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새로운 천마신교
“뭐라? 누가 찾아왔다고?”
천마신교의 원로원.
그들은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마지막 힘이었다. 천마라는 절대의 고수가 무너질 일은 없었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원로원과 그들이 키운 또 다른 정예 무사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역대의 천마들이 중원에 진출하며 본진이 공격당할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은 원로원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가끔 별동대를 꾸려 십만대산을 점거하려는 적들도 존재했었다.
당연히 그 결과는 참혹한 현실을 마주할 뿐이었다.
애초에 수많은 기관진식이 깔리고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는 십만대산이었기에 정파의 무인들은 십만대산에서 천마신교의 총본산을 찾아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천마신교의 총본산과 마주하긴 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어떠한 전투도 벌이지 않고 쌩쌩한 원로원이었다.
지금도 원로원은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천마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천마가 태어나면 그만이다. 천마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언제든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였다. 물론, 현재 교주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천마를 키워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이번 전쟁은 패배인가…….’
이제까지의 천마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사군협.
그가 패배했다는 소식이 십만대산에도 들려왔다. 원로원의 눈과 귀는 어디든 퍼져 있었다. 원로원주는 사군협의 강함을 알았기에 처음부터 그 정보를 신뢰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에 들려오는 정보를 듣자 하니 영 꺼림칙했다.
하지만 십만대산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제껏 침범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험준한 산세도 있었지만,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관진식의 존재 덕분이었다. 정파인들이 쳐들어온다고 할지라도 쉬이 뚫어 낼 수 없으리라. 정파인들이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원로원주는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린가?
누가 찾아왔다고?
“단목장룡과 신녀가 찾아왔습니다.”
신녀는 그렇다고 쳐도 단목장룡?
신녀를 협박하여 십만대산의 위치를 알아낸 것인가? 원로원주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교주가 당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난주의 정예들까지 당했다는 소식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교도들이 전서구를 통해 서신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빨리 단목장룡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끼루욱!
전선구가 도착한다.
사실 단목장룡은 천응을 통하여 모든 서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막진 않았다.
전서구를 읽던 원로원주 혈염마제(血髥魔帝).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동자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는다. 단목장룡은 기어코 소교주나 부교주들까지 죽여 버렸다. 어찌 저렇게 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젠 천마신교의 수호자가 나서야 할 순간이다.
검신이 거무튀튀한 붉은빛을 띠는 장검을 들고 혈염마제가 일어섰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존명!”
원로원주의 명령에 수많은 정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목장룡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천마신교는 완전히 끝장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번에 꼭 승리해야 한다.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
교도라면 응당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혈염마제가 원로전을 나섰다.
‘이곳이 어딘지 알려 주도록 하마, 단목장룡.’
그렇게 단목장룡과 마주하게 된 혈염마제.
사방에선 마교의 정예들이 당장이라도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하지만 상황은 혈염마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당연하게도 단목장룡과 싸울 거라 예상했었지만…….
혈염마제의 앞에 선 것은 신녀 영령이었다.
그가 원로원주가 되기 전부터 보아 왔던 아이였다. 그녀의 배신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이런 마음을 품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신녀,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신녀는 신녀일 뿐.
그녀들은 대대로 천마에게 조언하는 존재였다. 사실 마교의 역사에서 신녀가 두드러진 활약을 했느냐 묻는다면, 혈염마제는 당연히 부정할 것이다.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신녀 따위가…….
“본 녀가 천마가 될 것이다.”
이딴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신녀는 천마가 될 자격이 없었다. 만약 되어도 자신이 천마가 되어야 한다. 혈염마제는 이미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허튼수작을 부리는구나. 이제 목숨이 아까운 것이더냐?”
지금 혈염마제는 천마가 될 유일한 인물이었다.
교주와 소교주 그리고 부교주들까지 죽어 나간 상황을 수습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본 녀가 무서운 모양이로구나.”
“…….”
신녀의 도발.
혈염마제의 눈썹이 꿈틀한다.
남은 교도들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마가 될 사내는 물러섬을 보여 주지 않아야 한다. 평생 두 명의 천마를 모셔 왔던 혈염마제였기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포악한 교도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선 힘을 증명해야 한다.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
영령을 죽이고 교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다.
