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목세가의 역대급 망나니-139화 (139/236)

139화 바보

포옥.

그녀, 당옥정이 힘껏 날 껴안았다. 그녀의 머리가 내 턱에 살짝 닿는다. 풋풋한 과일 같은 향이 코끝을 스쳐 온다. 당옥정이 무림맹에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다짜고짜 날 껴안을 줄은 몰랐다. 뭐, 당연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녀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쿵쾅쿵쾅. 기분 탓인진 몰라도 그녀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리는 듯하다. 아니면 내 심장 소리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 이제 어떡하지?”

문득 그녀가 말을 내뱉는다.

“응?”

콩닥콩닥!

왠지 모르게 그녀의 심장 소리가 더 커진 듯하다.

“아니야! 생각이 말로 튀어나와… 가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당옥정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외쳤다. 당황했다는 것이 여지없이 느껴진다. 그녀는 내 등에 닿은 손을 꼼지락대며 힘을 주었다가 빼기를 반복하고 있다. 피식. 그래, 당옥정은 이런 여인이었지. 새삼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 죽립을 푹 눌러쓰고, 뇌왕의 장보도를 찾아 헤맸던 그녀. 그땐 참 어리숙해 보였는데 말이지. 지금은 어리숙하다기보단 귀엽다고 느껴진달까?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고도 생각했지만, 참기로 한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장난을 치고 싶진 않았다.

살포시 그녀와 거리를 벌린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날 껴안았던 팔을 풀어 뒤로 물러섰다. 자세히 보진 못했는데, 그녀의 귀와 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붉어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으응……! 오랜만이야.”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날 껴안은 것이 저리도 부끄러울까?

자세히 얼굴을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어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효과가 날 뿐이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에 들어가서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하자. 조장님들과는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지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예, 알겠습니다.”

남궁일몽과 설비연이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한다. 그러자 당옥정이 당황하며 소리친다.

“무림맹 일도 있으니 다른 조장님들과 먼저 이야기해도 괜찮아! 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안 괜찮아.”

“그, 그런……?”

드디어 당옥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큼지막한 눈을 끔뻑이는 그녀. 오랜만에 보니 더 예뻐진 듯하다. 과거엔 소녀로 느껴졌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성숙해진 모습이랄까. 그녀는 뭔가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당황하는 것 같기도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

“가자.”

“으응! 저기, 두 분께는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두 사람에게 착실히 사과까지 하는 당옥정.

남궁일몽이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아닙니다.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양보해야지요. 사실 급한 용무도 없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 조장님?”

남궁일몽의 말에 설비연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히 저희가 기다리는 게 도리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의외로 당옥정에게 깍듯하게 예를 차리는 설비연이다.

당옥정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감사드려요.”

“그럼 나중에 내가 찾아가지.”

두 사람과 인사하고, 당옥정과 함께 오 조의 전각으로 향한다.

그곳에 도착하니 연무장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전대 맹주를 만나러 간 사이에 수련을 시작한 모양이다. 역시 잘 가르쳤어.

오 조에서 일하는 시비에게 차를 내와 달라고 말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내 방으로 들어가니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어엇?”

“새붕이?”

머리에 두건을 매고 젖은 천으로 내 방을 열심히 닦고 있던 이새붕이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당옥정에게 인사한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 공녀님!”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

“무림맹으로 오신 모양이로군요.”

“응, 맞아.”

그렇게 대답하며 슬쩍 내 눈치를 보는 당옥정이다.

이새붕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럼 청소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또 인사드릴게요, 당 공녀님.”

“그래. 알겠다. 청소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먼지가 쌓인 방 안에 조장님께서 주무시게 할 순 없죠. 전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응! 나중에 또 보자.”

“예! 공녀님.”

이새붕이 쾌활하게 인사하며 떠나간다.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당옥정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지? 뭔가 새붕이가 달라진 것 같아.”

“새붕이가?”

