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말해 줄 수 없소
“아미타불…….”
대허 선사가 불호를 왼다.
이제까지 감정을 거의 보이지 않던 대허 선사였지만, 지금은 뭔가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 그리 큰 변화는 아니었고 자세히 그의 표정을 관찰해야지만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연기일 수도 있지.’
인간은 미묘하게 표출되는 감정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때가 있었다. 오히려 과하게 감정을 표출한다면 반감을 사기도 한다. 날 속이기 위해서 슬픈 척을 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대놓고 감정을 표출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심리의 빈틈을 이용하기도 한다.
최대한 상대에게 감정을 보이지 않는 척하며, 눈치가 빠른 이들만이 감정을 알아챌 수 있도록 아주 미묘한 변화를 보여 주곤 한다.
소림사의 대허 선사가 설마 그런 장난을?
굳이 왜?
이런 착각과 지레짐작으로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날 수도 있었다. 마교에서도 그런 식으로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이들이 있었다. 소림사의 방장이라는 자리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는다. 단목장룡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제까지 발견한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소림사는 분명히 관련이 있다.
“뇌왕… 그 이름을 듣는 것은 십 년 만이로군…….”
대허 선사의 말에 독봉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독봉의 시선을 느낀 방장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답한다.
“그 일이 소림과 관련이 없다곤 할 수 없소이다.”
“……!”
두 여인의 눈이 커다랗게 뜨인다. 설마설마했었다. 소림사는 정파 무림의 태산북두. 구파일방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은 문파였다. 불가의 종주로 무림에서의 영향력은 몹시 크다. 그들의 한마디면 무림이 움직일 수준이었다. 무림맹이 각 문파와 가문의 연합체적인 성격이라면, 소림사는 그런 무림맹에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는 문파였다.
“허나,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소. 그 일은 빈승이 손을 쓴 것이 아니외다.”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당연히 당용아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소림과 관련이 있다고 해 놓고, 자신이 손을 쓴 것이 아니라고?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뇌왕 시주는 빈승과도 연이 깊은 사내였소. 보기 드물게 의협심이 투철했으며, 실제로 협의를 펼치는 무인이었소. 빈승은 그를 보며 많은 것을 배웠소이다.”
뜬구름 같은 소리.
소림사의 고승들은 정작 중요한 대답은 하지 않고 빙빙 돌려서 말하곤 한다. 그런 대화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저들의 대화방식이다. 하지만 사천당문은 그러하지 못하다. 사천에서도 화통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속된 말로 성격이 급하다고 할 수 있었다.
“방장께서는 뇌왕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니외다.”
“그럼……!”
당용아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방장의 몸에서 현기(玄氣)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흥분을 가라앉히는 기운이었다. 보통 내공으로 기세를 내뿜는 무인 대부분이 강렬한 기운을 상대를 압박하는 것에 이용한다면, 대허 선사의 기운은 궤를 달리했다.
“과정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법이고, 결과는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손짓일지니.”
“…….”
당용아는 이제 대꾸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가 본론을 꺼낼 때까지.
“부처가 되길 바라는 이는 하나가 아니되 그 모두의 마음이 같지 아니하니… 중원에서 소림은 불가의 뿌리라 할 수 있소이다. 단목 시주께서 말씀하신 나찰마궁의 궁주 또한 불가의 가지 중 하나라 할 수 있소이다. 그렇다고 하여 소림과 나찰궁이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순 없소. 나찰궁이 생겨난 것은 소림이 있었기 때문이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뇌왕 시주를 죽인 이는 소림의 무학을 익혔소이다.”
그렇기에 소림과 연관이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림의 무공을 익혔다고 모두 뇌왕을 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뇌왕은 화경의 고수였죠.”
대허 선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화경의 고수는 오직 화경의 고수만이 상대할 수 있다. 그건 무림의 상식이었다. 물론, 합공을 한다면 초절정에 이른 이들도 화경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지만 혼자서는 무리일 것이다.
뇌왕을 죽인 이는 푸른 눈동자의 사내 한 명뿐이다.
“대체 그자가 누구인가요?”
대허 선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건 지금 말해 줄 수 없소이다.”
“왜죠?”
“모든 일이 끝난 후, 빈승이… 소림이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은 후 말해 드리겠소.”
“왜!”
흥분을 가라앉히는 현기.
그것만으론 당용아의 불붙은 마음을 쉬이 진정시킬 수 없었다.
“알고 있으시면서 왜 말씀해 주시지 않는 거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전 소림을… 방장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외다.”
