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목세가의 역대급 망나니-186화 (186/236)

186화 만나다

무림맹주 복마진인.

그는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른 후부터 선진 문화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무림맹의 일원이라는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더 많은 젊은 무인이 무림맹에 도전할 수 있게끔 제도를 개선했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났다면 그의 의도대로 정치에 찌들었던 무림맹이 서서히 변화했으리라.

하지만 강호 무림이라는 곳은 한 사람의 꿈만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전쟁을 바라지 않고 평화를 울부짖는다고 해도 상대가 돌을 던지면 맞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전쟁은 놀이가 아니었다.

당연히 수많은 무인의 피가 흐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림맹주가 시도하려 했던 것들은 대부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 생각만을 밀어붙일 수는 없으니…….’

무림맹주는 강호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결단을 내리는 자리였다.

선역으로 남아 있을 수만은 없는 자리. 어떤 이는 무림맹주의 선택에 돌을 던질 수도 있으리라. 왜 하필 자신이 무림맹주가 되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근 사십 년간의 평화가 왜 이제 깨지려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복마진인은 자리에 맞게 행동하기로 했다.

“맹주님, 회담이 이루어지는 청룡루와 가까운 곳으로 객잔 방을 잡아 놓았습니다.”

“가자꾸나.”

“모시겠습니다.”

다섯 명의 무인.

수가 적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맹주 호위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보니 강호에서 잔뼈가 굵으며 실력 또한 뛰어난 이들이다. 맹주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행동한다.

“저 사람이 무림맹주인가……?”

“저렇게 높으신 분은 난생처음 보네.”

“마교의 소교주를 봤었잖아?”

“에이, 그래도 소교주보다는 무림맹주가 더 높지 않나?”

군중의 대화가 맹주의 귓가에 들려온다. 딱히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다. 그는 무림맹주 이전에 공동파에서 도를 닦은 도사였다. 이런 일에 흥분하여 무림맹이 더 높다는 것을 알려 줄 만큼 속이 좁은 인물은 아니다.

‘소교주가 이미 장사에 도착했나 보군.’

곧 만나겠거니 생각하며, 말을 타고 나아가려 할 때.

누군가 맹주의 일행을 가로막았다.

“워워.”

앞으로 나아가려던 백마를 달래 주곤 앞을 응시하는 맹주.

그의 망막에 잡힌 한 미공자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미 그의 외모는 알고 있었다. 곧게 묶은 백발, 수려한 외모. 겁도 없이 소림사에 찾아갔었으니 그의 인상착의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허리춤엔 병장기가 없었다. 단지, 묘한 외형을 가진 부채 하나만 들고 있었을 뿐.

‘마교의 소교주라면 천마신공을 익혔을 터.’

천마신공은 검만을 사용하지 않는다.

과거 마교와 몇 번이고 부딪친 무림맹이었기에, 천마신공이 어떠한 무공인지는 알고 있었다. 천마라 불리는 교주가 잡는 것이 곧 무기이며, 무기를 잡지 않더라도 그들의 손과 발은 최악의 살상 병기였다.

역대의 천마에게 역대의 무림맹주는 몇 번이나 패배했으며, 목숨을 잃었다.

하나.

‘교주가 아닌 소교주일 뿐.’

전대 맹주 제갈강량은 화경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

전쟁의 시대엔 가장 무력이 강한 이가 무림맹주가 되었었다. 하지만 오랜 평화가 이루어지고, 맹주라는 자리는 무력보다는 정치나 다른 능력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복마진인은 육왕 중 한 명.

그는 화경의 경지에 오른 초고수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마교의 교주도 아닌 소교주에게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 사도명입니다. 천하의 무림맹주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군요.”

“마교의 소교주를 뵈어 영광이오.”

“…….”

맹주의 말에 소교주의 미소가 짙어진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딱히 문제가 없는 인사였지만, 천마신교의 교도들은 ‘마교’라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명백한 도발이다.

“그래, 본 맹주의 앞을 가로막은 이유가 무엇이오?”

“별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정파 무림의 가장 높은 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따름이었지요.”

“그렇군. 감상이 어떻소?”

“아쉽게도 기대엔 미치지 못하는군요.”

“…….”

싸늘한 정적이 흐른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이미 두 거물과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고수들끼리의 싸움이 나면 폭풍에 휘말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다 무림맹주와 마교의 소교주라니?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하겠답시고 목숨을 걸 이들은 없었다.

“허허, 재밌구려.”

