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자신의 딸이 저 더러운 놈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 남자였다.
‘뻔하고도 짜증 나는 이야기네.’
연수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아났다.
왠지 이 남자의 사정에서 자신의 전생이 보였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감내하며 갚아나가는 것과, 오직 가족을 위해서 힘내는 것뿐.
남자와 자신의 차이라면 자신은 그나마 시대를 남자보다 잘 타고나 빚을 다 갚을 수 있었고, 이 남자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의 늪에 빠져 있는 것뿐이었다.
연수가 막 뭐라 남자를 위로하려던 찰나에 반점 안으로 웬 처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뛰어 들어왔다.
“아부지!”
뛰어들어오는 처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연수는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부지! 괜찮아?”
여기저기 멍들고 깨진 머리에서 흐르던 핏자국을 본 처자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아부지,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다쳤어! 그 놈 짓이지? 그놈이 그런 거지?”
처자는 우는 아비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아비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그러더니 연수에게 시선이 닿은 처자.
“흐어엉, 너도 흑흑, 막돼먹은 놈 부하구나! 흐엉, 우리 아부지 괴롭히지 마. 흐앙”
연수는 이미 저 열네 살이라고 추정되는 처자가 들어올 때부터 정신이 없었다. 열 네 살이라는 말만 듣지 않았어도 남자의 열 네 살 딸과 저 처자를 연결지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21세기에서야 성조숙증이니 뭐니 하며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빨라지고 하는 것이 제법 흔한 일이라지만 14세기 먹고 살기도 힘든 이 시대에 도대체 뭘 먹고 자라면 저리되는 것인지···.
뛰어들어오던 처자의 가슴은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거대하였고 그 허리는 얼마나 잘록하였는지 아비를 끌어안은 처자의 몸매 선은···. 완벽한 대문자 S였다.
이목구비는 마치 21세기의 성형 미인을 보는 듯한 위화감이 들 정도의 미모였다.
비현실적인 외모.
딱 그런 말이 떠오른 연수였다.
마치 앞 트임 뒷 트임을 다 한 것 같은 큰 눈에 동양인 같지 않은 오뚝한 코. 두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입술, 거기에 저 열 네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몸매.
“저, 저기···. 아가씨···. 가 아니라 아이···. 같지는 않지만 저···. 그 내가 너희 아버지를 괴롭힌 것은 아니고···.”
뭐라 불러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상황은 대처하기가 힘들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상가상 그때 반점 안으로 연수의 사부가 들어섰다.
“연수야? 무슨 일인 게냐?”
사부로서도 황당한 일이었다.
맛난 거나 사 먹고 있으라며 보내놓고는 볼일을 보는데 웬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근방 유명하던 흑돈이 웬 젊은 고수에게 박살이 났다는 소리였다. 사부는 혹시나 해 가슴이 철렁했다.
이곳은 구룡산과 지척이다.
자칫 자신과 연결될 수 있는 연수가 실력행사라도 잘못하면 난리가 날 수도 있었다.
혹여 종남이나 무당의 무공을 잘못 써서 소문이 나면 그동안 은거하던 구룡산을 떠나야 함은 물론이며 지난한 추적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 소문을 듣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더니 연수의 앞에 웬 중년 남성과 그의 딸로 보이는 여인이 부둥켜안고 울고 있고 연수에게 여인은 자신의 아비를 괴롭히지 말라고 사정을 하고 있으니 도무지 사부의 머릿속에서는 이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 사부님! 그, 그것이 그러니까···. 어···. 제가 그런 건 아니 온 데···.”
“네가 흑돈인지 백돈인지 그놈을 박살 낸 게 아니라는 거냐?”
“아, 아니 그것은 제가 한 게 맞습니다만···.”
“그런데 이 부녀는 누구시길래···. 이리 서글프게···.”
순간 처자의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본 사부의 얼굴이 시 뻘게졌다.
“이놈! 고연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게야!”
청순하달까 수려하달까 색기가 넘친달까···. 모든 말들이 다 저리 잘 어울리는 미녀의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뚝뚝 흐르자 순간 사부의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사부와 지낸 지 5년 그동안 사부는 단 한 번도 연수에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수의 당혹감은 더 커져만 갔다.
