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달라질 것은 없다
사실 사공천이 어릴 적에도 그를 아버지라 불러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기 전에 천마신교의 지존이자 교주였으며 교도들의 추앙을 받는 천마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부르는 호칭이야 어찌 됐든 천마는 아버지가 맞았으며, 그 때문에 사공천은 천마신교를 떠나지 않았다. 가족이 모두 천마신교에 있는데 다른 곳으로 떠나가 봤자 무엇을 하겠나? 어차피 자신은 천마신교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 서녕 지부에서 그대로 살아가면 되리라 생각했었다.
혈우검마가 나타나 모두를 죽이기 전까지 말이다.
그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야 절실하게 깨달았다. 멍청하고 아둔했다. 경쟁에서 밀린 후계들이 모두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쓸모가 있으니 살려 두리라 여겼다. 굳이 소교주가 된 사도명에게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교주의 자리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공천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날 밤, 혈우검마의 검에는 자신과 매일 웃고 농을 주고받았던 이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라는 걸 그날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에 깊이 고찰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막상 죽음을 마주하니 삶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었다.
이제 그는 사공천이 아닌 단목장룡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를 아직도 아버지라 생각했다. 천마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부터.
아들 또한 아버지를 죽일 수 있게 되었을 뿐이었다.
단지 알려 주고 싶은 것이다.
네가 지금 누구한테 당하는 것인지. 그때 했던 선택이 네게 무엇을 가져다주게 됐는지. 천마가 천마신교의 지존으로서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해도, 그 또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공공 대사도 오백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으로 살아왔었다.
천마라고 다를까?
단목장룡은 천마를 알고 있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세상 아래 천마신교의 깃발을 꽂으려 했던 그였다. 이제 막 천마신교는 중원에 발을 디뎠다. 여기서 천마가 죽게 된다면, 역대 최단기로 마교의 진출이 가로막히게 되는 셈이다. 과거에 죽였다고 생각한 아들에게 말이다.
천마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단목장룡이 천마를 응시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한없이 낮아진 음색.
천마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가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그중엔 ‘사공천’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죽은 이가 다른 얼굴로 나타났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다. 목이 잘려 죽은 이가 어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천마는 지존이니만큼 수많은 여인을 품어 왔다.
마도육문의 공녀들만이 천마의 여인은 아니었다. 그중 한 여인이 자신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았다는 가능성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단목장룡이 씁쓸한 미소를 피워 올린다.
그는 당장에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듯이 살기를 피우고 있었다. 당연했다. 단목장룡이 설사 천마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적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니까.
“혈우검마는 당신보다 빨리 알아챘었는데 말입니다. 수하보다 못하시군요.”
“갈!”
쿠웅!
천마가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쑥 내민다.
거대한 내력이 응축되어 앞으로 나아간다. 어찌나 많은 내력이 압축되었는지 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거기다 천마신공의 기운은 평범한 내공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 기운의 편린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이 갉아먹히는 죽음의 힘.
천마의 말대로 종말의 힘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힘이었다. 다만, 단목장룡은 그 단어가 민망할 뿐.
단목장룡 또한 손바닥을 펼친다.
힘과 힘의 대결에서 단목장룡은 줄곧 천마에게 밀려 왔다. 수없이 많은 적을 만나 성장한 단목장룡이었지만, 천마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만약 공공 대사를 만나기 전 천마를 마주했다면 단목장룡은 ‘성장’을 꾀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정 따위는 지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목장룡은 오늘도 성장했으며, 이젠 진정한 천마신공의 지혜가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거대한 힘이 충돌하고, 다시금 그 힘의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려 전투를 관전하는 독각수라나 암천회주 또한 중앙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천마와 단목장룡만이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천마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목장룡은 말이 되지 않게도 싸우면서, 시시각각 강해지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 의문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단목장룡은 천마의 앞에서 성장하는 것을 직접 보여 주었다. 천마 또한 정점에 오른 무인이었다. 그러한 성장을 알아챌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 거지?”
천마는 광오하지만 배움에 있어서는 성실하다고 할 수 있었다.
천마신교의 교주는 언제나 죽을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독에 당하더라도, 합공에 당하더라도 패배하면 약한 것이다. 결국, 승리하는 자가…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천마는 그 지독한 힘의 논리를 신봉하고 있었다.
단목장룡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천마 또한 할 수 있으리라.
천마는 단목장룡의 성장을 배우고자 했다.
단목장룡은 천마에게 말해 주기로 했다.
이제 그를 상대할 준비는 모두 끝났다. 천마에게도 당연히 숨겨 둔 수가 더 있으리라. 천마이니만큼 그것은 실제로 단목장룡의 허를 찌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목장룡도 마찬가지다. 그는 수많은 싸움에서, 각 분야에 평생을 바친 무인들의 정수를 배웠다. 단목장룡의 재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하셨지요.”
“…….”
그 말에 천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것을 축복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게 아니더군요. 전 무공이 전혀 좋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는 무공인데, 익히면 익힐수록… 말 그대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흥미가 전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타고난 분야에 흥미가 없더라도,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곤 한다.
하지만 단목장룡은 무공을 익히면 익힐수록… 마음이 답답해지고, 짜증이 치솟았다. 처음엔 재미있다고 여겼던 심법을 익히는 일. 사실 그것 자체로 재미있었다기보단 아버지의 놀라는 눈빛이 보기 좋았을 뿐이다.
