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천릿길도 한걸음부터지.‘
연수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하다 보면 다 외워질 것이고 알게 될 것이다.
하루아침에 고수가 된다는 망상 또한 갖고 있지 않다. 길면 육 년이 넘게 사부 밑에서 수련해야 한다.
자질이 모자란다면 10년도 더 걸릴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천천히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어차피 멀고 먼 고수의 길.
눈앞에 과제부터 하나하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정리한 연수는 책의 첫 장부터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간혹 모르는 한자가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한자는 옆에 적어두고 다음 날 사부에게 묻기로 했다.
그렇게 연수가 사부의 거처인 구룡산의 구석에 들어오는지도 100일이 지났다.
연수가 막 구룡산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여름이 시작되며 온산이 초록으로 물들고 뜨거운 햇볕에 살이 익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더위는 한풀 꺾였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기는 했지만,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 것이 가을이 오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초록이 넘치던 산 또한 어느덧 파릇한 입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가 막 떠오른 오전.
연수는 매일과 같이 평상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고, 연수의 사부 또한 툇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련 중이었다.
연수가 수련을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났을 무렵부터 사부는 연수의 수련을 지켜보지 않았다.
간혹 하산해서 마을에 내려가 필요한 생필품을 사 오거나 닭이나 고기 같은 식자재를 사 오기도 했고 대부분 시간을 본인의 축기를 하는 데에 사용했다.
매일 새벽 아침이 되면 두 사제가 심법을 닦느라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연수가 이곳에 온 지 딱 100일이 되는 그때 갑자기 앉아 있던 연수의 눈썹이 실룩였다.
그리고 잠시 후 번쩍 눈을 뜬 연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됐다!”
갑작스레 난 큰소리에 연수의 사부 또한 기를 갈무리하며 운기를 멈추고 눈을 떴다.
“무언가 느꼈느냐?”
“예. 느꼈고 받아들였고, 단전을 만들었습니다.”
연수의 말에 이번에는 사부의 눈썹이 실룩였다.
사부는 뭐가 그리 급한지 한달음에 연수에게 다가와 그의 맥문을 잡고는 진기를 보내며 연수의 몸을 살폈다.
사부의 표정은 연수를 살피는 동안 시시각각 변했다.
지금 자연의 대기를 느끼기만 했어도 무재가 제법 뛰어난 편이라 할 수 있다.
한데 인제 보니 그 기를 받아들여 축기를 시작해 소주 천을 이루고 단전을 만들어 냈다.
아직 하찮은 수준이나 내가 공부 기초의 틀을 만든 것이다.
혼자서 이만한 기간에 이만큼 해내었다는 것은 실로 무재가 뛰어난 편이라는 말이 된다.
“호오 확실히 소주 천을 이뤄 단전을 키워 냈구나. 이 정도면 기를 느낀 것은 훨씬 빨랐겠구나.”
“예. 자연의 기를 느낀 것은 이곳에 온 지 한 달쯤 지나서부터 느꼈습니다.”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느끼긴 했지만 다룰 수도 잡아놓을 수도 없어서 도무지 설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구결에 따라 기를 움직이려 해도 도무지 되지가 않아 그냥 무작정 호흡하며 심결을 외웠습니다. 한 줌의 진기라도 심법의 규칙에 따라 흘리게 되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오늘 문득 몸 안에 축기 된 기운이 느껴지며 진기들이 심법에 따라 흐르더니 다시 단전으로 뭉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성이라지만 대단하다. 너는 제법 무재를 타고난 편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는 대영 심법을 전수해도 되겠어. 오늘 저녁부터는 삼재 심법 대신 대영 심법을 수련하여라.”
“둘 다 같이 하는 건 안 되나요?”
“상관은 없다만 축기의 양이 다르다. 기초는 잘 닦았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
“사부님께서 삼재심법은 혈맥과 혈을 튼튼히 해 주는 공능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물론 그런 점은 있긴하다만.. 뭐 알아서 하거라. 하지만 하루 대영심법으로 두 시진 이상은 꼭 축기를 해야 한다.”