“사부님 그게 아니에요. 오해입니다. 예 오해에요. 사실은 이게 그러니까···.”
연수는 사부와 처자에게 필사적으로 있었던 일을 설명했고, 중년의 남자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연수의 해명을 도왔다.
“그리된 일이구먼. 그럼 그렇지. 내 제자가 설마하니 양민을 괴롭힐 일이 없지.”
연수는 전혀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좀 전엔 전혀 그런 믿음이 안 느껴졌는데요? 제가 큰 죄라도 지은 그것처럼 다그치셨는데요?”
“큼큼, 그래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뭐 일이 이리되었으니 남은 뒤처리는 당신네 부녀에게는 화 될 일이 없도록 알아서 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보시오.”
사부는 민망했는지 연수는 보지도 못하고 부녀를 다독여 보냈다.
연수는 멀어지는 열 네 살 계년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수를 보며 사부는 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색과 술은 무공수련에 일 푼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제야 연수는 자신의 추태를 알아차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저 아가씨, 아니 아이가 열 네 살이랍니다.”
“성숙한 아이구나···.”
“그렇죠? 그런데 저런 미인은 항주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도 저 정도의 미색은 수도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제 열 네 살이라···. 쯧쯧 결코 순탄치 않은 인생이겠어.”
“저 미모가 독이 되겠죠? 이런 시대에···.”
“아마도 그럴 게다.”
“하아···.”
“다시 말하지만, 여자는 고수가 되는 길에 도움이 되질 않아.”
연수가 막 뭐라 말하려 입을 달싹이는데 흑돈이라는 빡빡이가 반점 안으로 들어섰다.
“소협. 약속한 금자를 가져 왔습니다.”
흑돈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연수의 앞에 작은 상자를 내밀었는데 상자를 열어보니 금자가 열 냥이나 들어있었다.
“언제봐도 금자는 번쩍번쩍 하군.”
“소협 이러면 이제 저와 소협 사이의 오해는 모두 풀린 거죠?”
사부는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거한을 바라보았다.
머리털은 어디 갔는지 빡빡 밀어 놓은 민대가리에 살을 비대하게 찌어 배의 둘레가 키보다 크지 않을지 의심되고 뒷목에는 살이 몇 겹이나 접혀서 살은 검게 타서 비 오듯 땀을 흘리는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주는 남자였다.
이런 남자가 이제 겨우 열 네 살 된 계년이라는 처자를 알몸으로 깔아뭉개는 상상을 하자 오랜만에 살심이 치솟는 사부였다.
“네놈이 투계방 흑돈이라고?”
흑돈은 겨우 사태를 무마시키는데, 웬 곧 죽을 것 같은 비쩍 마른 노인네가 대뜸 반말을 해오자 기분이 상했다.
오늘 이 애송이 놈을 만나 고생을 한 것만 해도 미칠 노릇인데 이제는 이런 노친네까지 상대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 애송이와 제법 관계가 있어 보이는 듯하니 발작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소만, 노인장은 누구시오?”
“네까짓 놈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어째 생긴 것부터가 욕심이 가득하니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해충 같은 놈이겠구나.”
흑돈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잡혔다.
막 흑돈이 발작을 하려는데 연수가 나섰다.
“사부님 갈 길도 바쁜데 대충 하고 보내죠.”
연수의 입에서 사부라는 말이 나오자 흑돈의 몸 위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흑돈은 더욱 허리를 굽히며 눈을 바닥에 깔았다.
“흠···. 어쩔까?”
사부는 고민 중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해충 같은 놈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런 해악만 끼치는 놈은 살려놓을 이유도 딱히 없다.
모르면 지나가되 계년이라는 아이의 얼굴도 보았다. 가뜩이나 인생에 흉이 많을 것 같은 그 아이의 앞날에 흑심을 가득 품은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은 도움이 일 푼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놈을 여기서 죽이면 분명 무림인의 소문이 돌 것이다.