만약 이곳이 소림사가 아니었다면, 상대가 소림사의 대허 선사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당용아는 암기를 꺼냈으리라. 무인들의 대화방식엔 입을 움직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힘으로 정의를 가린다.
그녀는 방장에게 이길 수도 없거니와 이곳은 소림사의 방장실이었다.
“그럼 이것 하나만 확실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허 선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뇌왕을 죽인 것은 방장님이신가요?”
“아니외다.”
“알겠습니다.”
당용아가 입을 다문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감히 소림사의 방장을 의심하는 것은 중죄였다. 다른 고승들이 방장실에 함께 있었다면, 오랜 수행으로 쌓아 올린 덕을 스스로 무너뜨렸으리라. 대허 선사는 현 소림사에서 가장 부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를 욕보이는 것은 곧 소림을 무시하는 처사이리라.
이제껏 침묵하며 당용아와 대허 선사의 대화를 지켜보던 단목장룡.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두 분께선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것은 두 사람도 들으면 안 된다.
누군가와 약조했던 것이 있기 때문이다.
끄덕.
당옥정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고.
당용아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두 사람이 나간 후.
대허 선사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전에 몇 번 감정을 드러내긴 했었지만, 당용아에게 모든 것을 말해 준 후 그의 눈동자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언가 결단을 내렸기 때문일까?
“방장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시오.”
“혹, 강시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소이다.”
“그렇군요.”
“…….”
더 이상 단목장룡이 말을 하지 않자 대허 선사가 되묻는다.
“강시에 대해선 왜 묻는 것이외까?”
“전 강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설마 중원에 강시를 만들고 있는 문파가 있다는 말이오?”
대허 선사의 눈에 어렴풋한 분노가 어린다. 강시는 보통 죽은 이들을 되살려 움직이게끔 한다고 알려져 있다.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였다.
“어쩌면 방장께서 그 부분에 대해 알고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여쭈어본 겁니다. 중원에선 소림이 불가의 뿌리라고 말씀하셨지요.”
“……!”
대허 선사의 얼굴이 굳는다.
대허 선사는 분명히 숨기는 것이 있다. 만약 그가 천자산에서 진법을 만들고 제갈교아를 납치하여 강시로 만들려 한 세력의 배후라면? 단목장룡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었다.
“설마…….”
“제가 소림에 온 것은 나찰궁에서 대야반야금강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말씀드렸지요. 사실 강시를 본 장소에서도 대야반야금강공을 발견했습니다. 이 무공이 이렇듯 쉬이 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요?”
사실 마교에게 사본을 빼앗긴 적이 있긴 했다.
단목장룡이 그 무공의 구결을 알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나, 마교에서도 그 무공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으며, 마교에 들어간 물건은 곧 마교의 것이 된다. 그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는다. 마교는 결코 중원에 그것을 뿌리지 않았으리라.
눈앞에 있는 소림의 방장.
혹은 소림사 출신의 누군가.
분명히 천자산과 천목산의 진법, 강시는 소림사와 연관이 있으리라. 대허 선사와 당용아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소림이 모든 걸 되돌린 후에 말해 준다고 했다.
“모르고 계셨군요.”
“아미타불…….”
“저 또한 한 사람분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무인입니다. 뇌왕을 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니 어떤 세력인지 말씀해 주신다면 저 또한 돕겠습니다.”
대허 선사가 침묵한다.
고민하는 것이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단목장룡을 바라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대허 선사는 단목장룡의 경지가 대종사의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목 시주의 힘이 있다면…….’
단목장룡은 가만히 기다렸다.
소림의 방장이 어떤 생각을 할지라도, 단목장룡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만약 대허 선사가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제아무리 소림의 방장이라고 하더라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
대허 선사가 눈을 감았다.
그는 지금 또 결단을 내렸다.
“이것은 빈승이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외다. 단목 시주의 마음은 감사히 받으리다.”
단목장룡이 두어 번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군.’
방장과는 뜻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굳이 마음이 맞지 않는데 억지로 함께 갈 필요는 없었다.
“전 나찰마궁주와 싸웠습니다. 그의 기운은 참으로 혼탁했습니다. 다른 이들의 정기를 취하여 추악한 기운이 몸에 깃들었었지요. 기운이 혼탁하니 정신 또한 정상은 아니었습니다.”
묵묵히 단목장룡의 말을 듣는 대허 선사.
“선사께서 내보이신 기운은 그렇지 않군요.”
“빈승은 아직 부족하고 또 부족하외다.”
