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36)

* * *

“공녀님, 문지기들에게서 전언이 왔어요.”

“그래?”

하후예민이 서신을 펴 보았다.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사내가 하후세가를 방문했다고 했다. 문지기들은 하후세가에서 엄선한 무인들로, 철저한 교육을 통해 키워졌다. 물론 그들의 안목이 십 할 정확한 것은 아니었기에 공녀인 하우예민이나 대공자가 이차적으로 사람을 거른다.

알게 모르게 그들을 포섭하여, 하후세가의 충실한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직계들의 역할이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 외모 중상. 허리에 검을 찬 것으로 보아 무인으로 추정됨. 전혀 주눅 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음. 도리어 왜 신분을 묻지 않느냐고 되물을 정도였음.

이 정보만으론 사실 그 사내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할 순 없었다.

이런 경우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전혀 보잘것없는 사내이거나.

혹은 대박이거나.

하후예민은 붓을 내려놓고 나갈 채비를 한다. 오랜만에 객당에 들러 식객들과도 친분을 과시해야 한다. 그래야 식객들이 떠나질 않는다. 개중에 자신을 연모하는 사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혀 받아 줄 생각은 없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그녀는 그 사내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업신여기지 않았다.

왜냐고?

그런 사내들은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해 줄 인연이었기에. 작은 연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고전에는 덫에 걸린 두루미를 구해 주었더니 훗날 몇 배로 갚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낱 짐승들도 그러할진대 인간은 어떠하리?

가주인 하후광은 최대한 많이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하후예민은 그 가르침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물론, 가끔 연모의 감정이 과하여 사고를 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제껏 쌓아 온 하후세가의 공덕 덕분인지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만약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할지라도 식객들과 남창의 백성들은 모두 하후세가의 편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많이 베풀어 위험한 적도 있었지만, 하후세가는 최근 기연을 얻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제야 빛을 보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

순수한 소녀의 마음으로, 하후예민은 일어섰다.

그녀도 슬슬 혼인할 나이가 되었다. 사실 중원에선 십 대 중반에도 혼인한다고 하지만, 그나마 무가의 자식들은 혼기가 늦춰진다. 그렇다고 해도 이십 대 중반을 넘어가면 문제가 있어서 혼인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곤 한다.

평판에 예민한 하후예민은 절대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러 후보군이 있었지만, 그들은 무림 전체에서도 노리는 여인이 많았기에 아무리 남창에서 영웅이라 칭송받는 하후세가의 여식이라도 힘들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만을 바라봐 줄 사내를 원했다.

여느 중원의 영웅호걸들처럼, 삼처사첩이니 하는 꼴은 절대 보기 싫었다. 정말로, 진짜 좋은 사내가 나타나면 첩 하나는 허용해 줄 용의까진 있었지만…….

‘으음, 오늘은 머리를 묶을까?’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손님을 만나러 갔을 뿐이다.

객당에 도착하고, 오랜만에 보는 식객들과 반갑게 인사한다. 몇몇 이들은 성의의 표시라며 꽤 값이 나가는 물건을 선물로 주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가치가 담긴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 정확히 따져 보고, 탈이 없을 때 받아야 한다.

그렇게 객당의 식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사내를 보았다.

오뚝한 콧날. 다부진 입술.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눈빛. 자신이 왔는데도 묵묵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저 순수함!

‘어머, 괜찮은데?’

하후예민은 기억력이 좋았다.

식객들과 인사하면서도 분명히 그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생각했다.

‘눈에 익어, 저 눈빛. 어디선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듯한데…….’

그러던 중.

떠올리고 말았다.

화산이 개최했던 용봉지회.

무림오룡이 몇 명이나 참가했으며, 역대급으로 멋진 비무가 줄줄이 나온 대회였다. 그녀는 거리가 멀어 용봉지회에 참가하지 못하고 본선만 관전했었는데…….

‘분명해! 단목장룡이야!’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그러면서도 전혀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면 무조건 이용당하고 만다는 아버지의 가르침. 어릴 적부터 엄한 가정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 인사하고 싶었지만 참아 냈다.

그렇게 마주한 단목장룡.

그는 자신을 장천이라 소개했다. 그녀는 단번에 깨달았다.

‘본가를 둘러보러 왔다.’

사실 단목세가와 하후세가의 지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하후세가와 단목세가는 당연히 교류를 나눴다. 지금도 적당히 인사를 나눌 수준은 되었다. 직계끼리의 친분이 없다 뿐이었지.

설마 날 보러 온 건가?

아니야. 흥분하지 말자. 난 아직 그에게 보여 준 것이 없어. 남창제일미? 그런 위명은 저런 사내에게 대단한 것도 아니야.

그녀는 최대한 평소 모습을 보여 주려 했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직접 하후세가를 보여 줘야겠어.’

그녀는 자신의 가문에 자신이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가문. 누구나 하후세가를 칭찬한다. 한 끼도 먹지 못하는 백성들은, 하후세가를 황제처럼 받든다. 물론, 그녀는 황제가 될 생각도 없었고 사실 그럴 수도 없었지만, 옳은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단목장룡은 장원을 둘러보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하후세가의 진심을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저긴 병기고입니까? 왠지 철 냄새가 나는 듯한데요.”

단목장룡의 말에 하후예민이 조금 당황한다.

저곳은…….

‘저기에 철이 있던가? 병기가 있긴 하지만, 병기고는 아니지.’

