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연수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사부를 보며 기다렸다.
사부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나름 20년 동안 사파행을 해 오다 보니 별호가 장수무투다. 오래 사는 무공도둑이라는 말이지. 무당과 종남의 입문 공을 훔친 후에 붙은 별호다. 무당에서는 아직도 나를 추적 중이고 종남에서는 큰 현상금까지 걸었다지. 그러다 보니 나를 아는 이는 철저하게 피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다 보니 이렇게 심산유곡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뭐 이 또한 나쁘지 않다. 가끔 산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그저 지금처럼 수염을 깨끗이 밀고 퇴임한 내관 흉내를 내어 다니지.”
“그러면 들킨 적은 없었습니까?”
“왜 없겠느냐? 얼마 전에도 호검문에 쫓겨 네 도움이 아니었으면 생목숨을 내놓을 뻔했는데,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무당의 장로에게 의심을 받은 적도 있었지. 내가 쓰는 호패는 실제로 퇴임 후 얼마 안 돼서 죽은 내관 출신 노인의 것으로 꽤 완벽한 신분이었는데 이 일지휘검이라는 노친네가 눈치가 보통이 아니더군. 한눈에 내 무공을 알아보고 의심을 하기 시작한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남중무해를 펼치고는 바지를 내려 버렸지. 그러고는 감히 동창의 비밀 내관을 핍박하고 모욕준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횡설수설하며 어찌나 사과해 대던지 그 장관을 강호의 동도들이 보아야 했는데 크큭, 그 일지휘검이 내게 허리를 숙여 가며 굽실대던 꼴이 일품이었지.”
연수는 감탄하는 표정으로 사부의 기지를 존경했다.
“남중무해를 그런 식으로도 쓸 수 있군요.”
“그럼. 강호에서는 이런 잔 수를 심계라며 치켜세운다. 결국, 속은 놈이 바보요 약한 놈이 패배자라는 강호의 생리를 빨리 깨달아야 한다. 이건 치사한 방법이 아닐까? 이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이런 잡념을 빨리 버려야 해. 어떻게 하면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의 빈틈을 찢어 벌릴 수 있을까?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야 하고 쓸 수 있는 수단은 가려서는 안 돼. 작은 차이로 인해 생목숨이 날아가는 곳이 강호다. 만약 적의 약점을 보고도 동정심이 일어나거나 노리기 꺼려진다면 그냥 뒤를 돌아 도망가거라.”
사부의 말에 이해가 되지 않는지 연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먼 옛일을 떠올리듯 먼 산을 보며 사부는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말이다. 곤륜무황이라는 대단한 고수가 있었다. 곤륜파의 고수였는데 곤륜파 제일의 고수라고 장문인조차도 한 수 접어준다는 고수였지. 당시 별호에 황자를 쓰는 고수가 네명 밖에는 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시대를 풍미하는 고수였다. 그런 대단한 자가 곤륜파의 장문인 아내와 바람이 난 거야. 이를 알게 된 장문인은 눈이 뒤집혀 일수에 자신의 아내를 때려죽이고는 무황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무황은 이미 장문인을 넘어서는 고수였어. 당연히 그는 그길로 곤륜파를 떠나 도망을 쳤고, 이 사실이 알려져 곤륜파는 개망신을 당했다. 이에 화병이 난 곤륜파 장문인은 몸져누웠고, 무황의 목에 자그마치 금자 일만 냥의 상금을 걸었다. 그때 나 또한 무황을 뒤쫓았다. 당시 수많은 낭인이며 무림인들이 무황을 뒤쫓았거든. 무황의 행동은 아무리 자유로운 강호라 할지라도 비난받기에 충분한 일이었어. 거기에 대단한 현상금까지 걸렸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무인이 그를 뒤쫓기엔 이유가 충분했지.”
“사부님 또한 현상금이 욕심났던 거군요?”
연수의 질문에 사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는 물욕에는 이미 초탈한 사람이다.”
“그럼 무황에게 원한이 있었나요?”
“아니. 당시 본적도 없는 곤륜에 처박혀 사는 고수에게 내가 무슨 원한이 있었겠느냐.”
“그럼 어째서 그런 대단한 고수를 쫓아간 겁니까?”
“혹시나 그의 무공을 훔칠 기회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 기억해 두어라. 흔히 강호에서는 타인의 싸움에 끼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 생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구경하는 것도 금하는 것이 불문율이지. 하지만 그건 뭘 모르는 놈들이나 하는 멍청한 짓이야.”
