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1년 전만 해도 당장에 굶어 죽을지 모를 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연수는 살아남았다.
때론 훔쳤고, 때론 빼앗기도 반대로 빼앗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매일 전쟁과 같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지만 이제 드디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수가 한서 객잔에 취직한지 6개월이 지났다.
객잔의 주인은 처음 석 달 동안은 연수를 눈여겨보는 것 같았다.
연수 스스로 느끼기에는 마치 감시의 눈길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연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을 묵묵히 열심히 했다. 매일 자기 전에는 물을 길어 놓고 얼굴을 비춰보며 웃는 연습까지 했다.
손님에게는 철저히 환하게 웃는 인상만 보여주려 애썼다.
‘점소이란 결국 서비스직인 거야. 서비스의 기본은 미소, 그리고 손님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
어느 날 객잔으로 칼을 찬 무인들이 들어섰다.
선임 점소이부터 객잔의 주인어른까지 항상 당부했던 것이 무림인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칼을 뽑아 사람을 베기도 하고 특히나 자존심 또한 강해서 절대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야기를 들었다.
객주의 반복되는 당부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치안이 좋지 않은 시대다.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아마 잡히는 범죄자보다 그렇지 않은 범죄자가 더 많은 시대일 것이다.
특히나 무림인들은 관에서 꺼린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오죽할까?
다행히 연수가 일하는 한서객잔은 서호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작은 객잔이라 무림인들이 자주 출입하진 않았지만, 가끔 오는 무사들도 있었다.
냉기를 풍기며 들어서는 무사들을 보며 선임 점소이가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고 연수는 손님의 접대를 자처했다.
“아무래도 어린 저는 조금이라도 봐주지 않겠습니까?”
선임 점소이가 듣기에도 일리가 있었다.
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선임 점소이를 보고는 긴장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무사들에게 다가갔다.
“무사님들 주문하시겠습니까?”
5명의 무사는 과연 살벌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인상파들이었다.
‘이게 살인자들의 기세구나.’
하지만 웃는 낯으로 묻는 연수에게 무사들은 별말 없이 바깥만 바라봤다.
연수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밖에 날이 덥지요? 시원한 냉수를 내오겠습니다. 주문하실 때는 불러 주시면 냉큼 달려오겠습니다.”
말 없는 무사들을 뒤로하고 연수는 냉수 다섯 잔을 떠다가 잔 위에 작은 나뭇잎을 띄어 가져갔다.
예전 누군가가 냉수를 들이켜다 체할 것을 염려해 이리 했다는 이야기가 번뜩 떠오른 것이다.
역시나 무사들은 잔 위에 떠 있는 잎을 보고는 연수에게 물었다.
“이 나뭇잎은 뭐냐?”
“혹시나 더운 날씨에 급히 물을 마시다 사례라도 걸리시면 불쾌하실까 봐 띄워났습니다. 주제넘은 걱정을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시 떠다 드릴까요?”
연수의 똑 부러지는 말에 살벌한 무사들이 실소를 머금었다.
“되었다. 주문할 때 부르마.”
“네 알겠습니다. 불러만 주십쇼.”
연수는 90도로 허리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한참 후 몇 명의 무사가 더 오고 나서야 그들은 주문했고, 연수는 무사히 그들의 식사를 나를 수 있었다.
후에 계산할 때는 한 무사가 연수에게 은자 한 냥을 더 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녀석이 똑 부러지게 일하는구나. 덕분에 잘 먹었다.”
“와, 무사님 고맙습니다. 역시 무림고수 분들이라 화통하시네요.”
무사는 고수라는 소리에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가며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객잔을 나섰다.
‘립서비스는 서비스직의 기본이지’
연수의 접대를 본 객잔의 주인은 그 후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접객은 모두 연수에게 맡겼다.
연수는 간혹 이런 팁을 받았는데 한 달에 한두 번이지만 보통 은자 한 개씩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객잔 점소이로 일하며 이런 객비를 받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기루의 점소이들이라면 자주 있는 일이겠지만 객잔 그것도 이런 작은 객잔에 오는 손님들이 이런 객비를 주는 일은 어디를 가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연수는 객비를 받을 때는 절대 혼자 갖지 않았다.