천마를 죽인 단목장룡을 일대일로 이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엔 일만에 가까운 신교의 정예들과 함께 단목장룡을 죽이면 그만이다. 교주 사군협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패배한 것이다.
원로원주는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좋다. 네년이 얼마나 과분한 자리를 노린 것인지 몸소 가르쳐 주도록 하마.”
혈염마제가 검을 뽑는다.
그러자 천도신녀가 바닥에 놓인 목함에서 누군가의 머리를 꺼냈다. 당연히 그 머리의 주인이 누군지 다들 알고 있었다. 훗날 마교의 지배자가 되었을 사내. 소교주 사도명의 머리였다.
그리고 영령의 손에는 봉황선이 걸려 있었다.
영령이 그것을 휘둘러 소교주의 머리를 터트렸다. 피와 뇌수가 신녀의 몸을 적신다. 그 잔인한 광경에 교도들이 침을 삼킨다. 그들은 파괴에 민감하다.
그렇게 신녀와 혈염마제가 싸움을 시작하려 할 때.
영령의 눈에 귀기(鬼氣)가 어린다. 천마신공을 익힌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눈동자. 그것을 마주한 혈염마제가 깜짝 놀란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원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령이 천마신공을 익혔다?
“네년이 어떻게……?”
“말했지 않으냐, 본 녀가 새로운 천마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혈염마제와 영령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왜인지 몰라도 단목장룡은 뒷짐을 지고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크윽……!”
“하아……!”
영령과 혈염마제의 싸움은 거의 박빙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령이 조금 더 우세했다.
신녀가 원로원주와 비등한 실력을 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영령의 실력에 수많은 교도가 감탄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원로원주는 상황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기랄……!’
영령이 이렇게 강했던가?
본래 그녀의 실력이었다면 사실 혈염마제에게 미치지 못했으리라. 원로원주는 천마신교 부교주들보다 한 단계 위의 고수였다. 그녀가 혈염마제에게 순수한 실력으로 이길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단목장룡만 없었다면 말이다.
십만대산에 도착하기 전 단목장룡은 그녀가 익힌 무공에 딱 맞춘 ‘천마신공’을 전수해 주었다. 천마신공은 교주만이 익힐 수 있다. 그만큼 천마신교 내에서는 최고의 무공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목장룡은 사실 마교의 천마신공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천마신공이 대단한 무공임은 단목장룡도 인정하지만, 그것을 영령에게 맞게 개조하여 그녀가 당장 익힐 수 있는 구결로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영령의 무재 또한 사실 천하를 논할 수준이었으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영령이 잘해 주는군.’
단목장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천마가 될 수 있었다. 사실 교주는 단목장룡이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 부류의 것은 아니다. 천마는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역대의 천마들도 수많은 위험 속에서 살아남아 우뚝 선 것이다.
아무리 단목장룡이 그녀에게 천마신공의 개선된 구결을 알려 주었다고 해도, 그것을 펼치는 것은 영령 자신이었으니까.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영령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원로원주는 여기서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가 천마가 될 수 있었다. 단목장룡도 아니고 고작해야 여인에 불과한 신녀에게 밀려 천마의 자리를 내놓을 순 없었다. 천마와 소천마가 죽은 다음 천마신교를 지휘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었다.
비겁함?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혈염마제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그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아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비겁하다고 살길을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비겁함이다.
“모두 영령과 단목장룡을 죽여라!”
잠시 주춤한 신교의 교도들이었지만,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교도들의 사명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병기를 꺼내 들었다. 원로들과 수많은 정예가 영령과 단목장룡을 향한 포위진을 구축하려 한다. 정파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상황이다.
하지만 왜인지 영령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비겁하다고 하진 말아라. 네년이 선택한 일이다.”
혈염마제가 조용히 영령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그 말에 영령이 화사한 미소를 짓는다. 그 표정이 기묘한 기분을 선사한다.
“본 녀를 비겁하다고 말하지 말아라.”
영령의 말에 혈염마제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네게 수많은 교도가 있다면 본 녀의 뒤엔 ‘그’가 있단다.”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사아아아…….
무언가 조용하게 베이는 소리.
