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대허 선사
대허 선사는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
정파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 방장. 소림사는 수많은 백성의 정신적인 지주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정파인이라 할지라도 무림인들은 백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그들은 딱히 패악질을 부리지 않더라도 검 하나로 작은 마을을 몰살할 수 있었다. 언제든 마음이 내키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했으며, 조금만 말실수를 해도 사문을 욕보였다며 검을 뽑는 일도 부지기수다. 일반 백성들에겐 무림인들은 조심해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소림사의 방장은 다르다.
예로부터 불가는 살생을 멀리하고 민생을 보살펴 왔으니,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소림사다. 대허 선사는 그 불가의 최고 수행자였다. 그렇기에 이토록 많은 이가 소림사에 방문하여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리라.
대허 선사는 무림인이라기보다 덕을 쌓은 고승이었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독봉 시주.”
“예, 방장님. 절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에요.”
“허허,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소림의 방장 대허 선사와 독봉 당용아가 인사를 나눈다. 눈치를 보아하니 서로 안면이 있는 모양이다. 당용아는 오대세가인 사천당문의 이인자였으니 소림상의 방장과 안면이 있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군.’
단목장룡은 대허 선사를 보고 조금 놀랐다.
그의 기세가 대단해서 놀란 것은 아니다. 그의 기세는 딱히 특별하지 않았다. 소림사의 방장이라 그런지 다른 이들에게 전혀 위압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단목장룡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놀란 이유는…….
‘화경에 올랐음에도 저리 늙은 모습이라…….’
듣기로 대허 선사는 아직 백 살을 넘기지 않았다.
애초에 중원에서 백 살을 넘게 살아가는 이가 극히 드물었지만, 무공의 고수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기대 수명이 아주 높았다. 특히 화경의 고수들은 이백 년도 거뜬히 살아간다고 한다.
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가?
그것은 환골탈태에서 따라오는 반로환동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는 점차 늙어 가지만, 환골탈태는 새로운 육신을 얻게 해 준다. 젊을 적보다 더 강인하고 유연한 육신. 무공을 펼치기 가장 좋은 육신은 젊고 활기가 넘치는 나이 때다.
그런데도 대허 선사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조만간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물론 외관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까지 단목장룡이 보아 왔던 화경의 고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환골탈태를 하게 되면 무공을 펼치기 좋은 최적의 육체로 변화한다. 화경에 오르고도 젊어지지 않았다는 것일까?’
저마다 익히는 무공이 다르기에, 환골탈태의 결과도 모두 같다고 말하는 것이 모순이긴 했다. 단지 놀라웠을 뿐이다.
당옥정과 인사를 나눈 대허 선사의 시선이 단목장룡을 향한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방장님. 전 무림맹 흑룡단에 소속된 단목장룡입니다.”
이 자리는 단목세가의 일원으로 온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흑룡단의 단목장룡으로 온 것이다. 현재 그는 혈세귀막에 특사로 갔던 것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찰마궁의 일이 터지고 나서는, 당분간 맹으로 복귀하기 힘들 수 있고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흑룡단주에게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뭐, 무림맹주나 은영전주의 생각이 정확히 어떠한지 알 순 없었으나, 나찰마궁이 선전포고를 한 와중에 무림맹에 당장 복귀하는 것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보통 흑룡단에선 이렇게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조장이 유동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서신으로 보고하고 행동한다. 태초부터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흑룡단이었으니 무림맹의 전투단들과 체계가 조금 달랐다.
“흑룡단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외다. 정사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흑룡단의 활약은 대단했었지. 이리 단목 시주를 보니 그때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든든하외다. 앞으로도 무림의 안녕을 위해 힘써 주셨으면 좋겠소.”
“말씀 감사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다.
기세의 싸움이라 볼 것도 없었다. 단지, 사람과 사람이 대화할 때 눈을 마주하는 것은 당연했으니까. 그러나 당용아와 당옥정은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대허 선사다.
