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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목세가의 역대급 망나니-167화 (167/236)

167화 궁주의 조용한 분노

장로들의 그러한 두려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엔 단목장룡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화경’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맴돌기 시작한다. 꿈의 경지. 정파 무림에서도 고작 여섯 명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지고한 경지.

“그, 그게 사실이더냐……?”

단목세가의 가주 단목무광의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화경은 무인에게 하나의 꿈이었다. 애초에 그 바로 아래 단계인 초절정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으로 여기고 있는 무인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화경이라? 단목세가에서? 그것도 자신의 아들이?

단목무광의 감정이 주변 장로들에게도 퍼져 나간다.

“저, 정말인가……!”

“화경? 정말 화경이라고?”

“예, 맞습니다.”

“……!”

가주와 날을 세우며 설전을 벌이던 일 장로 단목자우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허튼소리를 하면 호통을 쳐 주겠다는 마음은 이미 말끔하게 지워졌다. 자신이 가문의 어른이라고 하지만, 화경의 고수를 혼낼 수는 없었다. 거기다 그가 정말로 화경이라면…….

그들이 걱정하던 나찰마궁의 궁주가 직접 오더라도, 막아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따지고 들면 화경이라는 경지에서도 그 수준이 다르며 어떤 무공을 익혔느냐에 따라 상성이 나뉘는 부분이 있었지만… 지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틈은 없었다.

“허허… 허허허허!”

“화경이라니! 우리 단목세가에서 화경의 고수가 탄생하다니……!”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단목장룡이 장로들에게 보여 줬던 그 기세. 눈빛만으로 장로들은 압도당했다. 거기다 대고 정말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 사실이냐 따질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사천 지부로 떠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목장룡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 죽음을 상기하던 장로들의 머릿속에 희망이라는 꽃이 피어났다.

* * *

“아까는 장로들이 있어서 묻지 못했다. 하나 물을 수밖에 없구나. 나찰마궁주가 직접 온다면 네가 막아 낼 수 있겠느냐?”

“예, 막을 수 있습니다.”

단목장룡의 대답에 가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 줘야 한다. 의심은 의심을 낳을 뿐. 애초에 단목장룡을 의심해서 무엇이 좋으랴? 사실 소가주 자리를 단목청야에게 물려준 것이 못내 미안한 가주였기에 더 따져 묻지는 못했다.

가주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챈 단목장룡이 말을 이어 나간다.

“아마도 나찰마궁주는 이곳에 오지 못할 겁니다.”

“오지 못한다고?”

“저와 연이 닿은 고수가 그를 막아 주기로 했습니다.”

나찰마궁주를 막을 수 있는 고수라면, 육왕 정도일 것이다.

단목장룡은 벌써 육왕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건가? 거기다 육왕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들은 명문거파의 수장들. 보통 문파나 가문을 나서지 않는다. 단목장룡은 언제 또 그런 대단한 무인들과 연을 맺었단 말인가?

“그것이 대체 누구더냐? 무당의 장문인이더냐?”

“육왕이 아닙니다.”

육왕이 아니다?

그럼 대체…….

“암천회의 회주입니다.”

“……!”

암천회의 회주?

대체 그가 왜……?

단목장룡이 가주가 적당히 이해할 수 있게끔, 중원 무림에 마수를 뻗는 마교 그리고 무림맹의 대응에 대해 설명해 준다. 그 과정에서 혈세귀막과 암천회와 조약을 맺은 사실까지 말이다.

가주는 아들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떤 무인이든 무공을 처음 접할 땐, 강호를 떠돌며 온갖 고수들과 연을 쌓으며 종횡무진할 것을 꿈꾼다. 하지만 언젠간 현실의 벽을 마주하게 되고, 꿈은 꿈으로 남게 될 뿐이었다.

그런데 암천회라니.

혈세귀막의 막주와 직접 교섭하여 조약을 맺었다니? 그들은 평범한 무림인이 평생 가도 얼굴 한 번 마주할 수 없는 중원 무림의 패자(覇者)들이었다.

‘이 아이는…….’

단목장룡이 왜 소가주 자리를 거부했는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처음엔 과거 가문에서 당했던 취급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그는 애초에 단목세가의 소가주라는 자리로 붙잡아 둘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는 잡을 수 없이 높이 날아오른 아들의 말.