“괜히 그런 싸움 구경한다고 기웃거리다가 불똥이 튀어 새우 등 터지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까 되도록 몰래 눈치 빠르게 움직여야 하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이지. 무인들의 싸움 구경을 통해 얻을 게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첫째로는 초식을 훔칠 수 있다. 재수가 좋다면 구명절초를 훔쳐낼 수도 알아낼 수도 있지. 어떤 문파나 무인의 구명절초인 비장의 한 수를 알아내는 것은 큰 수확이다. 강호는 아는 것이 힘이 되고 생명 연장의 주요한 수단이니까. 둘째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안계를 넓히고 간접 경험을 통해 수련할 수도 있다. 그만큼 생사를 걸고 싸우는 무인들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큰 경험이 된다. 마지막으로 양패구상의 상황이 나오면 앉아서 이득을 모두 얻어 올 수도 있다. 둘이 싸우다 둘이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면 혹 그들의 비급을 얻을지 누가 알겠느냐?”
“그렇군요. 그런데 그 초식이라는 것은 그에 맞는 심법이 없다면 큰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 뭘 모르는 놈들은 초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맹점이지. 무공에 내가의 공부만큼 외공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무공은 몸으로 펼치기 때문이다. 결국, 초식이란 무공의 본질을 볼 수도 있고 또한 파훼법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이 되기도 한다. 그저 초식만 알더라도 그 초식을 수련하며 많은 걸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훔쳐 익힌 불완전한 초식으로 십 할의 위력을 내기는 힘들겠지만 얼마나 익히느냐에 따라 삼 할에서 오 할의 위력은 따라 낼 수도 있다. 생각해 보아라 저잣거리 삼류 무공이 났겠느냐 명문의 훔친 초식이 났겠느냐?”
“그건 그렇겠네요.”
연수는 수긍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이치였다.
“또한, 다른 심법을 이용하여 해당 초식을 사용해 보면 막히는 곳을 고쳐가며 올바른 내력의 운용법을 알아낼 수도 있지, 그렇기에 명문일수록 수련하는 모습을 철저히 숨기는 것이고 타인의 수련을 몰래 훔쳐보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사투를 하는 중에 그게 지들 마음대로 되겠느냐? 싸움이 격해질수록 가진 밑천이 다 드러나게 되지.”
“하지만 싸우는 모습만 보고 완벽한 초식을 훔쳐낼 수 있습니까? 무인들의 싸움을 본 적이 있는데 엄청나게 빠르던데요?”
“변초나 완전한 초식을 십 할 훔쳐오기는 어렵지. 고수일수록 더욱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모든 무림인이 고수는 아니다. 갓 출도한 명문의 애송이들부터 강호의 싸움이라는 게 고수들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특히 이 애송이들은 상대의 작은 도발에도 욱하는 경향이 있어. 게다가 경험이 일천해서 무공을 사용할 때도 있는바 모든 초식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 경향이 짙다. 만약 밑천이 바닥나면 써먹은 초식을 다시 반복하기도 하지. 이런 애송이들의 싸움이나 비무는 될 수 있으면 꼭 구경하는 게 좋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후 무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연수는 사부의 말이 또 옆길로 샌 것을 바로 잡았다.
“이런 또 옆으로 샜구나. 내가 무황을 뒤쫓기 시작한 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을 즘 나는 무황의 뒤를 잡았다. 그 당시 무황은 숭산까지 도망을 와서 적들과 대치 중이었지. 무황의 상대는 총 열둘이었는데 살 수 무리와 낭인 무리가 뒤섞여 있었고 그 근처에는 무황에게 죽은 수십 명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어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지. 무황의 평소 실력이었다면 아마도 100초 안에 12명의 적을 격살했겠지만 당시 무황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자잘한 상처도 적지 않게 입고 있었어. 한 달 하고도 보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도망치며 싸워왔으니 당연했겠지. 그렇게 분투를 하던 무황이 그래도 이름값은 하더군. 300초가 넘도록 싸우더니 9명의 적을 격살했다. 부러진 검을 들고 싸우는 게 적수공권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대단했지. 하지만 이미 한계였던 무황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나무 뒤에 기대어 떨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세우고 있었어. 무황의 상대들 또한 심하게 지쳐있긴 마찬가지였지만 수적 우세를 믿고 도망가진 않더군. 나는 내심 두 무리가 양패구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잠시간 마음을 놓고 방심해서인지 위치를 들키고 말았지.”
연수는 머릿속에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며 사부의 이야기에 점점 더 빠져들어 갔다.
당시 무황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고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부의 개입이 시작되자 마치 드라마의 클라이막스를 보는 듯 몰입이 되었다.
