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목세가의 역대급 망나니-165화 (165/236)

165화 움직이기 시작하는 별

남창의 명문으로 꼽히던 하후세가는, 그저 그런 가문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저력이 있는 집안이니 언제 또다시 부흥할지 모르는 것이지만, 당대에선 그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가주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사파 중 하나인 나찰마궁과 손을 잡았다. 곧 그들이 해 왔던 수많은 악행이 중원 전체에 알려지게 되리라.

중원 무림에서 왜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한번 박혀 버린 인식을 개선하는 것은 웬만한 노력으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후세가는 무리하게 추진한 사업이 워낙 많았으며, 세가의 중심이 되는 사업이 점점 쇠퇴하는 중이었다. 또 단목세가나 비화 표국 등이 당했던 것에 하후세가가 배상해야 한다. 아마 하후세가는 파산하게 될 것이리라.

“나머지는 어른들에게 맡겨 다오.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란다.”

“예, 태상가주님.”

이제와서 맡겨 달라는 것이 미안했지만, 그래도 단목장룡의 손에 피가 묻지 않기를 바라는 태상가주.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태상가주의 시선이 단목장룡의 옆에 있는 갈유화에게 향했다.

“장룡아, 그런데 옆에 있는 여인은 누구더냐? 눈매만 봐도 그 미모가 훤히 빛나는구나.”

씰룩.

복면을 써서 보이진 않았지만, 갈유화는 헤벌쭉 웃고 있었다. 암천회의 소회주라는 신분이 있었기에, 갈유화는 낭군님의 조부께 감히 인사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태상가주가 먼저 저리 물어 오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슬쩍 단목장룡의 눈치를 본다.

“암천회의 갈유화입니다. 혹시 모를 나찰마궁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와 같이 남창까지 왔습니다.”

“……!”

갈유화나 태상가주 둘 다 깜짝 놀란다.

그녀는 적당히 자신의 신분을 속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곧이곧대로 태상가주에게 말할 줄은 몰랐다. 태상가주 또한 암천회의 소회주라는 신분에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허허! 정말 고맙구나. 우리 장룡이를 옆에서 도와준다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마, 아가.”

금방 적응하여 미소를 띤다.

흐뭇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 태상가주. 갈유화는 혹여나 태상가주가 자신을 배척하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아무리 정파와 사파가 평화조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사실 두 세력은 물과 기름이었다. 절대 섞일 수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태상가주는 그녀를 ‘아가’로 칭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단목장룡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갈유화.

그녀가 황급히 복면을 벗는다. 눌린 머리였지만, 어른의 앞에서 복면을 쓰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신한 자세로 깊이 허리를 숙여 태상가주에게 인사했다.

“할아버님, 소녀 갈유화라고 하옵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 영광이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허허허! 내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 참하구나! 우리 룡이와 천생연분이로군!”

“어머나, 아니에요. 제가 공자님과 비교해서 많이 모자란걸요. 더 노력하겠어요, 할아버님.”

“그래, 그래.”

단목장룡은 조금 황당했다. 어차피 무림맹과 암천회 그리고 혈세귀막의 관계는 드러날 것이고, 굳이 태상가주에게 그것을 속일 필요는 없어 갈유화의 정체를 알린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죽이 잘 맞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시간이 더 지나자, 이미 갈유화는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 아이는 몇이나 생각하고 있느냐?”

“전 부군께서 원하시는 대로 낳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룡이가 힘깨나 써야겠구나.”

점점 선을 넘는 두 사람.

단목장룡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연다.

“태상가주님.”

단목장룡의 말에 태상가주가 씨익 웃는다. 그는 단목장룡이 사파의 여식을 만나든, 이름 없는 가문 출신의 여인을 만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과거였다면 사파 여식과의 관계를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상가주는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 손자와 손녀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살았으면 한다. 거기다 단목장룡은 이미 화경의 경지가 아닌가? 그가 말린다고 말려질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얼른 행복한 가정을 이룬 손자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할 것인데 괜한 오지랖을 부렸구나. 하나, 이 할아부지는 유화가 마음에 든다는 사실을 기억해 뒀으면 좋겠구나. 껄껄!”

“어머!”

갈유화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이렇게 상황이 잘 풀릴 줄은 몰랐다.

