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사부는 흑돈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네놈이 타고난 신력이 있는 것 같으니 농사일 배우고 나무에 도끼질하는 데에는 큰 불편이 없겠지. 하지만 이제는 칼을 들고 설치기에는 힘들 것이다. 감히 내 작은 조카인 정가를 괴롭힌 대가이다. 나는 이 근방에서 생활하고 간혹 이 마을에 들르는데 어디 한번 복수 해 보아라. 그때는 심줄이 아니라 네놈의 네 팔다리를 잘라 평생을 굼벵이처럼 굴러다니며 살게 해줄 테니. 크크크.”
고통과 분노로 가득 찼던 흑돈의 눈빛이 공허하게 비어져 갔다.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정씨 집안에는 눈도 두지 않겠습니다.”
사부는 흑돈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반점 밖으로 나갔다.
연수는 객잔의 점원에게 은자를 다섯 냥이나 주고는 흑돈의 앞에 금자 두 냥을 내려놓았다.
“거 나쁜 짓 하면 그만큼 되돌려 받는 법이지. 괜히 부하들 데리고 내 사부님 친척들에게 해코지할 생각 않는 게 좋아. 너 같은 무지렁이가 백 명이 와도 상대도 안 될 테니까. 고향이라도 가서 네 말대로 착하게 살아. 괜히 칼 들고 원한 사며 빌어먹어 봐야 말년만 괴롭지. 한 냥은 네놈 노잣돈하고 한 냥은 정 씨 아저씨 집에 전해.”
흑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연수는 사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정가네 사람들은 괜찮겠습니까?”
“왜? 그 계집아이가 눈에 밟히느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연정이라도 품었느냐?”
연수는 사부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저도 남자인데 그런 미모를 보고 무심하겠습니까?”
“하아. 연수야 저런 미인을 지키려면 보통 고수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내 20년 사파행을 해 오면서 많은 미인들을 보았다. 남경의 제일미라는 후에 황제의 첩이 되었던 여인도 지척에서 보았고, 안휘에서는 따라올 여인이 없다는 남궁세가의 딸도 직접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열 네살 어린 계집의 미모에 비하면 그 여인들은 댈것도 못돼. 때구정이 줄줄 흐르는 저 얼굴에서도 분칠을 잔뜩한 시대의 미인들보다 아름다운 얼굴이다. 겨우 이런 촌구석에서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 조금만 더 큰 마을에서 태어났으면 이때까지 지조를 지키기도 힘들었을 게다. 납치를 당하던 색마에게 쫓겼던 권력자에게 노려졌던 어쩌면 북경이었다면 황제의 눈에 들었을지도 모를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아이였다. 감히 네가 감당할수 있겠느냐? 계집과 연심을 쫓으며 언제 수련해서 고수가 되겠느냐?”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연수의 기운 없는 대답에 사부는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연수야, 이놈아···. 가는 길이 다른 아이다. 잊어야 한다.”
“예.”
사부가 걱정할 정도로 계년이라는 아이의 미색은 뛰어났다.
자신의 심장 또한 쿵 하고 내려앉을 정도의 미모이니 더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사부는 연수에게 미안했는지 무황에게 가는 길 내내 연수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무인은 대성하려면 물욕에 초탈해야 하고 주색에 초탈해야 하고 권력욕이 없어야 한다.”
“돈은 많으면 좋은 것 아닙니까? 사부도 알부자 아닙니까?”
“돈은 그저 부족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부족하면 또 부족한 대로 맞춰 살면 그만이야. 네가 돈이 무공보다 더 좋다면 언제든 내 재산을 내어 줄 테니 어디 작은 상단이라도 만들어 보아라. 돈이 좋으면 상인을 해야지. 무인으로서 대성하기 힘들다. 무인이 돈을 좇게 되면 인생이 피곤해져.”
“그럼 돈과 주색은 그렇다 치고 권력욕도 없어야 합니까?”