“나찰궁의 괴승을 처단하셨다고 들었소.”
“예, 맞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허 선사.
단목장룡은 그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읽으려 했지만, 기쁨이나 슬픔 따위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점심에 뭘 먹었느냐는 질문의 답을 들은 것처럼 일상적인 표정이다.
일부러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인지, 정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길게 끌 필요는 없지.’
단목장룡은 승려나 도사들과 뜬구름 잡는 대화를 즐기지 않았다. 그런 것을 즐기는 무인들도 있겠지만, 단목장룡은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소림사의 방장에게 물어야 할 것은 꽤 많았다. 단목장룡이 그 주제를 밖으로 꺼내려 할 때, 먼저 입을 연 대허 선사다.
“중원 무림은 오랜 기간, 아니 오랜 기간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시간 동안 싸우고 또 싸워 왔소이다.”
“예, 그렇지요.”
단목장룡은 방장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무리 같은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하더라도 배분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전쟁은 싸움을 원치 않는 백성들에게 피를 보게끔 하외다. 피는 더 많은 피를 보게 하며,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소이다. 단목 시주께서 나찰궁의 괴승을 막은 것은 실로 감탄할 업적이오. 하나, 이제는 그 증오의 꼬리를 끊을 때가 된 것 같소이다.”
“그 말씀은…….”
“나찰궁과의 마찰로 사마련에서 항의를 해 오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그들은 빈승이 직접 속세로 내려가 막겠소이다. 이제 더는 무고한 백성들이 피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외다.”
“…….”
단목장룡이 침묵한다.
그가 하는 말은 간단했다. 이제 더는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인들의 질긴 악연은 당장 끊자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찰궁의 괴승을 처단한 단목 시주이기 때문이외다. 이제 나찰궁은 재기할 수 없으니 이 이상 전쟁의 길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으면 하오.”
“그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
당옥정과 당용아는 단목장룡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았다.
숭산까지 오며 나찰마궁과 소림사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뭐, 직접적으로 소림사가 나찰마궁을 조종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다. 뇌왕의 일도 그중 하나였다.
대허 선사는 그 반응을 예측이라도 했는지, 전혀 노여워하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
“단목 시주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소이까?”
단목장룡은 망설이지 않았다.
대허 선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았으니 이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차례다. 그것이 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 해도. 그가 소림사의 방장이라 하더라도.
“전 마교의 멸망을 바랍니다.”
“…….”
처음으로.
대허 선사의 눈썹이 꿈틀한다.
“왜 그러한 것을 바라게 되었소이까? 빈승이 알기로 단목세가는 천마신교와 직접적인 악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천마신교.
단목장룡 또한 무의식적으로 마교를 신교라 칭해 왔었다. 딱히 그들의 명칭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교든 마교든 결국 복수를 행할 것이니까. 하지만 소림사의 방장이 마교를 천마신교라 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
“마교는 적이기 때문입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대허 선사.
그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 간다.
“정사대전이 끝난 것은 사십 년 전이외다. 마교와의 전쟁은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오. 그 세월이면 세대가 바뀌고, 한 아들이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는 세월이라오. 천마신교의 힘은 정파 전체가 힘을 합쳐도 막아 내기 버거운 수준이외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천마신교도 무림맹을 막아 내기 버거운 수준이라 할 수 있소.”
“방장님께선 전쟁 자체를 막고 싶으신 겁니까?”
“높고 낮음이 있고, 같은 높이에 선다면 균형이 맞춰지오. 빈승은 인간들에게서 영원한 평화가 올 것이라 생각하진 않소. 모두가 생각이 다르니 분명히 부딪치는 경우도 생길 것이오. 하나, 이제는 노력이라도 해 보고자 하외다. 정사가 합의하여 평화를 만든 것처럼… 작은 분란은 있을 수도 있지만, 정과 사 모두가 전쟁의 폭풍에 갇히지는 않도록.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을 것이외다.”