가주 단목무광은 자연스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 * *

꿀꺽.

나찰궁의 최상층. 궁주 뢰마유를 마주한 대존자가 긴장으로 침을 삼킨다. 나찰마궁주가 가장 두려울 땐, 화를 낼 때가 아니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할 수 없을 때였다. 나찰마궁주는 암천회에서 온 서신을 읽고 거의 반 시진 동안 침묵할 뿐이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대존자는 감히 그것을 묻지 못했다.

단지 궁주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

나찰마궁주가 침묵을 깬 것은, 반 시진하고도 일각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단목장룡이라는 놈이 장천이라는 이름으로 암천제에서 우승했다고 했었나?”

“예, 궁주님.”

뢰마유의 눈빛에 대존자의 몸이 벌벌 떨린다.

“갈천능이 그놈을 좋게 보고 있는 듯하군.”

툭.

무언가 대존자의 얼굴을 찰싹 때린다. 기겁하여 소리칠 뻔했던 대존자였지만, 겨우 그것을 참아 냈다. 황급히 뢰마유가 던진 서신을 펼친다.

꽤 긴 글이었지만, 요약하자면 이랬다.

- 단목세가와 대립하지 말 것. 만약 경고를 무시한다면 본좌가 나찰궁에 방문할 것이다.

경고였다.

단목세가와 싸우지 말라는 경고. 나찰마궁주가 직접 단목세가로 이동하면, 암천회주가 나찰궁으로 오게 될 것이다.

사실 나찰마궁주는 어릴 적 암천회주에게 크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둘 다 극마에 올랐기에 자웅을 겨뤄 보진 않았지만, 세간의 평은 나찰마궁주가 암천회주에겐 안 될 것이라는 의견이 팽배했다.

당연히 나찰마궁주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건방진 놈.”

뢰극찰이 죽은 것은 당연히 안타깝다.

그는 마정대흡인술을 익히는 재능이 뛰어났으니까. 한계가 있다곤 하지만, 언젠간 궁주의 자리에 오를 자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자신의 자식이라도, 궁주 자신보다는 소중하지 않았다.

감히 자신을 무시한 암천회주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이라도 놈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 애송이 놈은 아마 의창 본가에 있겠지?”

“그러리라 예상됩니다.”

“삼대 존자에게 단목세가의 본가가 아닌 지부를 공격하라 명해라. 모조리 찢어 죽여라. 그들의 목을 잘라 놈들의 지부 정문에 전시하도록 해라.”

“예, 궁주님!”

대존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궁주 앞에서 토를 다는 것은 당장 혀를 뽑아 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왜 궁주가 저런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찰마궁주는 기다리려는 것이다. 암천회주가 직접 나찰궁에 오는 것을.

“그래, 평화가 길긴 했지. 슬슬 그쪽도 움직이고 있으니…….”

나찰마궁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랜만에 보신을 해야겠다.”

“예, 궁주님. 바로 준비해서 방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나찰마궁주의 눈이 순간 푸른빛을 발했다.

다른 이들의 생명을 갈취하여 얻은 내력. 그 방대한 내공이 눈에 깃들어 표출되고 있었다.

온갖 실험을 통해 거의 완성에 도달한 마정대흡인술(魔精大吸引術). 뢰극찰이 그 패륜의 무공에 재능이 있는 것은 맞았지만, 궁주와 비교할 순 없었다. 그는 애초에 무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거기에 마정대흡인술을 익힌 몸이었다.

천 년.

중원의 그 누구보다도 방대한 내력을 가진 나찰마궁주가 또다시 내력을 채우려 하고 있었다. 곧 일어날 싸움을 위해서.

‘단목장룡, 네놈은 갈천능 다음으로 죽여 주도록 하지.’

원래 적당히 단목세가에 겁을 준 다음, 그가 직접 단목세가로 가려 했다.

하지만 암천회주의 개입에 그 계획이 조금 틀어져 버렸다.

그 결정이 나찰마궁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 * *

“그러니까… 아니, 이게 무슨… 네가 직접 이걸 모두 수정했단…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하는 단목세가의 가주.

당연했다. 단목세가의 무공은 실로 방대하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수정하고 발전시킨 무공. 이것엔 선조들의 피와 땀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 더는 수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태상가주조차도 그렇게 생각다.

하지만 단목장룡이 내놓은, 말끔한 서적들.