하지만 맹주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그럼 회담장에서 뵙겠소.”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림맹주 또한 무림인.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지 않는 것이 중원인의 특성이다. 하지만 그의 위치는 함부로 화를 내고 분노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가 분노하는 것은 곧 정파 무림의 분노나 다름없었다.

소림사에서는 평화를 말했다던 소교주가 왜 여기에선 시비를 거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말려들 순 없었다. 맹주가 말의 허리를 차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소교주는 그를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옆으로 이동하여 그의 앞을 또 가로막는다.

“왜 그리 급하십니까?”

“이제 막 장사에 도착한 참이라 객잔에 가서 쉬려던 참이오.”

당연히 무림맹주의 호위 무사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눈앞에서 망발을 내뱉은 이에게 호통을 쳤을 테지만, 맹주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설 수는 없었다.

“전 너무도 지루해서 그런데… 어떻습니까? 무림맹의 지존이라는 이와 한 수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말입니다.”

촤락.

소교주가 부채를 펼친다.

얼굴의 하관만 가린 채로, 맹주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 오로지 맹주만이 느낄 수 있는 기세가 느껴진다.

‘그래도 맹수의 새끼라 이건가…….’

소교주는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떠오른 귀기. 그는 싸움을 원하고 있었다.

무림맹주 또한 호승심이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복마검법을 펼치고 싶었다. 공동파는 마(魔)를 섬멸하기 위한 검법을 익힌다. 곤륜파가 멸문한 이래로 공동파는 마교의 습격에 대비하여 복마검을 단련해 왔다. 무림맹주는 그곳의 출신이었다.

하지만 뻔한 도발에 말려들 정도로 그의 수행이 낮진 않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겠소?”

“도망치려는 겁니까?”

“감히……!”

맹주의 호위 무사들이 분노했다. 도망이라 했나? 이 회담을 처음 무림맹과 사마련에 제안한 것은 소교주라 했었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명백히 싸움을 걸어오지 않은가?

“허허허…….”

하지만 맹주는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다.

‘꼴에 도사라 이건가.’

중원인들의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 도발하는데도 말려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벗어날 수 없으리라.

‘먼저 손을 쓰는 것은 썩 내키진 않지만…….’

먹잇감을 앞에 두고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법.

소교주는 맹수였다.

무림맹주는 사냥감일 뿐이었고.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림맹의 맹주에게 천마신교의 힘을… 과거의 공포를 일깨워 주려는 것뿐. 이미 대허 선사를 통해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촤라라락!

부채를 접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호위 무사들이 소교주를 가로막았으며, 무림맹주 또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댄다.

‘허허, 결국 이렇게 되는가…….’

싸우지 않으려 했지만.

상황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무림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타닷.

무림맹주의 예상을 뒤집는 일이 또 벌어졌다.

타앙!

부채와 검이 부딪쳤다고 상상하기 힘든 굉음. 마치 강철끼리 부딪친 듯한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이미 군중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있었고, 몇몇 무림인만이 멀찍이 서서 두 초고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손속을 나눈 것은 무림맹주와 소교주가 아니었다.

“…….”

소교주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부채를 휘둘러 맹주의 말을 공격하려 했었다. 당연히 소교주가 들고 있던 부채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혼(魂)이 담긴다는 신병이기는 아니지만, 장인이 만든 철검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이었다. 부채의 뼈대는 한철로 만들어졌으며, 거죽은 마교의 특수한 환경에서 키워졌던 곰의 가죽이었다.

마교의 대장간에서 장인이 한 땀 한 땀 제작한 것으로, 내력을 담아 휘두르면 그 바람에 칼날이 담긴다고 한다. 물론, 무공의 경지가 받쳐 줘야 했지만…….

소교주는 장난으로 부채를 휘두른 것이 아니다.

무림맹주에겐 닿지 않을 수 있겠으나 그의 말이나 호위 무사들에겐 치명적이었다. 단순히 부채를 휘두른 것일 뿐이나 그것에는 소교주의 심득이 담겨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히 그 일격(一擊)은 여기서 막힐 것이 아니었다.

소교주의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껏 무림에 와서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은 게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도발하여, 무림맹주와 손속을 나누고… 그와의 격차를 은근히 알려 줬으리라. 그에게 공포를 심어 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놈에게 소교주의 공격이 막혀 버렸다.

“네놈은 누구지?”

“…….”

소교주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젊은 사내였다.

그의 얼굴엔 감정이 떠올라 있진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그 눈빛이 스산했다.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파르르르.