단목장룡은 대허 선사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에 피해를 보는 것은 모두였다. 만약 마교가 중원 무림을 일통했다고 치자.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마교의 그 천하가 언제까지 이어지겠는가? 마교가 이 넓은 중원을 모두 관리할 수 있겠는가?
전쟁은 끊이지 않으리라.
소림의 방장은 그 악연을 끊어 내려 하는 것이다.
단목장룡이 마교의 출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대허 선사의 말에 공감했을 수도 있다. 굳이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굳이 전쟁을 해야 할까? 그러한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었다.
‘이미 대허 선사께선 결단을 내리셨군.’
단목장룡은 이 자리에서 마교가 양씨세가를 장악하려 했던 것을 언급하진 않았다.
소림사의 방장은 그러한 사정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평화를 운운했다. 방장의 의도대로 중원이 움직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아마 힘들 것이리라.
그래서 단목장룡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찰마궁의 무공은 소림과 닿아 있더군요.”
이번엔 대허 선사의 눈썹이 꿈틀하지 않았다.
“불가의 가르침은 소림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외다.”
적당한 대답이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만족하지 않았다.
“예, 그렇지요. 원류가 같으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나찰마궁의 자미소는 다르더군요.”
대허 선사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되물었다.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외까?”
“대야반야금강공.”
“……!”
부동심. 방장은 웬만한 일에 놀라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대야반야금강공을 언급하자 처음으로 대허 선사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그 놀람은 금방 사라지긴 했으나, 단목장룡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미소는 그 무공을 변형한 것입니다. 불가의 가르침이 소림만이 유일하진 않다지만, 그 무공은 소림사의 최고 절기 중 하나 아닙니까?”
“단목 시주께선 어찌 대야반야금강공과 나찰궁주의 무공이 닿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외까?”
당연히 마교에 있을 적에 대야반야금강공의 구결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찰궁에서 이걸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툭.
단목장룡이 무언가를 꺼낸다.
낡은 무공서. 표지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허 선사는 그것을 펼쳐 읽어 보았다. 놀랍게도 대야반야금강공이었다.
“처음엔 대야반야금강공임을 몰랐습니만… 후반부에 무공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
대허 선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다.
“무공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푸른 뇌광이 눈동자에 맺힌다면 무공이 완성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찰마궁주와 싸우는 중간중간 그의 눈동자엔 푸른빛이 번뜩였습니다. 물론, 완벽하지 않았지요.”
“나찰마궁에 소림이 무공서를 제공해 줬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외까?”
“그건 아닙니다만…….”
단목장룡이 슬쩍 당용아를 바라본다.
그녀 또한 묻고 싶은 말을 계속 참아 왔었다. 홀로 찾아와서 다짜고짜 뇌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무림맹을 통해 공론화를 한다고 해도, 결국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 소림이 그럴 리가 없다는 답을 들었으리라.
“방장님, 뇌왕 대협을 알고 계시겠지요?”
“알고 있소이다.”
뇌왕은 십 년 전 육왕에 이름을 올렸던 고수.
방장과 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푸른 눈동자를 가진 무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공을 익히면 푸른빛을 내는 무공이 또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흔하지 않죠. 아니, 솔직히 그런 무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소림사의 고승 중 한 명이 무공을 펼칠 때 그런 광경을 보았다는 정보가 있더군요. 그것만으론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단목 공자 덕분에 확실히 소림의 무공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당용아의 눈이 빛났다.
“방장님, 솔직하게 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뇌왕의 죽음에 소림이 개입한 것입니까?”
단목장룡이 대허 선사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에겐 물을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사실 대야반야금강공을 발견했던 장소는 나찰궁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목산에서 발견한 것이다.
소림사가 제갈교아를 납치하여 강시로 만들려 했었나?
그렇기에 마교와의 평화를 주장한 것인가?
단목장룡의 눈빛이 깊어진다.
‘만약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