노인 고수의 소문이. 다행히 주변에 눈이 어두운 일반인이 대부분이었고, 연수가 육합권과 암수검만을 써서 이놈을 상대했다 하니 큰 문제야 없겠지만 모를 일이었다.
무림의 소문은 무서운 것이다.
혹여 이 한 자락의 소문을 듣고도 자신을 떠올릴 인물이 없다고 단언하기가 힘들었다. 일 푼도 안 될 확률이었지만 무림인은 여지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
언제 어떤 원한의 고리가 찾아올지 모르는 게 무림인의 삶이니까.
흑돈은 그런 면에서 보면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분명 돈도 갖다 바쳤고, 딱히 거슬린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늙은이가 무언가 고민을 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였다.
자신에게서 더 뜯어내거나 아니면 자신을 멀쩡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거나.
한데 노인은 저 애송이 놈과 다르게 자신이 피땀 흘리는 양민들을 쥐어짜 번 피 같은 돈에는 그다지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하면 저 노망난 노친네는 아마도 자신을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 없을 확률이 높았다. 생각이 닿자 흑돈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어르신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부지하게 해 주신다면 개과천선해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감이 좋은 놈이구나. 글쎄···.”
연수는 갑자기 무릎을 꿇은 흑돈과 사부의 대화에서 사부가 놈을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부님 굳이 같은 사파인 끼리 피를 볼 이유가 있습니까?”
“누가 같은 사파인 이란 게냐? 이놈은 사파인이 아니야. 그저 저잣거리 삼류 흑도일 뿐이지.”
“흑도 또한 결국 사파인 이잖아요.”
“이런 변방 촌구석에서 양민이나 쥐어짜는 상도덕 없는 흑도 무리는 안쳐줘. 흑도 들도 그들 나름의 규칙과 낭만이 있어. 양민들에게 기생해 살더라도 양민을 해치진 않아. 같이 먹고산다는 직업의식이 있지. 이런 족보도 없는 놈은 안 쳐준다.”
“굳이 죽일 필요가 있습니까?”
연수의 말에 사부는 연수를 바라보았다.
“살인이 두려우냐?”
연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두렵습니다.”
“그래. 두려운 일이지. 쩝 이봐 민대가리.”
흑돈은 납작 엎드리며 대답했다.
“예 어르신.”
“착하게 살겠다고?”
“예. 그저 나무나 베고 농사나 지면서 착실히 살겠습니다.”
“정말?”
“그럼요. 어르신 목숨만 구제해 주십시오.”
“그래. 그 결심이 사실이라면 그러마.”
순간 사부의 손길이 엎드린 흑돈의 발목과 팔목을 빠르게 지나갔다.
“크윽!”
연수는 사부의 손이 지나갈 때 슬쩍 보였던 번쩍이는 날붙이가 아니었다면 사부가 암수검이 아니라 맨손으로 흑돈의 근맥을 끊었다고 착각할뻔했다.
‘와 사부에 비하면 나는 멀었구나.’
“연수야, 사람을 병신 만들 때는 말이다. 나름의 도의가 있는 거다. 팔을 병신 만들 때는 되도록 안 쓰는 팔을 병신 만들어주고, 다리를 병신 만들 때도 덜 발달한 다리를 병신 만들어준다. 팔다리를 모두 병신 만들 때는 서로 다른 쪽 팔다리를 병신으로 만들어 적어도 목발은 짚고 생활은 가능하게 해주는 거다. 이놈처럼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는 놈은 뒤꿈치 위 심줄과 팔목의 심줄을 오 할 정도 끊어주면 적어도 먹고 사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다 싶으면 무릎 뒤에 심줄과 겨드랑이의 심줄을 끊어 놓으면 영원히 그 팔다리로는 생활할 수 없게 된다.”
“예. 알겠습니다.”
연수는 평소와 다른 사부의 모습에서 거친 사파인의 매서운 일면을 느꼈다.
고통과 허탈함에 발버둥 치는 피투성이의 흑돈을 앞에 두고도 자신에게 차분하게 충고해 주는 사부의 모습은 평소와는 잘 겹쳐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