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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26화 (26/202)

# 26화

무황이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하자 연수의 사부는 재차 물었다.

“어떤가?”

“삼재검법이라면 몰라도 육합권을 가르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겨우 여섯 방위에 대한 공방 여섯 초식이 끝인 단순한 권법이야. 삼재검법 또 별반 다를 것은 없겠지만, 검법을 익힌 적이 없으니 기초는 닦을 수 있겠지만.”

“가르쳐 보면 알게 되겠지만, 저 녀석 슬슬 대인전 연습을 해야 할 때가 되었어. 그렇다고 검을 들고 비무를 하자니 영 내키지 않아. 같은 권법을 가지고 상대해야 가르침을 주겠는데 구면장이나 장괘구권으로는 나로서도 저놈의 흠을 잡기가 힘들단 말이지. 그렇다고 자네에게 어느 세월에 두 무공을 가르치겠어? 그러니 육합권을 가르치고 비무로 가르침을 줘봐.”

“글쎄 그래도 육합권을···.”

사실 무황은 육합권뿐만 아니라 권각술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강했다.

곤륜 또한 권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뛰어난 기재로서 곤륜 제일 검객이었던 무황이었다.

이미 삼십 대 중반에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오르며 무황이라는 별호를 받은 곤륜 제일 검.

그런 그에게는 권각술 따위 익힐 필요도 없는 하찮은 무공이라는 생각은 나이가 60이 넘은 지금도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편견이었다.

비단 무황뿐이 아니라 강호의 검객들은 특히나 다른 무기나 권각술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강하다.

백일창 천일도 만일검. 천하제일 검은 항상 천하 제일인과 같은 뜻으로 받드는 것 또한 그런 편견이 나타나는 대목이었다.

“크크큭 하여간 검객들의 자존심이란···. 자네 정도의 고수가 그 나이가 되어서도 검 외에는 얕잡아 보는 건가?”

“큼큼 얕잡아 보기는 누가 얕잡아 본다고···.”

“검이건 도이건 창이건 권이건 결국 본질은 다 같은 게 아니겠나? 만류귀종이라는데.”

“뭐 자네가 그리 권해보니 한번 가르쳐 봄세. 오늘 크게 실수한 것도 있으니, 육합권과 삼재검 정도야 금방 가르치겠지.”

“그래.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런데 벌써 시간이 이리 흘렀나? 저녁 차려 줄 테니 기다려 보게.”

사부는 뒤늦게 지난 시간이 적지 않음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부엌으로 가서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연수는 사부와 무황이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동안 그동안 산에서 캐와 말려놓은 약초 중 내상에 좋다고 배운 약초들을 달여 탕약으로 만들었다.

이제 막 달여내어 뜨거운 탕약을 후후 불며 마시는 와중에 사부가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상을 차리니 무황과 둘만 남게 되었는데 무황은 탕약을 마시는 연수를 미안한 눈빛으로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의술은 누구에게 배웠더냐?”

괜히 미안함에 묻는 무황에게 연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딱히 의술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영초와 약초에 관심이 생겨 사부에게 부탁해서 약초학책을 몇 권 읽은 게 다예요.”

“그래? 독학으로 내상 약을 달여 먹을 정도의 독학이라···.”

“별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뭘.”

둘은 대화주제가 고갈되자 그저 어색한 침묵 속에 뻘쭘하게 있었는데 때마침 저녁 준비를 끝낸 사부가 상을 봐 왔다.

구룡산에 입산한 이후 처음으로 사부 외에 사람과 밥을 먹으며 연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들게.”

무황은 밥을 먹으며 연수의 안색을 살펴보았는데 바로 몇 시진 전까지 중상을 입은 아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보통 대맥이 상할 정도의 내상을 입으면 아무리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해도 며칠은 안정을 취하며 자리보전을 해야 하는데, 이 아이는 어떻게 된 게 몇 시진 만에 멀쩡한 듯 음식을 먹고 있다.

대단한 고수라도 며칠은 요양하며 죽이나 몇 술 뜰까 말까 할 텐데 밥을 저리 퍼먹는 연수의 모습이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그런 무황의 생각을 읽은 사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놈 혈과 경락이 보통 튼튼한 게 아니야. 걱정하지 말게.”

무황은 사부의 말에 연수를 다시 살펴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으냐?”

“예. 다 나은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을 마친 연수는 며칠 굶은 아이처럼 밥 한 공기를 비우고는 고봉밥을 더 퍼와서는 먹어대기 시작했다.

보통 내상을 입으면 입맛이 떨어진다.

내상에 제일 먼저 상하는 것은 혈맥과 기맥이다. 그다음은 대맥이 상하고 장기가 상하고 마지막으로 뇌가 상하게 되는데 연수는 대맥이 상해서 피를 몇 사발이나 토해냈다.

보통의 사람은 피를 게워내고 나면 위장에 무리가 가고 내상의 후유증으로 속이 울렁거리며 피를 게워내느라 당연하게도 입맛이 떨어지고 고체 음식을 잘 못 먹게 된다.

그런데 연수는 며칠 굶은 아이처럼 밥을 퍼먹어 대니 무황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무황이 그러거나 말거나 연수는 오랜만에 상에 올라온 고기반찬에 환장하며 젓가락을 놀려 댔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자 사부는 연수에게 앞으로의 수련일정을 다시 말해 주었다.