‘당옥정! 넌 내 밑이야!’

그런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단목장룡.

그가 몹시도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전 나찰마궁을 멸문할 생각입니다.”

“……!”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진다.

이 사건의 진정한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뢰극찰. 그리고 그 뒤에는 나찰마궁이 있다. 그들이 익히고 있는 마정대흡인술(魔精大吸引術)은 위험하다. 뢰극찰은 극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큰 깨달음 없이도 단목세가의 태상가주를 이길 수준에 올랐다. 균형에 맞지 않는 무공이었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무공이란 그런 게 아니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났다면, 뢰극찰은 천하의 광인이 되었으리라.

정신이 육신을 따라가지 못했으리라.

“룡아, 설마 혼자서 나찰마궁과 싸우겠다는 말은…….”

“필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단목장룡에겐 천응이 있었다.

홀로 활약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

아무리 화경에 오른 손자라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장성한 손자. 그가 위험에 처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걱정된다고 말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무인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법. 태상가주는 그것을 말릴 수 없었다.

“그렇더냐……. 그래, 네 선택이 그러하다면 응원하겠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편히 말하거라.”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찰마궁은 넘어야 할 산에 불과했다.

어차피 세력 구도는 명확해지고 있었다.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혈세귀막이나 암천회에 그러했던 것처럼 나찰마궁에 손을 뻗진 않으리라.

그리고.

‘이미 나찰마궁은 신교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교는 적극적으로 중원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나찰마궁은 신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집단.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남의 정기를 갈취하는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 마교와 손을 잡는 것은 고민 축에도 끼지 못하리라.

“태상가주님께선 몸을 추스르셔야 합니다. 제가 본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태상가주에겐 천응의 존재를 밝힐 의향이 있다.

어차피 언젠간 드러날 존재였다. 그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었기에 가문으로 돌아가서 정양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지만 태상가주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난 이곳에 있어야겠다.”

“태상가주님.”

“걱정하지 말아라. 이곳에서 쉬나 세가로 돌아가서 쉬나 크게 다르지 않아. 난 이곳에 남아 하후세가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구나.”

이것도 어찌 보면 단목장룡을 위해서였다.

혹시 모르지만, 하후세가가 애먼 단목장룡에게 복수심을 품을 수도 있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늘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하후세가의 식솔들을 모두 처형할 수도 없으니 단목세가의 태상가주가 이곳에 남아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유화란 아이가 정말 참하구나. 싹싹한 것을 보니 내조를 정말 잘하겠어. 골반이 넓은 것을 보니 아이도 순풍순풍 잘 낳을 것 같구나.”

은근한 목소리로 단목장룡의 귀에 속삭이는 태상가주.

“꺗!”

옆에서 묘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태상가주가 무거운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말임을 단목장룡도 알고 있었다.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허허, 사내와 여인 사이엔 친우 사이는 없다는 걸 잘 알아 두거라. 나도 네 조모를 처음 만났을 땐 말이다…….”

뜻하지 않게 조부의 연애 이야기를 듣게 된 단목장룡.

갈유화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 * *

한 달 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던가? 하후세가는 바로 망해 버리거나 하진 않았다. 규모가 큰 사업장을 단목세가나 비화 표국에서 인수해 주었기에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본래 하후세가 전체가 악덕한 가문은 아니었다. 하후세가가 남창의 명문으로 꼽힐 수 있었던 건, 모두 성실한 식솔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들은 하후세가의 가주가 뒤에서 악행을 벌이는 것을 전혀 몰랐다.

태생부터 의협심이 투철한 정파인으로 살아왔던 그들은 가주의 행동에 부끄러워했으며, 하후세가가 완전히 몰락해 버리지 않게 도와주는 단목세가의 태상가주에게 존경심을 품었다.

어쩌면 하후세가는 이제야 진정한 정파의 문파로 거듭났다고 할 수도 있었다.

혹독한 고난 속에서 더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고 했던가?

세대가 지날수록 하후세가의 이번 사건은 교훈이 되어 그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해 주리라.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규모가 작아진 하후세가.

그들의 의지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중원 전체에서 비난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꿋꿋이 견뎌 내고 다시금 세상에 발을 내디딜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가려고 하느냐.”