마치 백사장의 모래가 갈라지는 듯이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동시에 교도들의 당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뭐야…….”
“이게 무슨……?”
모두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춘다.
이류급에만 올라도 무인들은 내공을 다룬다. 그들에게 내공이란 삶이나 다름없었다. 단전을 폐하고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해도 무인들이 그냥 목숨을 내놓는 것은, 내공이 목숨과 비교해도 무게의 차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내공의 ‘소실’은 교도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멈추느냐! 왜!”
하지만 그것은 혈염마제에게만 닿지 않았다.
당연히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일 듯이 달려들던 교도들이 갑자기 멈춘 이유를 말이다.
“그가 나섰다면 혼자서 여기 있는 교도들을 모두 전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슨 개소리를…….”
그것은 천마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원로들과 수많은 정예 전투대. 진법을 펼친다면 아무리 천마라도…….
“저 모습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이더냐?”
영령의 말에 혈염마제가 주변을 둘러본다.
교도들은 완전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매번 목숨을 걸며 생존해 왔던 이들이었지만, 무인들에게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내공을 빼앗겨 본 경험은 전무했다. 그들은 혼란에 빠져 감히 단목장룡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 그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너 하나의 목숨으로 수많은 교도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야.
“닥쳐라!”
두 사람이 움직인다.
이미 승부는 거의 결정된 상태였다. 신녀가 우세했으며, 혈염마제가 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부딪친다.
“커억…….”
무릎을 꿇는다.
영령의 봉황선이 혈염마제의 목을 꿰뚫었다.
급작스럽게 승부가 나자 교도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명령을 내린 이가 죽었다. 거기다 그녀는 새로운 천마가 되겠다며 천명한 신교의 신녀였다.
이제는 그녀가 교주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실 평소였다면 흥분한 교도들이 그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을 테지만, 단목장룡의 존재 덕분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쿠웅-!
영령이 발로 땅을 내려친다.
거대한 울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는 푸르스름한 아수라의 형상이 맺혀 있었다.
천마현신(天魔現身).
천마를 증명하는 무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란에 빠져 있던 교도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춘다.
교주의 존재는 그들에게 절대적이었다.
“본 녀가 새로운 천마(天魔)다.”
그 선언에 교도들이 하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 * *
“잘해 주었군.”
“천마현신은 단목 맹주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펼칠 수 없었을 거예요.”
영령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과거 신녀일 때와 비슷해져 있었다. 십만대산 내에서 그녀의 그런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그래도 마기(魔氣)를 운용한 것은 너였지.”
영령의 무위는 단목장룡도 놀랄 수준이었다.
천도신녀와 한 몸이 되었었기에 그런 것일까? 그녀는 상단전을 열지 않았음에도, 우주의 진리 중 일부를 머릿속에 품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난다면 영령은 더 강해지리라. 그녀는 완벽히 마교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혈염마제를 이김으로써 완전히 증명할 수 있었다.
잠시 단목장룡의 얼굴을 마주하던 영령.
그녀가 다짐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괜찮겠어?”
“전 새로운 천마가 되었답니다.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자리를 내줘야겠지요.”
하지만 영령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의지를 단목장룡이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럼 가겠다.”
단목장룡이 몸을 돌린다.
영령은 슬픈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아마 그가 떠나면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무림맹의 상황을 정리하고, 그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영령은 그를 붙잡지 못한다.
이제 그녀와 단목장룡은 완전히 다른 길로…….
“언젠간 다시 찾아오지. 그때 만약 죽어 있으면 정말 죽는다.”
그의 손에는 은은하게 환상검의 환영이 맺혀 있었다. 저것으로는 혼(魂)까지 벨 수 있었다. 몸에 천도신녀의 혼이 완전히 유착되기 전이라 베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육신을 죽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단목장룡이 손을 휘휘 젓더니 교주전에서 떠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멍하게 바라보던 영령, 아니 천마신교의 교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네, 기다릴게요.”
그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와 다시금 재회할 때를 위해서. 그때가 되면 용기를 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그의 앞에서 당당해져야 한다.’
자신은 역대 최고의 교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이용하여 새로운 천마신교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인간 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천마신교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