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다짐과 시작
난 천마를 만난 후, 숙소로 돌아왔다.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를 만났기에 긴장했던 탓일까? 당시에는 딱히 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을 정리한다.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천마는 광오했으며, 혈우검마는 충성적이었다.
십 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한 것은 나 자신일 것이다.
‘아버지라…….’
그를 아버지라 불러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를 지칭할 땐, 천마나 교주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를 아버지라 여기고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혈우검마는 명령에 복종한다.
모든 마교도가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자결하라면 하고, 베라면 벤다. 교주가 명령하면 어떤 짓이든 한다. 혈우검마는 교주의 명에 따라 내 목을 베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었다.
사공천에서 단목장룡이 되었을 때의 간극은 길지 않았다.
사실 눈을 깜빡했더니 이 육신으로 들어와 있었다.
당시엔 당연히 복수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이제는 다시금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복수를 원하는가?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가? 과거 가족이라 여겼던 이들에게 철퇴를 내릴 수 있는가?
천천히 눈이 뜨인다.
사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연히.”
과거 사공천은 싸움을 싫어했었다.
누군가와 싸우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여 합의점을 만들려 했었다. 당연히 그 부분에서 교주나 현재 소교주가 된 사도명과도 많은 마찰이 있었다. 내가 마교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었나? 영령 또한 나에게 그리 말했다.
허황된 이상으로 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했었다.
“해야지.”
지금은 다르다.
왜인지 나는 무공이 좋아졌다. 명확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혼대법으로 혼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이 몸의 영향을 받은 걸까? 여러 이유가 떠올랐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사공천이 아니다.
사실 사공천이었다면 여기서 복수를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굳이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타협점을 찾아내려 했을 것이다. 모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밌겠군.”
묘한 흥분이 몸에 깃든다.
긴가민가했던 감정이 확실하게 정리된다. 나는 그들과 싸우고 싶었다. 그들에게 감히 나와 소중한 사람들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 뼈저리게 느껴야 할 것이다.
누굴 건드린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검을 뽑는다.
중간중간 관리를 해 주긴 했으나 여러 싸움을 함께 거쳐 오다 보니 군데군데 이가 상한 것이 보였다. 현재 내 수준에서는 검날이 약간 더 예리해진다고 해서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만전을 기울여야 했다.
정성을 다해 뇌왕검을 갈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 * *
단목장룡이 마교주를 만나고 돌아온 밤.
사마련주는 마교주가 머무는 객잔의 근처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단목장룡도 마찬가지지만 천마는 예측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그가 홀로 서안까지 달려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고.
사마련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단목장룡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시에 자신은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실리적으로 따지자면 마교주를 함께 처리하는 게 낫다. 이제까지 세워 온 계획도 모두 그걸 바탕으로 실행에 옮겨 왔었다.
왠지 모를 반발심.
단목장룡의 뜻에 끌려가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사마련의 성이 있는 광동성 광주에서는 그는 최고의 성군으로 통했다. 누구든지 사마련주의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었으며, 그를 찬양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천하제일을 논할 고수였으며 사파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정파를 집어삼킬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오히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했다.
“열등감인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 주었던 마교주가 지척에 있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목장룡의 미친 듯한 성장과 마교주를 독대하러 가는 당당함을 보았기에 그러했을 수 있다.
사마련주는 실로 오랜만에 패배감을 느꼈다.
경지에 오른 무인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관철하여 이러한 경지에 오른 것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피식.
하지만 사마련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에도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면 정체되고 만다. 과거 불타는 열정으로 극마의 경지에 올랐지만, 극마에 오른 후에는 멈춰 버린 암천회주처럼 말이다. 인간의 한계는 그렇게 정해진다. 이제까지 달려온 길이 너무도 고되었기에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것은 나일 것이니.’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마련주의 의지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한다.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바로 사마련주였다. 그는 사파의 지존이었으며, 오롯이 설 존재였다.
