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36)

* * *

“나와라.”

쭈뼛쭈뼛.

기둥에 숨어 한쪽 눈만 빼꼼히 내민 여인이 보인다. 시간이 흐르긴 흘렀던 모양일까? 내 기억과는 다르게 키가 훌쩍 자랐다. 예전엔 볼살이 귀엽게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숙녀 태가 난다고 할까.

“정말… 장룡 오라버니 맞아요?”

“맞다.”

“정말?”

“정말.”

쑤욱.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초롱초롱한 두 눈이 날 바라본다.

“산산이가 많이 컸구나.”

“헤헤…….”

이름을 불러 주자 슬그머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웬 부끄럼이냐?”

“뭐, 뭐가요. 하나도 안 부끄럽거든요? 그냥 어색해서 그래요, 어색해서!”

“나랑 있는 게 어색하더냐?”

“그, 그게 아니라요 그냥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또 너무 달라지기도…….”

“걷자.”

내가 앞서 나가니 후다닥 따라오는 단목산산.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소문 많이 들었어요.”

“무슨 소문?”

“여러 가지요!”

처음엔 달라진 내 모습에 어색해하던 단목산산이 재잘재잘 수다를 늘어놓는다. 대부분 내 활약상에 관한 이야기다. 난 그녀의 말에 호응해 줄 뿐이었다.

“차암…….”

장원 중심부의 연못.

그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은근한 눈빛으로 묻는다.

“무림오룡 선배들은 어땠어요?”

“무림오룡이라… 제대로 진지하게 대화해 본 것은 세 사람뿐이구나.”

“누구누구요?”

“남궁일몽, 팽염호, 위지풍.”

“다 오라버니가 이기는 거죠? 그렇죠?”

반짝이는 눈빛.

당연히 그러리라는 표정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대단해요! 청야 오라버니는 천룡각을 나왔는데도 무림오룡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러다가 정말 오라버니가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 아니에요? 응! 제가 볼 땐, 그게 맞을 것 같아요. 정말요!”

단목산산은 은근히 단목청야를 싫어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자리를 뺏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후계자가 되는 게 나한테는 이득이다. 굳이 단목세가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니까.

“넌 내가 후계자가 됐으면 좋겠어?”

힐끔 주위를 둘러본 단목산산이 빠르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전 오라버니가 노력한 만큼 본가에서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청야 오라버니보다 장룡 오라버니가 훨씬 강하잖아요. 강한 사람이 가주가 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녀의 머리에 손을 툭 얹는다.

후계자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말을 참 예쁘게 한다.

“그래도 난 가문을 잘 이끌 사람이 후계자가 되었으면 한다. 무공은 내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 청야 형님이 가문을 이끌어 갈 능력은 나보다 뛰어날 듯하구나.”

난 단목세가를 오대세가로 만들겠다는 야망 따윈 품지 않았다.

가문을 진정으로 원하는 자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말에 단목산산이 고개를 갸웃한다.

“응? 청야 오라버니와 무슨 일 있었어요?”

“왜?”

“뭔가 느낌이 그래서요. 예전엔 두 분 사이가 안 좋았잖아요. 그때 비무할 때만 해도…….”

“맹에 있으면서 대화를 나눠 보았단다.”

“헐! 정말요? 말도 안 돼!”

단목산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말도 안 되긴. 어디 가서 내가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린 하지 말아라. 난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 없단다.”

“…알겠어요. 오라버니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하지만, 전 청야 오라버니가 아니라 장룡 오라버니 편이에요. 만약 제 도움이 필요하시며언― 아얏!”

단목산산의 볼을 꼬집는다.

“넌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무공이나 열심히 수련하렴. 네 힘이 강해져야 가문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거란다. 예전처럼 하기 싫은 혼사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말이야.”

“그거 아고이다고요…….”

“그런 김에 오랜만에 무공을 봐주마.”

“저마요?”

난 그녀의 볼을 놓아주었다.

탱글탱글한 것이 꼬집는 맛이 있었다.

“그래. 열심히 수련하지 않았으면 혼내 줄 거다.”

“후훗! 천룡각에 들어가기 위해서 정말정말 열심히 했다고요!”

단목산산의 재능은 나쁜 편이 아니다.

그래도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확인해야겠지.

“가자.”

“응, 가요!”

* * *

단목산산.

단목장룡에게 이제껏 수련한 결실을 보여 주고, 무공 지도까지 받았다. 그녀는 가문에 머물며 태상가주나 가주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었다. 당연히 두 사람의 수준이 단목산산보다 아득히 높았으니 배울 것은 많았다. 하지만 일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얻은 것보다 고작해야 몇 시진 동안의 단목장룡의 지도가 훨씬 얻는 것이 많았다.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해…….’