“그러나 무인의 기운으로 피아를 판단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뿌리와도 같은 소림의 무공을 익힌 이들 중에서 강시를 만드는 이가 있으니까요.”
“면목이 없소…….”
“그러니 이것 하나만 답해 주십시오.”
“말씀하시오.”
“방장께서는 뇌왕을 해한 이와 대적할 생각이십니까?”
“그러하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하는 대허 선사.
단목장룡과 대허 선사의 눈동자가 부딪친다. 눈동자만으로 상대의 진의를 가릴 수 있을까? 그러면 좋겠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 단목장룡은 소림사의 대허 선사를 한번 믿어 보고 싶었다. 그의 기운도 그러하거니와 정파 무림의 자존심이자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의 방장까지 타락했다면…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이던가?
“믿어 보겠습니다.”
단목장룡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차피 이곳에서 대허 선사와 싸울 순 없었다. 고작 세 명으로 소림 전체와 대적할 순 없었다. 단목장룡은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다고 해도, 당옥정과 당용아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단목 시주.”
포권지례를 하고 방장실에서 나가려는 단목장룡을 불러 세우는 대허 선사.
“만약 푸른 눈동자의 그분과 마주하게 된다면…….”
잠시 뜸을 들인 후.
“도주하시오.”
단목장룡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분이라…….’
단목장룡이 방장실에서 빠져나가고.
방장실에는 불호를 외는 소리만 줄곧 울려 퍼졌다.
* * *
“방장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당용아는 화를 꾹 눌러 담은 표정으로 단목장룡에게 물었다. 대체 왜 말을 해 주지 않는가? 소림사의 방장에게 사천당문의 위세를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장께선 그분을 조심하라고 하더군요.”
“조심해요?”
“예, 만나게 되면 도주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당용아와 당옥정의 얼굴이 굳는다.
대허 선사가 한 말이 무슨 의민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화경에 오른 고수가 도주……?”
“세력을 말한 것일까요?”
두 여인에 물음에 단목장룡이 답한다.
“아마 한 명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세력이었다면 ‘그들’이라고 칭했겠지.
또한,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다. 소림사의 방장이 ‘그분’이라고 칭하는 존재. 만약 자신보다 배분이 낮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어쩌면 현 소림의 방장보다 항렬이 높은 고승. 그러한 자가 소림의 무공을 빼돌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과연 누구일까?
대허 선사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알려 준 셈이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혼란에 빠트리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지.’
대허 선사를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소림사의 방장이라고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동물이다.
“만약 대허 선사보다 더 항렬이 높은 고수라면… 방장께서 그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못한 게 이해가 되는군요. 그것은 소림의 수치일 테니까요.”
사실 수치 정도가 아니었다.
여태껏 쌓아 왔던 소림의 명예가 무너질 것이다. 존경받는 대협 뇌왕을 죽이고 강시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장룡…….”
“응, 말해.”
“무림에서 말하는 최고 경지는 화경이잖아. 그런데 화경의 고수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그 말에 당용아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사실 화경에 대한 것에 무림인들의 환상이 담긴 경우가 많았다. 화경에 오른 고수들은 이미 명문거파의 장문인 수준이다. 그들이 화경이 이러이러하다고 정의를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대부분이 화경의 경지를 잘 모른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환골탈태를 하면 화경에 올랐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 정도?
나찰마궁의 소궁주 뢰극찰은 그것으로 자신이 극마에 올랐다고 ‘착각’했었으니까.
“화경의 고수도 급이 나뉘어. 초절정을 예로 들자면, 이제 갓 검강을 다루게 된 이들과 자유자재로 검강을 다루는 이는 사실 하늘과 땅 차이라 할 수 있으니까. 나랑 나찰마궁주의 차이처럼.”
“그럼 방장님께서 언급하신 그분이라는 사람은…….”
“화경에서도 극에 달했거나 또 다른 경지에 올랐을 수도 있겠지.”
“또 다른 경지? 설마 현경(玄境) 같은 것을 말하는 거야?”
사실 화경은 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 불린다.
하지만 이론상 그보다 높은 경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부르는 이름은 많아. 신선이 된다고 하여 선인지경(仙人之境)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옥정이 네 말대로 현경이나 탈마(脫魔)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 신체가 새로이 태어난다.
화경에서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간다면 무엇이 변화해야 하는 걸까?
단목장룡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게 뭐든… 난 나만의 길로 나아가면 되는 거니까.’
그의 피부에서 분홍빛의 기운이 피어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