사실 전각을 부르는 명확한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후예민은 가장 적절한 말을 떠올렸다.

“후후, 아니에요. 저긴 백성들에게 신선한 고기를 가져다주기 위한 도축장이랍니다.”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하후예민은 당당하게 말했다.

* * *

하후예민은 대화할수록 단목장룡에 빠져들었다.

이런 사내가 있나? 보통 무인들은 하후세가의 장점을 모른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런 선행이 언젠간 빛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말이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중함이 담겨 있다. 거기다 외모는 볼수록 호감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잘생겼다.

또 명문가 출신이고, 무공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저런 사내라면…….

처음으로 사내에게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끄러운 생각을 했다는 것에 그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낫,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주책이야, 주책.’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녀의 침실까지 들어가진 않았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방에서 서예를 한 것을 보여 주고 먼 지역에서 공수해 온 명차를 달여 주었다. 그의 짧은 한마디라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맞아요. 가끔 더 내놓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는 분들도 계시지만, 다른 분들이 알아서 막아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을 만들어 간다는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매일 배우고 있답니다.”

“가주께서 많이 노력하셨겠군요. 듣자 하니 여러 사업을 운영 중이시라던데.”

“네, 그것 때문에 힘든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저도 사실 아버지 얼굴 뵙기가 힘들어요. 호호. 차를 더 내드릴까요?”

“아닙니다. 이 정도면 향은 충분히 맡은 것 같군요.”

단목장룡을 바라보는 하후예민에게 그런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는다.

‘그냥 말해 버릴까? 아니야.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발설하면… 신분을 알고 잘 보이려 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 속물로 보이는 건 싫어.’

“장 공자께선 언제까지 머물 생각이신가요?”

단목장룡은 솔직히 말한다.

“아마 오래 있진 않을 겁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장 공자님 같은 분이 하후세가에 계신다면, 정말로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죠. 제가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조금 있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이런 말에 실망하면 어쩌지?’, ‘자화자찬하는 여자는 싫어하려나?’ 하는 온갖 상념이 떠올랐다.

“그리 말씀하시니 쑥스럽군요.”

“호호호.”

다행히 나쁜 반응은 아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마음이 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금방 떠난다고? 그가 무림맹에 들어갔다는 건 소문을 통해 들었다. 아마 무림맹에 돌아간다면, 남창에 올 일은 거의 없겠지.

“장 공자님, 정말 죄송하지만, 정확히 언제 떠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걸 묻는 게 실례가 될까요……?”

“내일 떠날 겁니다.”

“……!”

단목장룡의 말에 그녀가 두 주먹을 꽉 쥔다.

너무 촉박하지 않은가? 그와 남창현 중심부의 반점에도 함께 가고 싶었고, 포양호에 가서 뱃놀이도 하고 싶었다. 시간만 많았다면…….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은, 금방 꺼지기 마련이라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이 남자, 무조건 잡아야 해.’

하지만 전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사내를 유혹하더라? 평소엔 노력하지 않아도 사내들이 꼬였다. 하지만, 정말 원하는 사내 앞에서는 바보가 되고 만다.

‘일단 잡아 둬야 해, 오늘 하룻밤이라도 객당에 머물도록…….’

그녀가 말한다.

“혹시 객당에서 머물 생각이신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일이 잘 풀렸다.

다른 숙소를 잡아 뒀다고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네, 당연하죠. 본가는 손님을 가려 받지 않는답니다.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방을 내어 드릴게요.”

이것에도 그녀의 의도가 숨어 있다.

가장 좋은 방을 내주겠다고 하면, 다분히 무언가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것을 최소한으로 하여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접받는다는 느낌에 어깨를 으쓱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단목장룡과 대화를 나눠 보니 전자는 분명히 아니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단목장룡 또한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밤에 방구 구출 작전을 펼칠 생각이었으니까.

“장 공자님, 본가에서 행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좋다고 봅니다. 사실 이렇게 선행을 베푸는 가문은 처음 봐서요. 조금 놀랍기도 합니다.”

“정말이요? 다행이네요.”

“예, 가주님이 참으로 훌륭하신 분 같습니다.”

이거다!

하후예민은 급하지 않게, 여유를 가지고 그에게 제안했다.

“제 아버지를 만나 보시겠어요? 아버지도 장 공자님과의 대화를 반기실 거예요.”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제가 한번 여쭤라도 볼게요.”

“아닙니다.”

단목장룡이 단호히 거절했다.

왜냐고? 양심에 찔릴 것 같았으니까. 그는 하후세가를 방해할 생각이다. 방구를 구출하는 것은 분명히 하후세가에 타격이 될 테니까. 뭐,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하후세가주와 하하호호 웃고 떠들 순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러시군요.”

잔뜩 실망한 하후예민.

“죄송합니다.”

“아, 아뇨! 죄송할 것 전혀 없으세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거니까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차암! 혹시 좋아하는 음식은 있으세요?”

황급히 화제를 돌려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하는 하후예민.

분위기가 차가워지면 정말로 그녀는 울 것만 같았으니까.

“가리는 것은 없긴 합니다만… 굳이 하나만 꼽자면 봉봉계가 떠오르는군요.”

“아! 사천에서 유명한 음식이죠? 저도 한 번 먹어 본 적이 있어요!”

봉봉계는 단목장룡에게 추억이 담긴 음식이었다.

닭 다리 하나에 감동했던 여인이 문득 떠오른다. 하후예민과의 대화에서 분명히 얻는 것이 있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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