“응, 예전에는 나랑 대화하는 것을 많이 어색해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그런 모습이 전혀 없어.”

아, 과거 이새붕은 여자 울렁증이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걸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했다. 그 내용을 설명해 주자 당옥정이 놀라워한다.

“역시 무림맹에서 있으니까 사람이 팍팍 달라지는구나……. 대단해.”

“난 달라진 것 같아?”

호수같이 반짝이는 그녀의 눈망울이 날 응시한다.

“으으음……!”

“어때?”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랑 똑같아. 머리가 조금 긴 것 말고는……!”

“상상했던 모습?”

“아하하하… 으응. 서신을 읽으면서 넌 어떤 모습으로 글을 썼을까 상상하곤 했거든.”

“내 생각을 많이 했나 보군?”

“……!”

당옥정의 얼굴이 다시금 화악 붉어진다.

“마, 많이 하긴 했지. 아니, 엄청나게 많은 건 아니고 조금 많이? 딱 그 정도였어! 무공 수련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어!”

“나도 네 생각을 많이 했어.”

“…….”

당옥정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인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아쉽기도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앉자.”

“으응……!”

당옥정과 마주 보며 앉으니 시비가 차를 들고 왔다.

천천히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언제 무림맹에 온 거야?”

“이제 보름 정도 됐어.”

“맹에 입맹하려고?”

내 질문에 그녀가 위축된 목소리로 대답한다.

“응, 그러려고 왔어. 미안해, 말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장룡 너한테 부담이 될 수도 있는데, 너무 오고 싶어서 왔어. 그래도 무공도 열심히 수련해서 지금 뇌공검법 육 성의 경지에…….”

난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솔직히 부담이 없다곤 할 수 없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와 주니 당연히 좋았다. 거기다가 뇌공검법 육 성에 올랐다는 말을 들으니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특한 감정도 들었고, 고맙기도 했다.

“네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해. 내게 미안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 근데 어디 소속으로 들어오려는 거야?”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아……! 흑룡단은 아니야! 너한테 민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 정주에 오기 전에 아버지랑 상의해서 청룡단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를 배우기로 했어. 당문 출신들은 청룡단에서 운용하는 정보 조직에 들어가거나 독약을 제조하는 일을 맡는다더라. 독약을 제조하는 건 내가 잘하는 일이고, 정보를 다루는 방법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걸 배우고 싶어서 청룡단에 입단하게 됐어.”

민폐라는 말이 조금 걸리긴 한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과거 진주언가의 언승지와 혼담이 오갈 때 핑계를 댔던 것이 아직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또, 그것과 별개로 당옥정은 확고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무림맹에 온 것 같았다.

확실히 성숙해진 당옥정의 모습에 신뢰가 간다. 과거엔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귀한 가문의 여식이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당당한 한 명의 무인이 되어 간달까?

“넌 청룡단에 들어가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응! 열심히 하려고! 지금도 강호의 선배분들한테 많이 배우고 있어! 무림맹에 온 첫날에는…….”

당옥정이 재잘재잘 말을 이어 나간다.

무림맹에 와서 뭘 했고, 뭘 먹었으며,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미주알고주알 전부 털어놓는다.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비무를 했는데,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느낄 수 있었어. 장룡 네가 알려 준 뇌공검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달았달까? 정말 대단해!”

“네가 노력한 거지. 아무리 좋은 무공이라도 익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넌 재능이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후후후……!”

당옥정은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김을 흥, 내뿜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비무할까?”

“비무……?”

긴장한 표정의 당옥정.

“그래. 우리 옥정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직접 봐 줘야지. 육 성에 올랐다며?”

꿀꺽.

당옥정이 침을 삼킨다.

“우리 옥정이……?”

“왜 싫어?”

“아, 아니! 싫긴! 당연히 좋지!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최선을 다할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여 주고 싶어. 다 보여 줄 거야.”

이글이글 타오르는 당옥정의 눈빛.

