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은소 객잔으로 돌아가는 길.
한 사내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단목장룡을 노려보고 있었다.
‘갈청?’
갈유화의 동생. 그러니까 암천회주의 둘째였다. 얼굴은 며칠 전 보았던 암천회주가 똑 닮아있었다. 피의 힘인지는 몰라도 그도 참 잘생겼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근육의 발달과 꿋꿋이 선 자세를 볼 때, 무공의 실력 또한 출중하리라 여겨졌다.
“갈 소협, 무슨···.”
갈청이 뚜벅뚜벅 단목장룡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누님에게 무슨 약점을 잡은 거지?”
“약점?”
“그래, 누님이 네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말한 정보를 모두 네게 털어놓더군. 대체 무슨 약점을 잡고 누님을 이용하는 거지?”
갈청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갈유화가 약점이라도 잡혀있지 않는 한, 극비 정보를 그리 쉽게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정확한 출신도 모르는 저런 놈에게 말이다. 설마 두 사람이 몸이라도 섞은 건가? 암천회에선 흔한 일이긴 했지만, 동생의 입장에선 천불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실 단목장룡이 갈유화의 약점을 잡고, 이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건 네 누이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어떤가?”
단목장룡의 말에 갈청의 눈썹이 꿈틀한다.
“놈, 자신감이 가득 찼구나.”
그의 몸에서 갈천능에게서 느꼈던 비슷한 기운이 흐른다.
마고파심탁이라 했던가?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
하지만 극마에 오른 갈천능이 펼친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조잡했다.
“···!”
갈청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선다.
“어찌···?”
마고파심탁의 기운이 해우심법의 내력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자들을 손도 대지 않고 제압할 무공. 분류하자면 음공(音功)이라 할까? 하지만 갈천능의 수준은 단목장룡에 미치지 못했다.
“마고파심탁, 역시 괜찮은 무공이군.”
오히려 그렇기에 단목장룡은 마고파심탁이라는 무공이 얼마나 괜찮은 무공인지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익혀두면 꽤 효용을 발휘하리라.
그리고 갈청은 그의 말에 또 오해하고 말았다.
역시 괜찮은 무공? 마고파심탁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것을 익힌 자는 회주의 직계 중에서도 몇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 무공을 알려줄 사람은···.
‘대체 누님을 어떻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렇기에 더 분노가 치민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내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너 이 새끼···!”
하지만 갈청은 판단이 빨랐다. 마고파심탁을 사용한 것은 적당히 그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이유였다. 그가 대마두인 혈발악존을 이기고, 나찰마궁의 뢰극찰을 이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그와 싸운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리라. 그렇기에 그는 일보후퇴를 선택했다.
슬쩍 뒤로 물러서는 갈청.
그 모습을 본 단목장룡은 어이가 없었다. 혼자 불같이 화를 내다가 이제는 도망치려는 낌새가 보인다.
“네놈,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
대답이 없는 단목장룡.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암천회와 관계를 유지하길 원한다. 갈천능의 말대로 갈유화와 혼인하여 암천회의 데릴사위가 될 생각까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난데없이 튀어나와 음공을 쏟아내곤 도망가려는 갈청을.
그냥 두기로 했다.
갈청은 단단히 긴장했다.
누님과의 관계를 알아차린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해올지 몰랐으니까. 어릴 때부터 몽환이라는 미약에 단련된 누님을 현혹할 정도면, 괴이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인지 단목장룡은 전혀 그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인진 몰라도··· 조만간 날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네놈은···!’
타다닷!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갈청이 최대로 경공을 펼친다.
그의 목적지는 경산현.
해구현 옆에 붙어 있는 현으로, 현재 그곳에 암천회주가 내려와 있었다.
‘살려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 * *
그날 밤.
“회주님, 긴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사적으로는 아버지라 부르지만, 암천회의 무인으로 회주에게 보고할 때는 갈천능을 회주라 부르는 갈청이다. 그의 심각한 목소리와 표정에 달빛을 벗 삼아 차를 마시고 있던 갈천능의 표정이 굳어진다. 극마라는 경지에 오른 후, 술은 잘 입에 대지 않는다. 과거의 암천회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상당히 놀라리라.
갈청이 해남도로 돌아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본래 암천회 광서분타주로 혈세귀막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지금 당장은 평화롭지만 언제 송곳니를 드러낼지 모르는 족속들이었다.
“앉아라.”
“예.”
갈청이 잠시 망설인다.
이것을 곧이곧대로 아버지에게 보고해도 될까?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누이 때문이다. 갈청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녀가 소회주가 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녀의 치부를 들춰내면?
갈유화의 한계를 아버지에게 떠벌린다면··· 과연 갈유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작은 오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본 갈천능 또한 여러 상황을 고려하고 있었다.
‘혈세귀막인가···.’
혈세귀막.
사실 암천회에선 큰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단체는 아니다. 오히려 단체로 따지면 암천회보다 더 골치 아픈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혈교의 후예를 자칭하는 그들의 피에 대한 집착은 평범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곳에 닿아있었으니까.
사파의 정점에 오른 암천회주도 긴장해야 할 만큼 말이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하거라.”
갈천능의 위엄.
그의 말에 갈청이 정신을 차린다. 누이가 잘못된 것은 지금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암천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언젠간 암천회주에 오를 사람이다.
“소회주가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혈세귀막을 생각하고 있던 암천회주.