표지에 적힌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낙성십이검(落星十二劍).

팔십일식유성환상검(八十一式流星幻像劍).

금성권(金星拳).

모두 단목세가의 무공이었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어 훑어보던 단목무광은 어느샌가 깨닫고 말았다. 단목장룡이 내놓은 서적은, 본래 단목세가의 무공보다 훨씬 발전된 무학이었다. 약점이라 생각하지 못한 약점이 없어졌고, 무공이 추구하는 방향에 더 가까워졌다.

따지자면 명문거파의 절세 무공을 보는 듯하달까?

그 유명한 화산파의 매화검법. 구결을 읽어 본 적은 없었으나 단목장룡이 내놓은 서적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본가의 무공을 가주님의 허락도 없이 수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이건 죄송할 일이…….”

맞나……?

사실 가주의 허락 없이 무공을 바꾸는 것은, 엄벌에 처할 일이었다.

단목세가의 무공은 공동의 것이다. 거기다 무공의 구결을 함부로 수정하여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뭔가?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낙일선륜보다 더 뛰어나지 않은가?

사실 단목장룡이 최선을 다해 수정한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보완할 점을 보완했을 뿐. 그것만으로도 가주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말이다.

“제가 수정한 무공을 활용하여 단목세가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왜 이런 결정을 했나?

첫째로 단목장룡은 단목세가의 무공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했다. 그렇기에 단목세가에 언젠간 이런 식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 두 번째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이번 일처럼 단목장룡이 모두 나서 하나하나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단목세가 자체의 힘이 강해지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어진다. 또, 단목장룡 또한 가문의 힘을 빌릴 수 있기에 서로 득이 되는 것이다.

“전 한 달 동안 가문에 머물 겁니다. 암천회주께서 막아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혹시 일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 그래. 네가 원한다면야…….”

이미 무공서에 홀딱 빠져 버린 가주.

그도 가주이기 전, 누군가의 아버지이기 전에 무림인이었다.

무인들은 무공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무공서의 위치가 그려진 장보도가 나타났을 때, 혈겁이 일어나는 이유도 모두 무림인의 무공 욕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허락하신다면 한 달 동안 가주님께 제가 수정한 무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가주의 눈이 번쩍 뜨인다.

무인들은 고수에게 가르침을 청하곤 한다. 하지만 모든 고수가 하수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수가 고수에게 함부로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찌 쉬우랴?

그런데 단목장룡이 저렇게 말해 주니 참으로 고마웠다.

“그래 줄 수 있겠느냐……?”

“예, 당연하지요.”

단목장룡의 시원한 대답에, 가주는 함박웃음을 짓는다.

평소 위엄을 갖추려 험악한 얼굴을 하고, 매번 꼿꼿이 허리를 폈던 가주의 모습은 없었다. 단지,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고마워하는 아버지가 있을 뿐이었다.

단목장룡은 그런 단목무광의 시선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묘한 기분이군…….’

문득, 처음 그와 마주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와는 확실히,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 * *

단목장룡이 약조한 한 달에 가까워질 무렵.

첫째 부인 백예령은 매일 불안에 떨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미 소가주가 된 자신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식솔 모두가 단목장룡의 이름을 언급했다. 심지어 가문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장로들까지 말이다. 장로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일 장로까지 가주에게 가서 단목장룡이 소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까무러칠 뻔했다.

단목장룡이 소가주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막상 단목장룡이 소가주가 되겠다고 하면, 그녀로선 막을 길이 없었다. 비화 표국도 그 덕분에 성장했으며, 하후세가의 일도 단목장룡 덕에 해결했다. 거기다 화경이라니…….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아…….’

단목세가에서 단목장룡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그녀의 마음 또한 그 무게를 더해 갔다.

그렇게 첫째 부인이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걸음을 옮기다 장원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정말 우연히 단목장룡과 마주했다. 과거엔 이러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가 너무도 불편했다. 함부로 말을 놓아서도 안될 것 같은 기분.

“어, 어머낫, 장룡… 군.”

“안녕하십니까.”

“그, 그래……! 호, 호호호호……! 바, 밥은 먹었니?”

“예.”

단목장룡은 그녀가 불편해한다는 걸 알았기에 인사하고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단목 공자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손님이라는 말에 첫째 부인 또한 자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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