“그래. 권력이라는게 대단해 보이지? 하지만 큰 권력에는 권력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만만치 않은 법이야. 왜 문파의 요직들을 차지 하고 있는 놈들이 더 고수가 되지 못할것 같으냐? 하루의 대부분을 조직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과를 하느라 그런것이야. 밑에 제자들 돌봐야지 업무봐야지 지들 무공닦을 시간이 없어. 그러다 보니 문파에서 특출난 고수가 하나씩은 튀어 나와도 무더기로 나오질 못하는 게야. 누가 네놈에게 어느 자리든 감투를 씌워 준다고 하거든 절대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 무인으로 대성하여 고수가 되려면 오로지 무공에만 쏟아 부어야 해. 시간이든 감정이든 열정이든 다른곳은 보지 말거라. 특히나 큰 문파일수록 요직에 있는놈들이 폐관이라는 말을 쓴다. 폐관 수련? 뭐별거 있겠느냐? 그저 밥처먹고 무공수련만하면 그게 폐관이야. 너와 내가 매일 하고 있는것. 그네들은 그 별거 아닌걸 거창하게 결심을 하고 나서야 할수 있다. 그래서 강력한 무공을 갖고도 대성을 못해. 네가 그런 무공이 있었다면 이 오년만에 지금보다 훨씬 강한 고수가 되었겠지. 하루 두 시진 자는 시간과 반시진도 안되는 식사시간 빼면 오로지 무공만을 익힌 너다. 누구보다 옆에서 보아온 내가 잘 알지. 절대 쉬운일이 아니야. 너의 재능중 가장 큰 재능은 그 노력의 재능이다. 도무지 지치질않고 꾸준이 전진하는 재능. 연수야, 어쩌면 너는 대단한 고수가 될 자질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비록 사문이 비천하다지만 그것은 너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야. 네가 네 힘으로 얼마든지 바꿀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부···.”
연수는 사부의 말에 울컥하고 무언가 뜨거운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어찌 사부와 제 사문이 비천하겠어요? 제게는 과분합니다. 무공이야 남의 것을 훔치든 빼앗든 익히면 되는 수단일 뿐이잖습니까?”
“그래!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오랜만에 두 사제가 걸으며 진심 어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무황의 집에 다다랐다.
사부의 초옥과 굉장히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절벽의 밑에 지어진 사부의 집에 비해 무황의 집은 절벽의 끝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멀리 보이는 초옥을 보며 연수가 사부에게 무황의 집임을 확인하려 입을 열려고 할 때 초옥의 밖으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멀리서부터 환하게 웃으며 반겨오는 노인은 두 사제는 밝은 미소로 맞았다.
“익숙한 기운이 둘이나 되기에 자네와 이 녀석일 줄 알았지.”
“하하 자네 같은 고수의 감각을 피할 수가 없구먼.”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야.”
“그래, 못 본 동안 정말 많이 자랐구나. 키도 훤칠히 컸어.”
“노야는 그대로 시네요. 오히려 젊어지신 거 아닙니까? 그동안 내력이 더 깊어지셨나 봐요.”
“하하 아부는 이 녀석.”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자네 뭔가 좀 변한 것 같긴 한데···. 그러고 보니 이 먼 거리에서 대영심공을 익힌 우리 둘의 기운을 느끼는 것도 그렇고, 뭔가 기연이라도 있었나?”
“기연은 무슨. 그저 작은 깨달음이 지나갔지.”
“맙소사 그 경지에서 더 깨달을 것이 있던가? 그럼 이제 입신경인 게야?!”
“허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입신경이 그리 쉽겠는가? 그저 작은 깨달음이래도, 내 입신경에 들었다면 반로환동이라도 했겠지 이리 늙은 모습이겠는가? 일단 들어가세.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지.”
사부와 연수는 무황의 뒤를 따라 초옥으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자 무황은 차를 내리며 연수와 사부의 찻잔에 우려낸 차를 따라내었다.