단순히 그런 느낌인 게 아니라, 막혀 있던 것이 팡~ 하고 뚫려 버렸다. 단목장룡은 단목산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었으며, 그대로만 나아가면 분명히 좋은 성취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단목경은 물론이고 단목청야까지도……?

‘에이, 그건 힘들겠지? 아무튼, 오라버닌 최고얏!’

뿌듯!

당장이라도 나가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연미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면……!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콩닥콩닥.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랑이 되는 형제자매는 흔치 않았다. 식솔들이 단목장룡이 오자마자 기루에 들렀다고 하지만, 자신이 아는 오라버니라면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그녀는 단목세가에서 단목장룡을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선선한 바람에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던 단목산산.

누군가 걸어오는 게 느껴진다. 그녀의 어머니 백예령이다.

“엇, 어머니!”

“…….”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산산아, 오늘 장룡이와 함께 수련했다고?”

오! 어머니한테 오늘 수련의 성과를……!

입이 근질근질하던 단목산산이 수다 본능을 발휘하려 할 때.

“네! 그게…….”

“장룡이가 무슨 말을 하든?”

서늘한 느낌에 단목산산이 입을 다문다.

어머니는 혼낼 것이 있으면 저런 말투로 입을 떼곤 했다.

“무슨 말이요?”

“산산아, 중요한 이야기란다. 장룡이와 한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렴.”

“그냥 제 무공 수련을 봐주셨어요.”

“그것뿐이니? 널 포섭하려고 했다든가…….”

“포섭이라뇨?”

단목산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왠지 반항적인 딸아이의 눈빛에 백예령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진다.

“산산.”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장룡 오라버니는 절 포섭하려 하지도 않으셨고요. 그리고 이미 전…….”

장룡 오라버니에게 포섭당했어요.

그 말을 끝맺진 않았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서는 것은 장룡에게 폐가 될 수도 있었다. 오늘 그랬지 않은가? 이런 것 신경 쓰지 말고 무공 수련이나 열심히 하라고. 오라버니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꿀떡이 내려온다.

“이미 넌?”

“아니에요! 어머니, 오늘 무공 수련의 성과가 정말 좋았어요. 어쩌면요. 셋째 오라버니를 뛰어넘을 수도 있어요.”

“경이를? 그게 정말이니?”

백예령의 목소리가 은근히 풀어졌다.

단목청야, 단목산산 둘 다 소중한 자식이다. 비중을 따지자면 아들인 청야가 더 중요했지만, 산산이의 성장도 당연히 중요하다. 거기다 천룡각에 들어간 단목경을 뛰어넘는다니. 만약 산산이가 천룡각에 들어간다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질 것이다.

“오늘 수련한 걸 보여 드릴까요?”

단목산산이 백예령의 손을 잡고 연무장으로 데려갈 기세였다.

백예령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단목산산의 꾀였다.

“내일 보자꾸나. 이미 수련하고 목욕하지 않았니? 여러 번 목욕하면 피부에 좋지 않단다.”

“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옆에 와서 애교를 부리는 단목산산.

백예령은 그런 산산을 몇 번 더 떠본 후 돌아갔다. 당연히 단목산산은 장룡이 말했던 후계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둥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와 약조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라버니에게 알려야 해.’

단목산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백자강.

비화 표국의 표국주로, 무공 실력은 일류의 상급이었지만 사업 수완이 남달랐다. 단목세가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화 표국은 호북성을 넘어 다른 성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호북성 내에선 세 손가락에 꼽히는 표국이 되었다.

그렇기에 백자강은 당연히 자신의 손자인 단목청야가 단목세가를 물려받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비화 표국의 위세는 더더욱 커지리라. 하지만 딸아이에게 받은 서신이 심상치 않았다. 단목세가의 장로들 사이에서도 둘째 공자의 성장으로 후계자에 대한 여러 말들이 오간다고 한다.

‘어차피 최종 결정은 가주가 한다.’

비화 표국의 건재함을 보여 준다.

단목청야에게 힘을 실어 준다. 그것이 외할아버지로서 해야 하는 일이다.

백자강은 백예령의 서신을 읽자마자 결단을 내렸다.

“장 표두, 거기 있는가?”

“예, 표국주님.”

어찌나 험한 인생을 살아왔던지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사내. 튼실한 근육이 엿보인다.

“의창현을 거쳐 가야 할 표행이 있지 않은가?”