처음엔 그 정도로 만족하고 무공을 익혔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만으로는 무공을 익힐 ‘이유’가 되지 않았다. 한 번 보면 무공을 이해하는 재능. 그것과 반대로 사공천은 무공을 ‘혐오’하는 성향도 타고났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재능이었던가?
단목장룡은 알고 있었다.
사공천의 몸으로 단목장룡과 같은 노력으로 무공을 익혔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졌으리라. 그의 몸은 이해하는 재능만큼이나 특별함을 타고났었다.
그렇기에 사공천은 약했다.
이해의 재능은 있으나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왜 그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시의 사공천은 무공을 볼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떠올리려 해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사공천과 단목장룡은 다른 사람이다.
지금의 단목장룡은 무공을 익히는 게 재밌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온전히 천마신교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까?
“저와 서녕 지부를 가만히 두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무공의 재미 또한 느끼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지금 전 무공이 재밌습니다. 당신과 만나기 전에 만났던 공공 대사와의 싸움도 즐거웠습니다. 그 전의 나찰마궁주 또한 흥미로웠지요.”
이제는 단목장룡은 아버지라는 말 대신 ‘당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단목장룡이 구구절절하게 천마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마지막.
그래, 마지막이기에 그에겐 알려 주고 싶었다.
또한, 듣고 싶었다.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자신은 천마신교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분명히 천마도 알고 있었으리라.
“마교주와의 싸움도 재밌습니다. 종말의 힘이라고 했습니까? 이해할 맛이 나는 무공이더군요. 당신의 깨달음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
쉬익!
쿠우우우우!
쿵!
하늘로 높이 도약한 천마.
그의 온몸에서 진득한 보랏빛 광채가 넘실거린다.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이 대지가 빨아들이는 힘을 이용하여 땅에 내리꽂힌다. 깍지를 낀 손이 단목장룡의 머리통을 부수기 위해 휘둘러졌다.
천마의 두 손과 단목장룡의 주먹이 맞닿는다.
거대한 힘과 악의가 단목장룡을 짓누르고 있었다.
“네놈, 사공천이로군.”
천마는 깨달았다.
눈앞의 사내가 대체 누구인지. 어떻게 천마신공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싸우면서 실시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라면 가능했다. 천마신교의 지존이자 천마였던 그가 경악했던 재능을 가진 자신의 아들.
그가 있다면 천마신교가 진정한 세상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전대의 천마 태상교주가 그러했듯이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면, 진정한 의미의 천마가 탄생할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천마는 결국 사공천을 포기했다. 아니, 싹을 잘라 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까?
천마는 천도신녀의 힘을 받아 새로이 태어났다.
그는 결국 태상가주처럼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다. 자신이 미래가 되고자 했다. 지금까지 그 결정은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단목장룡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분명히… 그 이름으로 살아간 적이 있지요.”
단목장룡의 몸에서 천마가 종말의 기운이라 일컬었던 힘이 솟구친다. 단전에서 모인 그 힘은 세맥을 통해 단목장룡의 주먹으로 이동했다. 직선으로 나아가며 파괴를 고하는 힘이 천마를 밀어냈다.
천마는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놀람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 의문과 놀람, 분노와 짜증 그리고 회한. 복합적인 감정이 천마의 내부를 잠식했다. 진정한 천마신공을 익히고, 어떠한 일에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은 천마였건만… 지금은 그가 평소 비웃던 약자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다른 이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 무슨 무공이지?”
천마는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 천마의 물음에 단목장룡은 실소를 흘린다. 무슨 무공이냐고? 이런 상황에서도 천마는 아버지이기보단 천마신교의 교주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실망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심이었다.
여기서 천마가 자신을 아들로 대한다면 그것이 더욱 역겨웠을 것이다.
“제가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무공이었습니다.”
천마는 단목장룡의 재능을 처음부터 간파했다.
사실 그는 단목장룡이 일부러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극한으로 그를 압박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목장룡의 재능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대의 교주처럼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배교의 술법이로군.”
배교.
그곳은 천도신녀가 한창 무림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든 문파였다. 또한, 그녀의 손으로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문파. 만약 그들이 성세를 유지했다면, 마교는 단일 세력으로서 최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직접 너를 죽일 것을 그랬군.”
혈우검마에게 시키지 않았다면, 단목장룡이 배교의 술법인 이혼대법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사공천은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졌으리라. 지금 천마는 애초에 그를 죽이지 않아야 했다는 가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예전과 전혀 달라지신 것이 없군요.”
천마의 손에 진득한 보랏빛의 강기가 맺히기 시작한다.
그가 누군지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눈물을 흘리며 포옹이라도 할 것인가? 애초에 두 사람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단지, 천마는 상대를 죽일 생각만 하고 있을 뿐.
“네놈은 십 년도 전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인과가 비틀어졌다곤 하나 본 좌의 손으로 그것을 되돌려 주마.”
천마의 눈동자가 완전히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이제 숨겨 둔 수를 꺼낼 것이다. 사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단목장룡은 상관이 없었다. 상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오히려 단목장룡에겐 기회였으니까. 오히려 발판이 되었을 뿐이다.
“제가 죽어야 하는 것이 인과라면…….”
역대급의 천재가 미소를 머금는다.
“제가 그것을 또 비틀어 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