소교주의 봉황선(鳳凰扇)이 떨리기 시작한다. 과도한 내력이 주입되자 거죽에 그려진 검은 봉황이 붉게 변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화려한 무기였다.

“단목 조장……?”

무림맹주의 말에 소교주의 눈빛이 깊어진다.

맹주는 저 사내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다. 그리고 단목이라면…….

‘단목장룡이라는 놈인가?’

소교주 또한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현 정파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무인 중 한 명. 그가 나찰마궁주를 이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생겼었다.

하지만 흥미가 있는 것과 무례를 용납하는 것은 다르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는 언젠간 중원의 패자가 될 사내였다.

거기다가.

“기대에 미치진 못하는군.”

“…….”

소교주가 무림맹주에게 했던 말이다.

거기다 그의 일격을 막아 내고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리 소교주가 적당히 힘을 조절했다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감히 저딴 망발을 내뱉는다? 십만대산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주 또한 가만히 있을진대, 아랫것이 참으로 방자하군.”

단목장룡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맺혔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내의 웃음인데도,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기분이 묘하게 나쁘다.

‘이놈을 만난 적이 있던가?’

그런 의문도 잠시.

봉황선의 봉황이 다시금 붉게 물들었다.

“단목 조장, 그만두게!”

“죄송합니다. 지금 전 흑룡단의 조장이 아닙니다.”

단목장룡의 말에 맹주의 얼굴이 굳는다.

그가 무림맹에 있지 않았더라도, 중요 정보는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중엔 단목장룡의 탈맹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단서를 붙인 탈맹이긴 했지만, 현재 단목장룡은 무림맹주의 명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쿠웅!

두 사람의 신형이 부딪친다.

누가 이길 것인진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목장룡이 패배하든, 소교주가 패배하든.

상황은 악화된다.

‘어쩔 수 없구나…….’

그래도 최악의 결과라고 한다면, 현 정파 무림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단목장룡의 패배다. 최소한 그 결과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무림맹주가 말의 등을 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손에는 역대 맹주들이 애용했던 천뢰용검(天雷龍劍)이 쥐여 있었다.

쿵! 쿵! 쿠웅-!

두 사람의 곁으로 간 맹주가 전세를 파악한다.

합공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무림맹의 수치가 될 것. 그러니 적당한 그림을 만들어서 두 사람의 싸움을 멈춰야 했다.

‘허어… 너무도 팽팽하구나.’

단목장룡과 소교주는 찰나의 순간에도 수 합을 겨루었다. 검과 부채가 부딪칠 때마다 땅이 흔들리는 듯하다. 한 수 한 수에 막대한 내력이 담겨 있었으며, 심지어 극도의 살기마저 담겨 있었다. 웬만한 각오가 서지 않고서는 두 사람의 싸움에 난입하지 못한다.

‘분명 단목 조장의 실력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진대……?’

눈동자를 굴려 전세를 파악하면서도, 맹주는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단목장룡이 나찰마궁주를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순수한 실력이 나찰마궁주를 앞섰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수뇌 회의에서 보았던 단목장룡은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었으니까.

‘내가 잘못 판단했던 것인가.’

화경에 올랐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보통 화경에 오르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틀렸다. 화경이라는 경지는 망망대해에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히 앞으로 나아간다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나아가는 방향이 옳은 것인지 시험에 들게 된다.

그러한 경지이니 만큼, 심기체가 조화되어 환골탈태를 했을지라도 갓 화경에 든 자와 그 망망대해에서 오래도록 항해한 이들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굳이 화경이 아니더라도 다른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지금 단목장룡의 움직임은?

거기다 천마라 불리는 마교의 교주도 아닌 소교주의 움직임은?

무림맹주 복마진인 또한 같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두 사람의 재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도 복마진인보다 적을 테니까.

‘하나,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더욱더 격렬해지는 싸움.

복마진인의 몸에서 청아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마(魔)를 제압한다는 복마검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이다.

그렇게 복마진인이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려는 순간이었다.

“굳이 말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더군요. 직접 아이를 키워 보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지 관심이 많았거든요.”

“……!”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무림맹주의 옆에는 마교의 소교주처럼 백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분명히 그 외형은 젊었으나 그의 눈동자에는 세월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것도 흔히 보기 힘든 광경인데, 누가 이길지 내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귀하는…….”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맹주가 보았던 그 어떤 사내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내.

그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소개한다.

“사마련주 사마백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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