“예, 있습니다.”

“의창까지 내 직접 움직일 걸세. 준비하도록 하게.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발하지.”

대번에 표국주의 말뜻을 알아들은 장춘만.

“예, 일 급 표사들을 이번 표행에 합류시키겠습니다.”

“전부.”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단목세가에게 무력시위?

당연히 그따위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아무리 비화 표국이 하북성에서 명성이 있다곤 하나, 단목세가엔 미치지 못한다. 단지, 비화 표국이 단목청야를 지지한다는 것만 알려 주면 된다. 비화 표국주는 단지 표행 중에 단목세가에 ‘우연히’ 들를 것일 뿐이다.

‘아무리 둘째가 강호에서 명성을 떨쳤다곤 하나… 장남이 가업을 물려받는 건 당연한 이치야.’

당연히 단목장룡과 척을 질 생각은 없다.

잘 구슬려서 단목청야를 잘 보조하게끔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형제끼리는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법이다.

물론, 단목장룡은 후계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

“저… 선배님……?”

예전처럼 새붕이라 편하게 부르려다 멈칫하는 단목산산.

누구에게나 자랑하고픈 오라버니의 밑에서 수련해서 그런지 이새붕은 과거와는 달랐다. 함부로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하, 편하게 하십시오. 선배님이라뇨. 그냥 예전처럼 새붕이라 편히 대하시면 됩니다.”

이새붕의 착함에 단목산산이 고개를 휘휘 젓는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어찌 오라버니의 일등 수하분께 그럴 수 있겠어요? 선배님이라 부를게요!”

“일등 수하요? 하하… 그거참… 예, 공녀님께서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야… 그러는 편이 좋겠지요. 참,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새붕이 쑥스러움에 목을 긁적이며 말한다.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단목세가의 일개 시종에 불과하던 그가 단목세가의 공녀에게 선배님이라 불리다니…….

“아, 오라버니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직 안 주무시나요?”

“지금 조장님께선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에? 어디로요?”

“임무차 떠나셨는데 언제 돌아오실진 모르겠군요.”

단목장룡은 제갈교아의 정보를 얻으려 의창현 남쪽에 위치한 형문산(荊門山)으로 향했다. 형문산채. 산적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그러니까 단목장룡은 녹림도들을 족쳐서 정보를 뜯어내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아무리 단목산산이라 해도 그것까진 말해 줄 수 없었다.

“후우…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만약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시면 꼭 저한테 찾아와 달라고 말 좀 전해 주세요! 꼭이요!”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선배님!”

“하하……!”

단목산산에게 선배님이란 소리를 들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은 이새붕이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나무 위에 올라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형문산채

타다다닷!

이번엔 수하들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남성에서 호북성까지 거의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수하들. 내색하진 않지만 힘들어하는 것이 보인다. 제갈교아를 찾는 임무가 중요하다곤 하지만 수하들의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강행할 생각은 없다. 이번엔 조원들을 쉬게 하고 혼자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산적을 족치는 것일 뿐이니까.

‘그냥 산적은 아니던가.’

의창현 남단에 위치한 위치한 형문산.

그곳엔 ‘무공’을 배운 산적들이 있다. 성성루에 찾아온 놈들은 그래도 무공의 기본은 배웠다고 느껴졌다. 천향도 요즘 녹림의 세력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고 말했었다.

‘뭐, 상관없지.’

녹림 자체는 무섭지 않았다.

단지 현재 정파와 사파는 조약을 맺은 상태였기에 그들을 전멸하면 문제가 된다. 산채에 올라 봐야 알겠지만, 그들에게서 제갈교아의 정보를 얻는 게 목적이었기에 굳이 일을 크게 만들 생각까진 없었다.

멀리 형문산이 보인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발에 채는 자갈 따위가 없이 평평하게 잘 닦여 있었다. 녹림의 긍정적인 요소를 말하라면 이런 부분을 꼽을 수 있으리라. 이용해야 할 길을 만든다. 빙빙 돌아가는 것보다 형문산을 통과하는 게 더 좋도록. 그래야 ‘손님’들이 늘어날 테니까.

뭐, 언제까지 저들이 주요 길목과 산을 점거하여 통행세를 받아 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녹림을 이끄는 놈은 머리가 꽤 돌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많군.’

다짜고짜 산채로 올라가면, 당연히 저들은 죽어라 덤비리라.

일단 대화로 풀어 볼 예정이었다.

‘으음, 저 무리는 표국인가?’

등성이를 오르니 저 멀리서 횃불을 들고 멈춰 선 이들이 보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는 ‘비화’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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