“네.”
연수는 뿌듯한 마음으로 사부와 이른 점심을 먹고는 오후 수련으로 들어갔다.
왠지 오늘은 무언가 되는 날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오늘은 세 시진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차올랐다.
어제는 두 번을 쓰러져 쉬었지만, 오늘은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드는 날이었다.
이제 길었던 해가 저물고 사위가 어두워지자 운기 중이던 사부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만. 오늘은 몇 번 쓰러졌느냐?”
그만이라는 말과 함께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연수는 땀이 범벅된 얼굴로 당당히 웃으며 말했다.
“한 번도 안 쓰러졌습니다. 이대로 달리기는 무리지만 앞으로는 마보로 세 시진을 버틸 자신은 생겼습니다.”
연수의 말에 사부는 생각이 깊어졌다.
‘생각보다 자질이 뛰어나다.’
문득 연수의 자질이 본인의 생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60이 다 되어가도록 절정의 반열에 들지 못한 보잘것없는 자신의 제자로 있기에는 아까운 자질이다.
보통의 저 나이 또래의 아이가 세시 진의 마보를 해내려면 보통 일 년을 꾸준히 수련해야만 한다.
마보라는 것은 모든 무의 기본인 하체단련의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그만큼 오래 수련하기는 쉽지가 않다.
강호에 일류 고수 소리 듣는 무인 중에서도 아마 해낼 수 있는 고수들은 반절도 되지 않을 것이다. 고수가 될수록 기본신체 단련의 비중은 줄어들어 간다. 대부분 축기와 초식을 갈고 닦는데 모든 수련의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기초체력단련을 꾸준히 이어가는 고수는 정말이지 드물다.
하지만 그 효과는 분명하다. 기초가 확실한 만큼 그 토대를 디딤돌 삼아 위로 올라갈 수가 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들 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부는 자신에게는 과분한 제자를 보며 복잡한 심경이었다. 사실 조금 더 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연수의 무재를 더 빨리 알아챘을 것이다.
키는 또래에 비해 크거나 하지 않지만, 연수의 근골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열다섯 아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게다가 연수의 심맥은 타고나길 튼튼하여 평소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잔병치레 한 번 없었다.
머리 또한 영민하여 문사를 지향했다 한들 재능 면에서는 떨어질 것이 없었다.
물론 21세기의 고등교육을 받은 연수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연수가 들어오게 된 몸 자체의 재질이 워낙 뛰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훌륭하다. 네 녀석의 무재가 확실히 뛰어난 편에 속하나 보다.”
‘무황의 제자가 되었다면 정말 대단한 고수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말이지만 그 감정은 고스란히 노사 부의 눈빛에 나타났다.
“이제 다음 수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되겠구나. 내일은 특별이 오후 수련은 쉬거라. 그동안 쉬지 않고 매일을 혹사해 왔으니 신체 훈련은 내일 하루 쉰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흘에 한번은 신체 훈련을 쉬어야 한다. 이것 또한 수련의 일부이니 절대 쉬는 날은 무리하거나 신체를 단련해서는 안 된다.”
“네.”
연수는 대답을 마치고는 옷을 벗으며 우물가에서 능숙하게 빨래와 세안 등을 마치고는 옷을 갈아입었는데, 100일 전과 비교하면 그의 몸은 확실히 탄력이 가득한 근육이 제법 붙어 있었다.
특히 어깨와 다리근육의 발달이 굉장히 눈에 띄는 것이 그간의 수련이 결실을 볼 만 해 보였다.
‘이 정도면 몸짱은 아니더라도 제법 자신은 가질 만하지?’
21세기의 몸짱들의 대단한 근육은 아니지만, 어깨와 등에 붙은 근육과 다리의 탄력적인 근육은 자신이 봐도 제법 멋져 보였다.
한참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연수는 문득 부끄러움이 덮쳐와 서둘러 옷을 입고는 사부가 차려주는 저녁밥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자 사부는 며칠 전 마을에서 구해온 차를 내리며 연수를 불렀다.