그가 방을 나선다.
“주군, 나가시는 겁니까?”
수하가 물었다.
사마련주는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등감에 차 있던 표정은 어느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교주를 만나고 올 것이다.”
“수하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됐다. 그럴 필요는 없다.”
사마련주가 홀로 마교주를 찾아갔다.
단목장룡이 그러했던 것처럼.
* * *
서안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던 서안엔 공포의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마교의 교주. 그의 존재감은 평범한 이들이 감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 그래도 무림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중원 이곳저곳에선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서안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새로이 무림맹주가 된 단목장룡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모두를 지켜 줄 순 없었다. 이곳엔 정파의 육왕이 모두 모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교에선 교주는 물론이고 극악무도한 부교주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조금씩 서안에서 떠나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서안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한 객잔에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난주에 마교의 병력들이 있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인데, 맹주께선 무슨 연유로 혼자 서안에 온 거지? 하다못해 화산파의 장문인을 대동했다면…….”
“그러게나 말일세. 요즘 중원의 분위기가 참으로 어지러워…….”
“후우우… 대체 다른 육왕들께선 왜 맹주님께 조언을 해 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어.”
“현 맹주께서 너무 무공이 강하기 때문이지 않겠나?”
“하하, 정말 어려운 상황이로구만…….”
어느 객잔의 술자리에선 무림의 정세에 관심이 많은 무림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무림맹주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단목장룡의 유명세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반발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특히, 정파 무림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배분을 중시하고, 무인들만의 규칙과 질서가 깨지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확고하게 지켜지던 정파 무림의 틀을 깨부쉈다. 특히 백단부흥회라는 무림의 무 자도 모르는 것들이 설쳐 대는 것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물론, 대놓고 그들 앞에서 이런 말은 죽어도 못 하겠지만.
“쯧쯧, 내 보기엔 정파 무림도 이제 틀렸다네.”
술을 마시던 사내 중 한 명이 말한다.
그러자 마주 앉은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 벌어져야 정신을 차릴 테지. 차라리 무당의 장문인께서 맹주의 자리에 오르셨다면……!”
그렇게 두 사내가 무림을 걱정하는 척 단목장룡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고 있을 때.
옆에서 조용히 식사하던 죽립을 눌러쓴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어딜 가든 머저리 같은 놈들이 정말 많군.”
“……?”
한껏 취기에 달아오른 두 사내는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우리보고 한 말이오?”
“너희 둘밖에 더 있나?”
그러자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두 사내.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마주 앉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 대화를 몰래 엿들은 것이오?”
사실 사내들은 주변에 목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줄여 가며 대화하고 있었다. 서안에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었더라도 그에 반발하기라도 한 듯이 중심부에선 백단부흥회가 더욱 세를 넓혀 가고 있었다.
백단부흥회에 이런 대화를 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몰매를 맞을 것이 분명했다.
‘무림인은 아닌 것 같지?’
‘그래.’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체형은 호리호리했고, 허리춤엔 검이나 도 따위의 병기는 없었다. 권이나 각을 사용하는 무인들도 많았지만, 병기를 사용하지 않는 무인들은 그리 흔치 않았다.
은근슬쩍 탁상 옆에 세워 둔 검을 툭툭 친다.
자신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무슨 얘기라도 했소?”
솔직히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듯했지만, 호기롭게 외친다.
서안에서도 꽤 구석진 곳에 있는 객잔이라 손님도 별로 없었다. 사내가 소리를 치자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시선을 주긴 했지만, 검이 있는 것을 보고 홱 고개를 돌렸다. 무림인의 일에는 관여치 않는 게 좋았다.
“식사하러 객잔에 왔으면 마저 밥이나 다 먹고 가쇼. 괜히 피 보지 말고.”
“웃기는 놈들이군.”
오히려 죽립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는다.
“웃겨? 정말 피를 봐야…….”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위협을 하기 위해 검을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쿵! 쾅!