“예, 태상가주님. 이제껏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후예민.

그녀는 처음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기다렸다. 단목장룡이 자신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냥 그녀를 무시하듯 떠나 버렸다.

‘난 손을 더럽힐 수준도 아니로구나.’

그녀는 자결을 결심했다.

이렇게 살아서 의미가 있겠는가? 이번 삶은 완전히 망해 버렸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패륜. 하후세가를 몰락하게 만들 뻔했던 잘못. 그것을 참회하려면 죽음으로밖에 속죄할 길이 없었다.

하나, 그녀는 죽지 못했다.

죽음의 순간, 그녀의 코에 음식 냄새가 스쳤다.

순간 터져 나오는 역겨움. 그녀는 먹은 것이 없는데도 헛구역질을 하며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흐으으윽……!”

그녀는 가장 저주하는.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 간.

그 사내의 아이를 배 속에 품게 되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 하얗게 변한다.

왜 지금 와서? 목에 칼을 찌르려는 순간에 헛구역질이 올라온단 말인가? 차라리 목을 찌를 때까지 몰랐다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멀찍이 서서 하후예민을 지켜보던 태상가주가 나타났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후예민은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였으며, 결국 그날 하후예민은 자결하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난 뒤.

하후예민은 초췌했지만, 과거처럼 넋을 놓고만 있진 않았다.

“아미산에서의 생활은 속세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게 아이에게도 좋겠지요.”

묘한 웃음.

그녀는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움 감정에 기반한 웃음이 아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태상가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을 올린 하후예민은 단출한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후우.”

솔직히 걱정된다.

하후예민은 번뇌를 이겨 낼 수 있을 것인가? 뢰극찰의 씨를 받아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 낼 수 있을 것인가? 아미산에서의 생활은 속세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특히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에겐 더욱 엄격한 곳이다.

‘순리대로 잘 풀어 나가길 바랄 수밖에 없구나.’

이 선택은 하후예민을 더한 지옥도로 밀어 넣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녀에게 평온을 가져다주는 선택일 수도 있다.

단지, 아이에게만은 행복한 앞날이 있길.

언젠가 하후예민도 고통 속에서 벗어날 날이 오길 기원할 뿐이었다.

* * *

광동성 광주현.

정파 무림에 무림맹이 있다면, 사파엔 사마련이 있다.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는 사마련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백성들은 굶주리지 않았으며.

사파인들은 이곳을 사랑한다. 힘과 자유를 추구하는 사파인들에게 광주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사마련에서는 광주의 치안을 담당하며 약자들을 보호했고, 강자들이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

정파는 의롭고 사파는 악하다는 개념은 누가 만들었던가?

사파의 지배자 사마련주 사마백혼은 황제가 되었다면 위대한 성군이 되었으리라. 암천회주나 혈세귀막주 같은 인물들이 사마련주의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자존심 강한 두 사내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마백혼의 시대가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역사가 증명해 왔듯.

가장 높이 오른 자는, 결국 내려와야 하는 것이 이치였다.

지금 당장도 암천회와 혈세귀막은 다른 마음을 품었다.

사마련이 마교와 결탁한 것이 사실이라면, 사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사마련의 평화는 깨지고 말 것이다.

사마련주 사마백혼은 그 변화의 물결을 아주 잘 느끼고 있었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구나.”

옥을 깎은 듯 반짝이는 피부.

곧은 콧날.

자애로운 눈빛.

그의 외모는 무공의 경지만큼 절정에 올라 있었다. 옅은 바람에 찰랑이는 머릿결을 보고 있으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게 진정으로 네가 원하는 것이더냐.”

사마백혼이 문득 뒤를 돌아본다.

그의 뒤에는 가면을 쓴 사람이 서 있었다. 사마련의 지배자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었다. 사마련주는 드물게도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가면을 마주했다.

- 나찰마궁주 그 괴물이 분노하여 날뛰게 될 겁니다. 련주께서 직접 그를 죽이지 않는 이상 막을 수 없겠지요.

“령아.”

가면이 침묵한다.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강렬한 눈빛.

- 저와의 약조를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것이다.”

가면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떠나간다. 사마련주에 대한 존경이나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사마련주는 분노는커녕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다시 웃을 수 있다면… 그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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