사부의 방에 들어서자 사부가 차를 한잔 내려주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 보아라.”
“예.”
연수가 자리에 앉자 사부는 자신의 잔에도 우려낸 차를 한잔 따르고는 방구석에 놓여 있던 상자 하나를 연수의 앞에 놓았다.
“이게 뭔가요?”
“다음 수련으로 넘어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순간 연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한 눈빛으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역시! 이것이군요.”
“예상했었구나?”
“혹시나 했지요.”
상자 안에는 동물 가죽을 제련한 조끼와 발목과 손목에 차는 것으로 보이는 가죽대가 들어 있었는데 조끼와 가죽대에는 작고 긴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 있고 그 안에는 주머니에 끼워 넣는 납이 가득 차 있었다.
“앞으로는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항상 차고 있거라.”
“예.”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연수를 보며 고소를 지은 사부는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의 무재라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세시진 마보를 하는 데 100일이 걸렸으니 이번에는 더 빨리 적응되겠지.”
연수는 사부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조끼와 가죽 대를 차 보았다.
“사부, 이거 너무 무거운데요? 처음에는 좀 가볍게 납 좀 빼면 안 됩니까?”
“이 녀석아 더 무겁게 해도 모자란 판에 무게를 줄일 생각을 해서 쓰겠느냐? 조끼는 겨우 25근이나 될까 말까 하고 발목에 찬 가죽대도 10근씩밖에 안 돼. 손목에 찬 가죽 대는 겨우 5근이다.”
연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한 근에 600그램씩 잡고···. 젠장! 다리 한쪽에 6킬로씩이잖아!’
“사부 이러다가 도가니라도 나가면 고수고 나발이고 병신 되는 거 아닙니까?”
“큭큭 이놈아 겨우 10근짜리 발목대 하나 찼다고 나갈 만큼 네 단련이 헛되지는 않았으니 헛소리하지 말아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어디 나다닐 때 무리하게 뛰지는 말아라.”
“쳇, 알겠습니다.”
연수는 식은 차를 후루룩 마시고는 가죽대를 풀어 상자에 넣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사부는 방을 나서는 연수의 뒤통수에 잔소리를 이었다.
“잊지 말아라.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차고 있어!”
“예~예~ 내일부터는 항상 차고 있겠소이다.”
“큭큭 고놈 참.”
가끔 연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시키거나 감정이 상하면 저렇게 사부에게 반항심을 보였는데 그 모습이 귀엽기만 한 사부였다. 사실 평소의 언행은 깍듯하기 그지없는 편이기에 저런 언행을 보이는 어린 제자가 더 귀여워 보이는지도 몰랐다.
연수가 새로운 수련에 적응하고 대영심법을 익히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다. 구룡산의 모습은 이제 초겨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건만 여전히 연수는 얇은 옷을 그대로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마보를 하고 있었다.
해가 짧은 겨울이기에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연수는 여전히 마보를 하느라 땀에 절어 있었다.
“그만 되었다.”
사부의 말이 떨어지자 연수는 다리를 펴고 서며 손으로 어깨를 주물러댔다.
“후우, 사부님 이제 그럭저럭할만한데요?”
“그래 보이는구나. 내일부터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되겠어.”
“이다음 단계는 뭐에요? 또 무게를 늘리는 건 아니죠?”
“하하 걱정하지 말아라. 이놈아, 거기서 더 무게를 늘렸다가는 정말 근골이 상할지도 모르니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장괘구권과 구면장을 익힌다. 그리고 천리견보를 배우게 될 거다.”
“드디어 경공을 배우는군요!”
“그래, 큭큭크 아마 배우는 맛이 날 거다.”
사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어대며 저녁밥을 차렸다.
연수는 조심히 가죽대와 옷을 벗어서는 우물가로 가 씻었다. 가죽대를 벗고 통통 제자리에서 뛰는 연수의 몸이 매우 가벼워 보였다.
“후우, 이것만 벗어놔도 살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