“컥!”
“끄악!”
두 무인은 죽립 사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하더니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전해진다. 숨이 턱 막혀 와서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만 같았다. 더 무서운 것은 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호에서 꽤 오래 살아남았던 두 무인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네놈들도 정파인이니 목숨을 앗아 가진 않겠다. 경망스러운 혀를 뽑아 줄까도 싶지만… 난 맹주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군. 맹주에게 감사해라.”
“꺼어어…….”
“그르륵…….”
분명히 몸은 부서질 것 같았지만, 사내의 말은 또박또박 정확하게 들려온다.
당연히 두 무인은 천무광인이 떠올랐다. 함부로 정파 후기지수를 건드렸다가 팔이 잘려 나갔다. 그것으로 백단부흥회의 세가 급격히 불어났지만, 두 사람은 그 상황에서도 불만을 토로했었다. 애초에 육왕과 함께 왔다면 천무광인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얼굴이 처박혀 있었기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사내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쯧.”
죽립 사내는 손이 근질거리는지 몇 번 휘적거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란이 일자 객잔 주인이나 몇 없는 손님들은 이미 도망가 버린 후였다. 강호에서 생존하려면 이런 일에 나서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죽립 사내가 품을 뒤져 금자 한 냥을 올려놓는다.
그는 혹시나 하여 바닥에서 낑낑대는 두 무인에게 말한다. 어조는 조용했지만, 이번에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이 또박또박 들려온다. 마치 머리에 바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객잔 주인에게 수리비로 쓰라 전해라.”
“그어어…….”
반 시진가량 지난 뒤.
끼이익, 객잔의 문이 열린다. 도망쳤던 객잔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괜찮으시우?”
“예… 예에…….”
사내들은 혼이 빠져 버린 듯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 일을 겪었다면 수치심에 도망칠 법도 하건만 그들은 그런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었나 보다. 그들을 흘겨보던 객잔 주인이 코를 틀어막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오줌을 지려 버렸군! 쯔으읏.’
한껏 인상을 찌푸린 객잔 주인이었지만, 탁상 위에 올려진 금자를 발견하곤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탁상이 완전히 부서지고 바닥도 수리가 필요해 보였지만, 금자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죽립을 썼던 정체불명의 사내가 놓고 간 것이리라.
‘그런데…….’
금자를 얼른 품속에 집어넣은 객잔 주인.
당연한 의문이 떠오른다.
‘대체 그 사내는 누구지……?’
지금 넋이 나간 두 무인도 서안에서는 꽤 이름을 날리는 무인들이다. 서안이검(西安二劍)이라 불리며 협객을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무공의 수위는 일류. 결코, 가볍게 당할 이들이 아니었다.
객잔 주인이 참지 못하고 서안이검에게 묻는다.
“이보시우. 대체 죽립을 쓴 그 사람은…….”
“으아아아아아!”
죽립이라는 말에 발작하는 서안이검.
객잔 주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에게 뭘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대체 뭔 짓을 했길래……?’
그들이 마고파심탁(魔叩破心鐸)이라는 희대의 무공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객잔 주인은 알 턱이 없었다. 객잔 주인은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접어 버렸다. 괜한 호기심은 명을 단축하는 법이었다.
‘에휴, 요즘 서안의 분위기도 뒤숭숭하니 잠시 다른 마을로 피신이라도 가야 하나.’
이곳엔 무림맹주와 사마련주 그리고 마교주가 있었다.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 * *
한 사내가 형형색색의 등불이 빛을 내는 기루로 들어간다.
평소 손님이 많기로 유명한 화양루였지만, 왜인지 지나다니는 손님도 없었다. 의외의 일이었지만, 방금 화양루로 들어간 사내가 누군지 알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리라.
‘역시 변하지 않았군.’
그는 십 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과는 달리 말이다.
‘혈우검마.’
단목장룡이 공간에 녹아들었다.
누구도 그가 화양루로 들어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