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은밀한 모략
폭풍보행(暴風步行) 모용궁수.
비선당주의 이름이다. 그는 당주 급의 직위에 오른 인물이니만큼 능력은 확실했다. 개인적으로 무림맹이 과거 창맹해야만 했던 그 의지와 목적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현 무림맹의 능력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엔 정파 무림이 공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오랜 평화가 지속되었기에 정파 전체보다는 소속된 문파나 가문에 힘을 더 실어 주려는 것이다. 그것이 나쁘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할 뿐.
내가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의 보상을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조원들은 비선당주에게 여러 지식을 배울 수 있게 됐다.
중원 무림에 대한 큼직한 역사부터 시작하여 정보를 활용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법까지. 지금 당장은 쓸데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비선당주와 같은 거물과 연을 맺는다는 것도 긍정적인 요소였다.
조원들 또한 비선당주와 연을 맺는 것이 아주 큰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에게 열심히 배우는 중이었다. 배우려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기에 비선당주도 조원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어떤 선배들은 후배의 성장을 경계하기도 한다.
언젠가 자신을 추월하게 된다면,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선당주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이게 다 천응이 덕분이군.’
그리고 천응이의 전서구 사건으로 또 하나 얻은 것이 있었다.
탁상 밑에서 그것을 꺼낸다.
두루마리였다.
평소 비선당에서 사용하는 종이와는 재질이 다르다.
여러 단체를 추측할 수 있었지만, 난 이것이 은영전의 서신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은영전.
맹주 직할부대로, 특급의 정보만을 다루는 무림맹주의 검이자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은영전이 움직이는 것은 무림맹주가 직접 지시를 내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비선당보다 한 차원 높은 집단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들 또한 천응의 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전서구들은 천응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서신을 전달해야 하는 본연의 임무를 잊은 채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몇몇 전서구들은 천응이 잡아먹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과정에서 두루마리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어디서 전서구를 보냈는지는 당연히 서신에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글의 내용을 보면 글을 보낸 장소를 유추할 수 있다.
‘산동성 제남.’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산동성 제남에 자리 잡은 양씨세가에서 과거 강호를 뒤흔들었던 무공 파천뇌음후(破天雷音吼)를 손에 넣었다는 정보였다. 비선당에서도 아직 알지 못하는 정보였다. 뭐, 시간이 지나면 차츰차츰 퍼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파천뇌음후라…….’
양씨세가는 음공에 대해서라면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거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왜 오대세가에 들지 못했느냐고?
음공이라는 것은 몹시 제약이 많다.
단지 검이나 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적당한 수준의 무공서와 재력이 있다면, 이류 수준의 무인을 키워 내는 것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음공은 다르다.
악기를 잘 다루는 것은 검이나 주먹을 다루는 것처럼 체계적인 가르침이 있다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그것이 무공으로써의 가치가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아무리 악기를 잘 켜도, 적이 도망치지는 않는다.
슬픈 가락을 연주하더라도 전혀 무공으로써 효율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어 밤중에 도둑이 담장을 넘었다고 치자. 그에게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효과적이겠는가, 아니면 악기를 휘두르는 것이 효과적이겠는가?
아마 대부분 사람의 경우 후자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음공이라는 것은, 어떠한 무공보다 재능이 중요시된다.
높고 낮음, 길고 짧음. 거기에다 기(氣)를 음에 담아야 한다. 진입장벽이 너무도 높은 무공이다. 그렇기에 양씨세가가 중원 전체를 따져도 음공에서는 제일이라 하지만, 오대세가에 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파천뇌음후…….
무음검향(無音劍香). 한 시대를 풍미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초고수의 별호다.
그에게 음공에 한해서만큼은 고금제일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누구 하나 이견이 없었다고 한다. 파천뇌음후는 무음검향을 화경의 고수로 만들어 준 무공이었다.
음공을 더 효과적으로, 파격적으로,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무공. 당대에 그와 싸웠던 고수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파천뇌음후는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경지가 같다면, 일대일로는 무음검향을 이길 사람이 없다고 말이다.
내가 왜 그렇게 잘 아느냐고?
파천뇌음후라는 무공은 천마신교의 비동에 있었으니까.
‘꽤 신선한 무공이긴 했지.’
온갖 문파의 절기를 살펴본 내 입장에서도 상위급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무(武)를 논하는 방식이 평범한 무공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무영신투의 무영혼처럼 아예 자연의 섭리를 부정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 무공이라면 세인들이 절세 무공 중 하나라고 칭하는 것도 이해가 될 수준.