객잔 주인은 연수의 몫이라며 혼자 챙겨도 된다 했지만, 항상 일이 끝나면 선임 점소이를 뒤로 불러 철전 60개를 선임점소이에게 쥐여 줬다.
당연히 선임 점소이로서는 수지맞는 일이니 흔쾌히 받았고, 그 후부터는 선임 점소이와의 사이가 돈독해졌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법은 적을 만들지 않는 거지. 사람의 질투심은 무서운 거니까.’
연수는 질투와 시기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질투하게 되면 곧 시기하게 되고 머지않아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게 되면 괴롭히게 되고 사회생활에서의 괴롭힘이란 다양하고도 끔찍하다.
상사의 미움을 산다면 과한 업무나 실적의 저평가와 질타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의 모욕을 받을 수 있으며 동료의 미움을 산다면 각종 악성 루머와 업무의 지장을 주는 방해를 받을 수 있다.
후배의 미움을 산다면 많은 뒷담화로 인한 이미지 실추와 후배들에게 신임을 잃어 식물 선임이 되는 모욕감까지도···.
연수는 그리되지 않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연수가 일한 지 9개월째가 되자 객잔에서 연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주방의 숙수와 보조 3명은 연수의 말이라면 콩이 술이 된다 해도 믿었고, 선임 점소이 또한 막내라 부르며 연수를 귀여워해 주었다.
객잔의 주인 또한 연수의 월삭을 6개월 만에 성인 점소이의 월삭만큼 올려주었다.
가끔 객잔에 나오는 주인 양반의 부인은 연수를 보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가끔 연수에게 무명옷을 지어 주기도 했다.
또한, 객방의 침구를 정리하고 세탁하는 중년의 침모 또한 연수에게는 늘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점소이라는 직업과 이 세계에 거의 적응이 끝나 먹고살기 편해지는 어느 날 반가운 손님 찾아 왔다.
그날따라 유난히 기분 좋은 숙수 덕분에 점심이라는 연수가 제일 좋아하는 밥을 얻어먹은 한가한 오전의 끝 무렵.
오후 장사준비 전 잠시 쉬는 시간에 찾아온 거지 한 명.
산발한 머리에 꼬질꼬질한 옷차림 게다가 주제에 안 맞게 손에 쥔 자기 키만 한 죽봉.
연수는 거지를 보자마자 펄쩍 뛰어가 양손을 뻗어 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냐? 이놈아!”
“하하 잘 지냈지?”
“너는 잘 지내는 거야?”
몸을 떨어트려 소개의 얼굴을 확인해 보자 자신과 헤어질 때보다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야 뭐 천하의 최대 방파에 입방했는데 살만하지.”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자.”
연수는 소개의 팔을 잡고 객잔의 안으로 이끌었다.
“황석이 형 오랜만에 친우가 와서 잠시 이야기 좀 나눌게요.”
“그래. 천천히 있다. 와. 장사준비는 걱정하지 말고.”
“고마워요, 형.”
연수는 소개를 2층의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겨우 침상 하나와 옷장 하나가 꽉 차는 작은 방이었지만 소개는 연수의 방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너 출세했다? 개천에서 겨우 만든 비바람 세는 천막에서 살다가 이런 좋은 방도 생기고.”
“쉰 소리 그만하고 앉아서 말해. 요즘 어찌 지내는 거야? 반년 동안 소식 한번 없고?”
“뭐 별 대단한 건 없었어. 서호분타의 꼬래비로 입방해서 입문공을 구걸하는 중이지.”
“응? 무공도 구걸해서 배워야 하냐?”