“이건 뭐 별건 아니네만 옷가지와 자네 좋아하는 차를 조금 사 왔네.”
“뭘 이런 걸다···.”
“홀아비 마음 홀아비가 아는 법이지. 나 아니면 누가 자네의 고쟁이라도 챙겨 주겠나.”
“허, 참···. 고맙네. 고마워.”
무황은 여러 옷가지와 그 속에 속옷까지 들어 있는걸 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간혹 연수의 사부가 아니라면 낡은 속옷을 청승맞게 기어 입을 판이었기에 매번 챙겨 주는 연수의 사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미 삼십 대 중반에 초절정에 오른 자네가 이 나이에 깨달음을 얻었다면 진정 입신경이 아닌가?”
“입신경의 벽은 결코 얕지 않다네. 그저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에 불과하지. 내 이번에 깨달은 것에대해 적어 놓았는데 한번 보겠는가?”
“글쎄···. 예전에 자네가 전해준 심득도 나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보다 높은 심득인들 뭔가 이해가 되겠는가?”
“허허, 그래도 무림인들이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 심득인데.”
“그건 그렇지만 맞지 않은 옷만큼 필요 없는 것도 없지.”
“그래도 읽어나 보게.”
무황은 끝내 자신의 심득이 적힌 보자기를 연수의 사부 앞에 펼쳐 놓았다.
연수는 무황과 사부의 눈치를 보며 그 심득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반 시진이 넘도록 연수의 사부는 낡은 보자기에 적힌 심득들을 읽고 또 읽어 보았지만 큰 감흥이 없었다.
무황의 심득은 도무지 들쭉날쭉하며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고 그저 작은 단초들로 이루어져 있어 같은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닌 이상에야 큰 깨달음을 얻기가 힘들었다.
그저 오래전 전해준 심득서에서 한 구절을 읽고 작은 깨달음을 얻었던 게 전부인 사부였다.
“역시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아. 하하 자네의 심득은 심오하기가 그지없어, 내 미천한 실력으로는 무언갈 얻는다는 것이 무리야.”
“그런가? 아쉽게 되었네.”
무황은 진심으로 아쉬운 목소리를 내었다.
자신의 심득은 물론 같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상 더욱 이해하기가 힘들고 난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많은 무리를 담고 있다. 그저 한 실마리에서라도 작은 깨달음이나마 얻는다면 친구의 막힌 벽을 뚫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너무나 아쉬웠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의 벽은 내공일세. 내력만 조금 더 쌓는다면 어렵지 않게 벽을 넘을 것이니 너무 그러지 말게.”
“이런 괜히 자네 기분만 상하게 했구먼.”
“아니야. 그저 고맙고 또 고맙네.”
그때 멀뚱히 있는 줄 알았던 연수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우웩!”
사부와 무황은 놀라 연수를 바라봤다.
“연수야! 무슨 일이냐!”
연수는 눈을 감고는 피를 토하면서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막 사부가 놀라 연수의 몸에 손을 대려는데 무황이 저지했다.
“건들면 안 되네! 무아지경이야!”
“뭐?! 무아지경이라니···.”
“이 아이···. 무언가 단초를 찾은 것 같네.”
그제야 연수가 토해낸 피를 보자 그 색깔이 거뭇거뭇한 죽은 피였다. 죽은 피 중에서도 몸 안에 쌓인 노폐물이 가득한 제일 더러운 피를 토해내어 비린내도 심하게 났다.
“어찌···. 어찌 이놈이?”
연수의 사부는 충격을 받았다.
연수의 무위는 겨우 이류 쯤되었다. 잘 쳐줘도 이류의 끝자락. 이 정도만 해도 연수의 재능에 찬사를 보낼만큼의 만족스러운 성장이었다.
하지만 곧 절정을 바라보는 자신도 이해가 되질 않은 심득을 보고 겨우 연수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