아무튼, 그 무공이 양씨세가의 손에 있다는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신교의 손이 양씨세가에 닿았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육합문이나 지룡문이 신교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양씨세가는 다르다. 오대세가가 아니더라도 산동성에서 그들의 힘은 상당했으며, 신교의 지원을 받는다면 더욱 빠르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해야 할까?
파천뇌음후라는 무공이 신교가 가지고 있었다는 소문을 흘릴까? 그렇다면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무림의 관심이 양씨세가로 쏠려 신교 입장에서도 함부로 나서기 힘들어지리라.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다.
신교는 계속 정파 무림에 마수를 뻗어 올 것이다. 한번 뒤집어엎을 때가 되었다.
거기다 양씨세가엔 받을 빚이 있었으니까.
‘슬슬 실전에 임할 때가 되긴 했지.’
남궁일몽과 설비연.
빙정을 흡수한 설비연과 천재성을 입증하며 매일 성장 중인 남궁일몽. 동시에 두 사람을 상대하는 비무는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들이 성장하는 만큼 나 또한 성장하고 있었다. 일정 수준에 오른 이들과 무공으로 부딪치는 건 가장 효율이 좋은 무공 수련이다.
거기다가 나는 천응이 있었다.
말을 타거나 경공을 펼치더라도 오가는 데 꽤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천응의 등에 올라타서 날아간다면… 거리의 제약이 거의 없어진다고 해도 무방하다. 실상 중원 무림에서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을 갖추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일 바로 출발해야겠군.’
결정을 내렸으면, 확실하게 처리한다.
신교의 행사에 거하게 찬물을 끼얹어 주리라.
* * *
양씨세가.
그들은 산동성에서 황보세가와 함께 최고의 명문가로 손꼽히고 있었다. 거기다 음공이라는 흔치 않은 무공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만큼, 세인들은 양씨세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언젠가 무음검향 수준의 고수를 배출한다면, 황보세가를 제치고 산동성의 패자가 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양씨세가는 예전부터 굶주려 왔다.
음공이라는 특별한 무공을 익힌다는 자부심도 있다. 하지만 익히면 익힐수록 음공의 난해함에 학을 떼기도 했다.
양씨세가의 핏줄은 대부분 악기를 다루는 재능이 특출 났으나 그것이 꼭 음공과 연계되는 것은 아니다. 특출 난 몇 사람만이 음(音)과 무공을 연계할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혈통을 이어 온 양씨세가라도 그런 이들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
명색이 무가(武家)였지만, 무력으로는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수준.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걷고 있기에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그 자부심만큼 실력이 받쳐 주진 않는달까?
문제가 무엇일까?
그들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무공을 개선한다! 그래도 안 된다면 창안한다!’
전전대 양씨세가의 가주는 그들의 절기인 천지암혼곡(天地暗昏曲)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원에서 음공의 대가라 불렸던 이들의 음공은 양씨세가의 것과 결을 달리했다. 상대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에 목적을 둔 양씨세가의 무공. 천지암혼곡(天地暗昏曲)을 대성하기 위해선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이 필요했다.
익힐 수 없다면, 바꾼다.
선조가 물려줬다고 하여 그것이 꼭 정답일 것이라는 것은 오만이며 착각이다. 그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이 다른 무공서를 탐독하여 음공에 적용하는 것.
그러한 전전대 가주의 시도는 파격적이긴 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진 못했다. 음의 재능이 부족한 이들에게 알려 줄 검법이나 장법 등은 정립할 수 있었어도, 막상 중요한 음공은 전혀 손대지 못했다.
무공을 창안하는 것엔 대종사의 자질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양씨세가에선 그런 인재가 나타나지 않았다.
현 양씨세가의 가주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결과가 없었다. 애초에 음공에 조화될 만한 무공서를 찾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왜 무공서가 비급이라 불리겠는가? 막대한 돈을 주고서도 쉽사리 구할 수 없었다.
악명 높은 마교처럼 다른 문파의 것을 강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에 마땅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양씨세가의 당대 가주인 양몽산은 포기하려 했었다.
‘저 사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지!’
양몽산의 입이 찢어진다.
식사 자리엔 백옥과도 같은 피부를 가진 미공자와 늠름한 체격의 중년인이 함께 있었다.
미공자의 이름은 천우생.
최근 감숙성에서 세를 떨치고 있는, 육합문의 소문주였다. 처음 육합문이라는 듣도 보도 못 한 이름을 접했을 땐 명성을 얻고자 양씨세가에 아첨이나 하는 작은 문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 달라졌다.
개방을 통해 육합문에 대해 알아보니 감숙성에서 빠르게 세를 확장하는 중이었고, 소문주인 천우생은 대단한 실력자였다. 아마 더 시간이 지나면 무림오룡의 이름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천뇌음후라니!’