“어, 우리 개방은 입문하게 되면 무의 개라고 해서 직급이 없는 제자의 신분으로 입방하게 되는데, 일결 제자들에게 입문공을 구걸해서 배워야 해. 열심히 배워서 기초 입문공인 취구보와 취개봉법을 모두 배우게 되면 그때 승결을 해서 일결 제자가 되는 거야. 그러면 그때야 입문심법인 구연공을 배우게 된데. 그 후에는 2년에 한 번 승결식을 해서 무공의 성취를 보고 2결이나 3결로 승결이 되지. 보통 3결 제자가 되는 데는 6년에서 10년까지도 걸린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너는 아직 일결도 아니라는 거지?”
“하아, 그래. 위에 선배 거지새끼들이 도통 입문공을 풀어야 말이지, 아무리 구걸해 봤자 무시하기 일쑤에 가르쳐 줘도 어쩌다 한두 초식뿐이고···. 요즘 그것 때문에 죽을 맛이야.”
“그런데 너희 개방은 몇 결까지 있는 건데?”
“9결이 끝이야. 9결은 방주님 하나뿐이니, 사실상 8결이 최고라고 할 수 있지. 보통 8결은 다들 장로직을 맡고 있거든. 그다음 7결은 대부분 실질적인 실무직이고 6결 제자들은 거의 실무 조직에 조직원으로 활동한다고 들었어. 5결은 대부분 전국 분타에 퍼져서 분타주를 맡고 있고.”
“그럼 5결은 되어야 출세했다고 하겠네?”
“그렇지. 5결만 되도 한 분타의 분타주라고. 사실상 그 지역에서는 최고의 자리지. 본타가 있는 개봉으로 가지 않는 이상 분타주 이상의 거지를 만날 일도 드무니까.”
“그럼 언제 넌 오결되냐?”
“3결까지야 무공만 잘 익히면 된다지만 4결이상부터는 개방에 공로를 세워야 해. 협행을 쌓거나 개방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찾아내어 보고 하거나 하면 공로를 인정받아 승결을 시켜준다고 들었어.”
“그런데 개방은 왜 그렇게 직급이 뚜렷하지? 마치 군부를 보는 것 같네.”
연수는 21세기의 군대생활이 생각났다.
“그야 우리 개방은 방도의 수가 너무 많아서 흔히 10만 방도라 하지만 사실 그 방도 수를 다 헤아릴 수가 없어. 그러다 보니 위계가 혼란해지는 일이 많았데. 예를 들어 개방에 투신한 지 20년 된 거지가 있는데 그보다 어리지만, 장로나 방주의 제자라던가 아니면 어릴 때 출세한 분타주라던가 하면 서로의 관계가 껄끄럽게 되지 않겠어? 그러면 결국 누가 누구의 제자인지 위를 쭉 파 봐야 족보가 나올 텐데 이 많은 방도의 족보를 어찌 정리할 수가 있나? 그렇다고 무작정 먼저 입방한 제자의 순서대로 위계를 나눌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제2대 방주께서 만든 게 수결이야. 모든 거지는 수결로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고 수결로 그 지위를 인정하는 거지. 그래서 방주의 제자건 장로의 제자건 입방하게 되면 무의개가 되고 일결부터 3결까지 올라가는 거지. 물론 방주나 장로의 제자들은 승결이 무척이나 빠르다고 하더라. 하긴 나처럼 무공 구걸 따위 할 필요도 없으니, 개방에서는 금수저들이지.”
“풉.”
“왜 웃냐?”
“거지 금수저라고 생각하니까 웃기잖아.”
“그런가? 또 그렇긴 하네! 크큭”
“그건 그렇고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어째 반년 전보다 그다지 잘 먹는 거 같지가 않다?”
“무의개 들은 먹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선배 거지들이 동냥은 잘 받아 오니까. 그보다 무공을 배우려고 죽을 똥을 싸다 보니 어째 전보다 더 마르는 기분이다.”
“에휴, 이 자식아. 그러게 무슨 영화를 누린다고 평생 거지로 사는 그런 데는 들어가서 그 고생이냐?”
“어허, 장차 무림고수가 될 친구에게 말이 심하구나.”
“됐다. 이놈아, 고수고 나발이고 그전에 굶어 죽지나 마라. 기다려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