사부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무황의 적중 살아남은 세 놈이 합공을 제의하더군, 당시 무황은 이미 손가락 하나 까딱할 형편도 되지 않아 보였어, 무황의 기색을 살피는데 문득 무황의 눈빛이 언뜻 내 눈에 들어오더군.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부러진 검을 든 손을 타고 흐르는 피와 그의 눈에 보이는 상실감 가득한 눈을 보니 그가 죽은 곤륜파 장문인의 부인을 많이 사랑했다는 것이 보이더군. 어째서 그의 눈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생각이 닿자 마음에 동정심이 들었지. 동정심을 느끼자마자 나는 사부의 말을 따랐어. 사부 또한 내게 같은 충고를 했었거든. 해서 나는 무황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포권을 하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지. 그때의 무황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행운을 빈다며 포권하는 내게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당시 남아있던 세 명의 무사는 내게 욕지거리하며 겁쟁이니 뭐니 떠들었지만, 솔직히 그들의 악담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그만큼 무황의 인상이 깊었거든. 한 열 걸음쯤 뒤돌아 걸었을까? 문득 뒤를 돌아보니 협공하며 먼저 무황에게 덤벼든 놈이 무황의 부러진 일검에 중상을 입고 나가떨어지더구나. 상처 입은 맹수가 더 위험하다는 격언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순간이었지.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자신이 없다면 뒤도 안 보고 포기해야 하는 이유다. 어정쩡하게 덤비면 내가 죽는 거야.”
연수는 사부의 뒷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한창 중요한 대목에서 교훈을 주고 이야기가 끝나는 듯 느껴져서 더 그랬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다음? 아 한 놈이 일 검에 나가떨어지자 다가서던 두 놈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더군. 하지만 무황은 이미 여력이 없었는지 끝까지 쥐고 있던 부러진 검마저 놓쳐 버렸어. 한번 기침에 한 사발은 돼 보임 직한 피까지 토하더군. 그 모습을 보고 두 놈은 적잖이 안심했는지 천천히 무 황에게 다가섰지. 그때의 무황의 표정은 모든 걸 포기한 듯 초탈한 표정이었어.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그들에게 달려들며 두 무사에게 암기를 뿌렸지. 두 놈 중 안심하고 있던 한 놈은 암기가 요혈에 적중했는지 그 자리에서 요절했지. 지금 생각해도 절묘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한 놈은 몸을 뒤집으며 암기를 피하고는 뒤를 돌아 내게 검을 겨누며 대비하는 모습이 보통 고수의 몸짓이 아니었지. 괜히 끼어들어 피를 볼 상황에 부닥친 나는 냉정하게 놈과 나의 승부를 재 보았지만, 놈은 지쳤음에도 나는 상대가 되질 않을 고수였어. 한참을 놈과의 승부가 어찌 될지 도망을 가야 할지 싸워야 할지를 재보고 있는데 갑자기 놈이 피를 뿜으며 고꾸라지는 거야. 무황의 장력에 등허리가 움푹 파인 것이 척추뼈가 끊어져 즉사한 것 같더구나.”
연수는 무황이 일장을 썼다는 말에 무황의 심계를 칭찬했다.
“무황이 연기를 했군요.”
“완전히 연기는 아니었어. 훗날 물어보니 저승길 동무로 삼으려 세 놈 중 두 놈을 데려갈 요량이었는데 내가 끼어들어 목숨을 건진 거였지. 무황은 그 일장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놓고는 기절했지. 나는 서둘러 시체들의 품을 전부 뒤져 보았는데 총 세 권의 비급을 얻게 되었다.”
“무황의 품에선 비급이 나왔나요?”
연수는 기대에 부풀어 물었다.
“그의 품에 어떤 비급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
“왜요?”
“당시 그의 품을 뒤지지 않았거든.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길래 그대로 의원에게 데려다가 치료를 했지.”
“왜요?”
연수가 직설적으로 물어오자 사부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사실대로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거든.”
“그럼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 후라···. 그는 치료를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 정신이 든 무황은 옆에 있는 나를 알아보고는 어째서 자신을 도왔는지 묻더구나. 나는 그의 뒤를 쫓은 연유부터 모든 걸 가감 없이 말해 주었지. 그랬더니 그가 불편한 몸으로 내게 넙죽 절을 하는 게 아니냐? 대 곤륜파의 모자랄 것 없던 장로이자 곤륜무황으로 살면서 나 같은 삼류 무인에게 목숨을 빚지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더군. 그 후 그는 어떤 심산유곡으로 은거해버렸고 그 전에 내 무공을 조금 봐주며 내게 도움을 주기도 했지.”
무공이야기가 나오자 연수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