 했지만···.
그것이 이혼대법이 전부라곤 생각하진 않았다.
숨겨진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예감. 그에 대한 답은 아마 영령을 만나게 되면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
단목장룡은 해남구 주변을 적당히 살펴보고 다시 객잔으로 돌아왔다.
듣기로는 나찰마궁과 혈세귀막은 암천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배를 타고 돌아갔단다. 그들이 없다면 암천제에서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사실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맹으로 복귀할 땐 조금 조심해야 할 수도 있겠군.’
나찰마궁은 얕볼 수 없는 이들이다.
사파의 삼대 세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해남도를 벗어나는 순간 습격해올 수도 있었다.
“주공, 상대가 정해졌어요.”
암천회의 분타에 들려 대진을 받아 보려 갔던 설비연이 이제 막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대진표가 있었다. 이제 참가자들이 몇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다음 상대는?”
설비연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암천회에요. 그들이 마지막 상대죠.”
“마지막? 고수들이 꽤 남아 있다고 들었는데?”
뭐 혈발악존이나 흉면수라 등의 대물급 마두들은 내가 미리 처단했다. 하지만 그들만이 실력자는 아니었다. 그들만큼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암천제의 본선에 오르고도 계속 버텨왔던 고수들. 그들이 남아 있었다.
“그게··· 무서워서 패배를 선언했다고 하더군요.”
“무서워?”
“예, 주공께선 마두들의 목숨을 대부분 끊어놓으셨으니까요.”
“그렇군.”
그런 이유였나.
단목장룡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서 포기해준 덕분에 괜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럼 바로 마지막 상대를 만나러 가볼까?”
“예, 주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