“오전의 일과는 지금과 같이하고 오후 수련에서 매일 한 시진씩 여기 이 친구에게 육합권과 삼재 검을 배우도록 해라. 칠일은 육합권을 칠일은 삼재검을 배우게 될 거야. 칠 일을 주기로 번갈아 가며 배우고 익히거라.”

“네.”

연수는 이미 구면장이 구성에 달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고 장괘구권역시 구성의 성취에서 더 이상의 발전이 없어 오후의 수련이 벽에 막혀있던 차에 새로운 무공을 익힌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무황이라는 대단한 고수에게서 배우는 일인데 어찌 좋지 않을까?

그날 이후 세 남자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무황은 연수에게 육합권을 가르치며 연수의 무재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육합권은 단순한 초식이니 형을 외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이 빠른 것은 당연했다.

또한, 이미 기초를 탄탄히 쌓은 연수이니 육합권 정도 익히는 것이 빠른 것 또한 당연했다.

하여 이틀 만에 무황은 연수와 육합권만을 이용하며 비무를 했는데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육합권만을 이용하여 비무를 하다 보니 무황으로서도 연수의 습득력에 당황스러운 적이 잦아졌다.

처음 한 달간 육합권을 통한 비무는 무황의 의도처럼 비무를 하며 연수에게 이런저런 가를침을 주는 지도 비무의 형식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 조금 지나자 점점 육합권 비무가 지도 비무의 형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연수의 육합권에 성취가 이미 무황과 비슷해진 것이다.

무황인들 언제 육합권을 진지하게 익힌 적이 있었던가?

곤륜의 상승 권법마저 쳐다도 보지 않고 검법에 매진한 무황이다. 그저 만약을 대비해 장법을 하나 익힌 게 전부인 무황에게 권법은 그야말로 비전공 분야였다.

게다가 단순한 육합권이니 연수가 무황의 수준을 따라잡은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삼재검법으로 목검을 들고 비무를 할 때는 연수로서는 무황의 발끝도 따라가기가 힘들었지만, 육합권으로 겨룰 때만큼은 치열함이 엿보였다.

무황으로서도 이제 무공을 익힌 지 삼 년도 안 된 소년에게 패할 수는 없다 보니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섰고 그러다 보니 무황은 잠까지 줄여가며 남몰래 밤마다 육합권을 수련하기도 했다.

단순한 초식들의 반복이다 보니 어떤 초식을 언제 쓰느냐가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점이었는데 연수의 초식에 대한 숙련도와 이해도가 나날이 발전하다 보니 무황으로서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그렇게 무황이 연수를 가르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합!”

두 사람은 그 날도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연수는 힘찬 기합과 함께 일 권을 내질렀고, 무황은 적절한 방어 식을 펼쳐 연수의 공격을 막아갔다. 연수는 물 흐르듯 무황의 옆으로 돌아 들어가며 무황의 옆구리를 노렸고 무황 역시 몸을 돌리며 방어했다. 연수의 공격 일변도와 무황의 방어 일변도.

계속해서 쉴 틈 없이 이어지던 공방이 무황이 연수의 공격 틈새를 찌르며 한 회심의 역공이 성공하며 끝이 났다.

“괜찮으냐?”

무황의 회심의 반격에 나가떨어진 연수가 몸을 털며 가뿐히 일어났다.

“그럼요. 설마 거기서 방어 초식 없이 반격이 나올 줄 몰랐어요. 한 걸음을 제게 뻗어오던 그 보법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너의 공격권의 거리를 아예 줄이려 가까이 붙느라 한 걸음 다가선 것뿐이다. 딱히 특별한 보법은 아니야. 네 공격과 공격 사이의 잠시간의 틈이 보여 찔러 본 것이지.”

말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했지만, 무황으로서는 엄청난 위기에 몰려 겨우 쥐어 짜낸 필사의 공격이었다.

육합권의 모든 공격 초식을 다 사용한 연수가 새롭게 공격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그 틈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오늘은 무황이 연수에게 패하는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이놈에게 계속 수세에 몰리는구나.’

“이제 육합권은 이 정도면 된 것 같구나. 앞으로는 삼재검법을 위주로 익혀 보자. 육합권처럼 단순한 권각술은 더는 가르칠 게 없어.”

“네.”

연수도 더는 육합권에 관하여 무황에게 지도받을 것이 없다고 느끼던 와중에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해주는 무황이 반가웠다.

삼재검을 익히는 게 훨씬 많은 것을 배우는 연수였다.

특히 무황은 목검이라 할지라도 검을 잡고 서 있을 때의 분위기와 기세는 맨손일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서운 기세를 의도적으로 뿜어내지는 않지만, 그저 검을 잡고 연수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산과 마주한 느낌을 주는 무황이었다.

어떤 초식을 어떻게 쓴다 해도 절대 이길 수가 없을 것만 같은 막막한 느낌은 무황이라는 무인의 진정한 풍모를 보여주는 듯했다.

무황과의 수련이 끝나면 구면장을 익히며 산을 뛰어다니고 바위가 많은 공터에서 바위에 주먹질을 해대며 장괘구권을 익힌다.

오후의 수련이 끝나면 잠들기 전까지 대영 심법을 닦고 모자란 신체훈련을 위해 사부에게 배운 단련을 하는데 요즘에는 손가락 두 개만으로 수련 중이었다.

그 단련이 끝나면 두 시진 눈을 붙이고 일어나 같은 일과가 반복된다.

지칠 만도 한데 연수는 날이 갈수록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내공이 깊어지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난 어느 날 무황은 자신의 연수와 두보 사제에게 그만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는 이별선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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