“그래, 그래.”

뇌공검법의 육 성이라면 이제 슬슬 ‘뇌전’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단계다.

그녀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 * *

비무가 끝난 후.

당옥정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단목장룡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이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의 격차는 하늘과 땅이라고 말할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칭찬받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옆에 다가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매일 수련에 열중했으니까.

‘제법…….’

단목장룡은 오늘 비무에서 살짝 놀랐다.

너무도 빠른 성장. 당옥정의 재능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재능이 출중한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여 준 그녀의 무위는 상상 이상이다.

정직하게 뇌공검법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암기술이나 독공을 적절히 섞어 활용했다. 아마 독봉 당용아의 가르침이 있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식의 연계가 깔끔하면서도 영리했다.

당옥정은 피나는 노력으로 용봉지회 때보다 훨씬 발전한 것이다.

“대단하네. 이렇게 빨리 성장할 줄은 나도 몰랐어.”

“와……!”

단목장룡의 평을 기다리던 당옥정.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환호한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당옥정을 보는 단목장룡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그래도 조금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

당옥정이 다시 긴장한 얼굴로 단목장룡을 응시한다.

“보법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아.”

“보법? 내 보법이 이상한가……?”

“네가 잘못 익힌 것은 아니야. 단지… 네가 싸우는 방식에 알맞은 보법이 떠올라서 말이야. 암기를 자주 활용하게 됐으니까 그에 맞는 보법을 사용해야겠지.”

당옥정이 입을 떡 벌린다.

그걸 비무하던 중에 떠올렸다고? 역시 단목장룡은 무공의 천재였다. 내당주인 당용아나 사천당문의 가주마저도 초라해지는 천재.

“많이 수정하는 것은 아니고, 암기를 활용할 때 사용하는 구결 정도만. 하루 정도 더 연구해 보고 알려 줄게.”

“응! 알겠어. 열심히 익혀 볼게!”

이번에 단목장룡에게 새로운 보법을 배운다면, 얼른 그것을 익혀 그를 또 놀라게 하리라. 단목장룡의 칭찬을 또 듣는다면? 상상만으로 짜릿하다. 얼른 배우고 싶었다. 하루를 기다리는 것이 고역일 정도로.

기대 가득한 당옥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단목장룡이 툭 말한다.

“땀을 많이 흘렸네.”

당옥정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응, 돌아가서 바로 목욕하려고.”

“같이할까?”

“응……?”

순간 단목장룡의 장난을 이해하지 못한 당옥정이 고개를 갸웃한다.

조금 더 장난기가 오른 단목장룡.

“예전에 만독전에서 같이 목욕한 적이 있잖아.”

“그, 그, 그건… 대법 때문에……!”

“으음, 같이하기 싫은 거야?”

“그게… 그러니까… 싫은 건 아닌데…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까 조금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절대 싫은 건 아니야! 그냥…….”

말을 하다 무언가 결의를 다진 듯 아랫입술을 깨문 당옥정.

그녀가 외친다.

“정말 네가 원한다면 같이……!”

“장난이야.”

“…….”

단목장룡은 조금 미안했다.

당옥정이 저리 진지하게 같이하겠다고 말할 줄 몰랐다. 솔직히 사내로서 혹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아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붉어진 그녀의 얼굴.

“이… 이……! 바보 장룡!”

그녀는 그렇게 빽 외치고 후다닥 도망갔다.

단목장룡은 바보라는 깜찍한 말에 그녀가 달려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다.

‘…반응이 귀여워서 자꾸 장난치고 싶어지는군.’

그래도 너무 과한 것은 좋지 않았다.

그녀의 진심을 희화화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걸 주고 옥정이의 기분을 풀어 줘야겠네.’

단목장룡은 암천제에 참가하려 해남도에 갔을 때, 그녀를 위한 선물을 샀었다.

직접 만나서 주려고 간직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당옥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단목장룡의 감각에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남궁일몽과 설비연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