난데없이 갈유화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갸웃한다.
“유화? 그 아이는 지금 해구현에 있을 터인데···? 귀막의 그 아이에게 접근했단 말이냐?”
“귀막이 아닙니다.”
“귀막이 아니다?”
“예, 회주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장천이라는 사내를 말입니다. 이번 암천회의 우승자지요.”
“알다마다.”
상당히 탐나는 인재였다. 그 아이가 갈유화랑 이어져서 암천회를 이끈다면 어떻게 될까? 암천회주는 극마에 오른 후, 중원의 패자가 된다는 헛된 꿈을 버렸지만··· 그래도 후대에 거는 기대는 있었다.
“그놈이 소회주의 약점을 잡아 이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놈은···.”
“쯧.”
갈천능이 혀를 찬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
“아버지, 심각한 일입니다. 소회주가 제가 무림맹에 관한 정보를 알아온 것을 모두 알려주었···.”
“잘했군.”
단목장룡은 정파인인다.
무림맹에 관한 정보를, 특히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는 정파 무림의 정보를 알려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예?”
“후우우···.”
갈천능이 한숨을 내쉬며 갈청을 바라본다.
갈청은 딱히 부족하지 않았다. 매사에 진지했으며, 성실했다. 갈유화가 없었다면 분명히 그가 소회주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
그는 사람 보는 눈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본능이자 타고나는 것. 재능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갈유화는 그것을 타고 났다.
“넌 아직 네 누이를 모르느냐?”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 아이가 누구에게 현혹당해 이용당하리라 생각하느냐?”
“저도 소회주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천 같은 신분도 분명치 않은 놈에게 정보를 마치 보고하듯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답답한 둘째의 말에 갈천능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래? 그럼 직접 가서 확인해보면 될 일이군.”
“지금 당장 소회주에게 가시려고 하십니까?”
갈청이 침을 꿀꺽 삼킨다.
아버지가 진실을 알게 되면 누이는 어떻게 될까? 최근 아버지는 많이 유해졌다. 하지만 가끔 분노할 때는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분노하시면, 내가 누이를 지켜야 한다. 잠깐의 실수로 소회주직에서 물러나겐 할 수 없지.’
갈청이 그렇게 다짐하며 암천회주와 함께 해구분타로 향했다.
선물
“그러니까 내가 장 공자님의 괴이한 사술에 현혹되어서 아버지께 그걸 보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장 공자님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말이더냐?”
“···.”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 이상하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암천회주는 갈유화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분노한 누이의 시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것은 갈청의 몫이었다.
“누님, 속고 있는 거요. 장 공자는 누님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하지만 갈청은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갈유화가 잘못되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는 아버지도 직접 해결해보라고 가만히 있는 것이리라.
“후후, 안 그래도 장 공자님과 관계가 조금 가까워졌다고 싶었더니···.”
“오, 진전이 좀 있었느냐?”
“나름대로요. 허나, 청이 덕분에 그것이 다 망쳐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두 분,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 겁니까?”
갈청이 의아함에 질문하자.
갈유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넌 내가 사술에 걸렸다고 했지. 그렇다면 사술에 걸린 누이에게 당연히 이길 수 있겠지?”
“그게 무슨···.”
“아버지, 오랜만에 청이를 교육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그냥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암천회주의 앞에서 동생을 패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가끔 매도 약인 법이지. 그래도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말거라.”
“네.”
“아버지? 누님?”
갈청은 난데없이 돌아가는 상황이 눈만 끔뻑끔뻑 뜬다. 설마하니 정말 자신을 때릴 것이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
하지만 그 생각은 삽시간에 깨어지고 만다.
“커억!”
공교롭게도 이곳은 해구분타 내에 있는 연무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암천회주가 이곳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 듯했다. 대체 뭐지? 암천회주는 일이 이렇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나? 설마 자신의 힘으로 갈유화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라는 의도인가?
오해와 오해.
인간은 하나를 믿게 되면,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기가 힘들다. 특히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갈청은 객관적으로 부족하다거나 멍청하진 않았다.
오히려 평균 이상으로 머리를 쓸 줄 아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얼핏 확실해 보이는 증거를 직접 목격하고, 시간이 지남으로써 더 뚜렷해지고 있는 단계였다. 일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그런 방향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물론, 이번 교육이 끝나면 아마 갈청도 정신을 차리리라.
그리고 그는 이번 기회에 또 배우는 것이 있으리라.
“미친년! 날 죽일 셈이냐!”
어릴 적엔 갈유화를 상스러운 말로 부르기도 했다. 남매지간이라는 것은 사파나 정파나 똑같다. 그것이 무림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스멀스멀···!
갈유화는 갈청의 외침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동생을 혼내줄 때, 짓던 그 표정 그대로. 최근 그녀는 해남도로 와서 무공만 열심히 익혔으며, 갈청은 광서분타로 가서 분타를 이끌었다. 그렇기에 서로 이렇게 만난 적은 꽤 오랜만이라 할 수 있었다.
“나도 참지 않겠··· 커억!”
갈청이 분노하여 갈유화에게 검을 뽑으려 했지만, 말을 하는 그 틈마저도 놓치지 않고 갈유화는 손을 뻗었다.
아마 오늘의 교육이 끝난다면, 갈청도 다시 한번 깨달으리라.
암천회주가 왜 갈유화를 소회주로 뽑게 되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