이미 파천뇌음후의 전반부를 필사한 사본을 받아 확인했다. 양씨세가의 장로진과 가주가 분석한 결과 그것은 진본이 분명했다.
육합문에서는 파천뇌음후를 양씨세가에 팔려고 왔다.
하지만 그런 무공에 값을 매길 수 있겠는가?
오랜 기간 협상했지만, 결국은 양씨세가에 팔지 않고 강호에 공표하여 정당한 값을 치를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렇게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협상이 극적으로 반전하게 된 계기는…….
육합문의 소문주와 양씨세가의 여식인 양주아의 만남 이후였다.
천우생은 알게 모르게 양주아를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양몽산은 이것을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강호 무림에서 혼인이라는 것은, 결국 가문과 가문의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육합문의 성장세를 보면 양씨세가가 절대 밑지는 거래가 아니다.
양몽산은 그때부터 천우생을 떠보며 협상의 방향을 바꾸었다.
단순한 거래를 넘어서 한 문파와 가문이 혈연으로 맺어지는 잔치로 말이다.
“천 공자, 요즘 주아랑은 좀 친밀해졌는가?”
“하하하… 제가 워낙 그런 경험이 없어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하하하! 여인의 마음을 잡는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지. 무공을 익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걸세.”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천우생.
저런 유약한 모습도 마음에 든다. 분명히 여자깨나 울렸을 법한 외모인데, 유약한 심정을 보유한 듯하다. 만약 사내대장부와 같은 강직함이나 야심을 보였다면 양몽산이 혼인을 추진하는 것을 고민했을 수도 있었다.
육합문에 양씨세가의 패권을 야금야금 빼앗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천우생의 성정으로 보건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문끼리의 약조이니 당연히 혼인은 성사되겠지만, 그래도 부부의 연으로 백년가약을 맺어야 하는 사이니 미리 많이 알아 갔으면 좋겠네. 주아 또한 사내의 경험이 없으니 자네가 이끌어 줘야 한다네.”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천우생.
“예… 더 노력하겠습니다.”
천우생의 자신감 없는 답변.
양몽산이 흐뭇하게 웃는다. 사실 양주아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천우생과 일정 거리를 두라고. 서로 원하는 것이 있는 혼인이지만, 양씨세가가 갑이 되어야 한다.
양주아는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혼인을 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중원 무림.
강호는 그런 곳이었다.
“참, 육합문의 문주께서는 언제쯤 도착하시는가?”
육합문의 문주가 오면, 확실하게 혼인이 이뤄진다.
파천뇌음후 또한 양씨세가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으으음……. 예상하기로 내일 정오엔 도착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천우생의 말에 양몽산이 흐뭇하게 웃는다.
“그렇군! 내일은 모두 함께 식사하도록 하지. 문주께서 직접 오셨으니 거하게 잔칫상을 준비토록 하겠네.”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본래 육합문이 갑이 되어야 할 상황.
하지만 천우생은 을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양몽산의 기분을 더욱 좋게 했다. 모든 상황을 자신이 주도하고 있었으니까. 이미 천우생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 * *
유약한 표정을 유지한 채 가주전을 나온 천우생.
그의 얼굴은 자신의 방에 들어오자 마치 가면이라도 쓴 듯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예쁘다고 할 정도로 고운 얼굴. 그렇기에 유약한 표정을 지을 땐 무언가 맹한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을 보면 절대 유약하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차가운 눈빛. 말려 올라간 입꼬리. 아름다운 무늬의 비늘을 가진 독사(毒蛇)가 떠올랐다.
“후우, 저런 멍청한 새끼를 상대해 주는 것도 정말 힘들군. 속아 주는 것도 모르고 자만하여 처웃는 꼴이라니. 배때기에 칼을 쑤셔 넣고 싶어.”
천우생의 말에 옆에 있던 중년 사내가 아부한다.
“한 달만 지나도 대주님의 얼굴만 보아도 오줌을 질질 싸게 될 것입니다.”
피식.
그 모습이 상상된다. 이용당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리고 이번 일로 어떤 보상이 떨어질까?
“후후, 기대되는군.”
살짝 기분이 좋아진 천우생.
중년 사내가 말을 덧붙인다.
“그건 그렇고, 정말 부럽습니다. 대주님, 무림오화라니요. 어제 금을 타는 것을 잠깐 보니 정말…….”
“적당히 즐기면 너한테도 나눠 주마.”
어차피 양씨세가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정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대주님이십니다!”
중년 사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의 계획은 차질 없이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