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연수의 사부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가능한지 못한지가 무엇이 중요한가? 자네의 제자가 가능함을 몸소 증명해 보이는데.”
“허허, 어찌 이런 일이.”
“보통의 무재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네만···. 이 아이 혹여 하늘이 내린다는 무재가 아닐지 모르겠네.”
“천무지체! 설마? 천무지체라기에는 근골도 심맥도 글쎄···. 물론 범인은 아득히 뛰어넘었지만···.”
“천무지체는 소문만 무성하지 정확한 진단법도 특성도 알려진 게 없네. 절맥의 재능이나 음양체처럼 뚜렷한 증상도 알려진 게 없고. 그저 소문만 무성할 뿐이지.”
“그래도 설마 천무지체라니. 그렇기야 하겠는가?”
“그래, 천무지체라니 허황되기는 하군. 그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이지. 이런 어린아이가 그것도 겨우 이류쯤 되었는데, 이제 무공에 입문한 지 오 년이나 될까 한 아이가 나의 심득을 이해했다? 허허..”
“그러게 말이야.”
두 노인은 그저 연수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연수가 무아지경에 빠진 지 두 시진이 지났지만, 연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연수의 사부는 이제는 초조한 눈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혹 위험한 게 아닌가?”
“그렇지는 않을 걸세. 나도 한창때는 몇 시진씩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두르거나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서 있기도 했다네.”
“그래? 보통 그럴 때는 무엇을 깨달았나?”
“대중없다네. 초식에 대한 깨달음일 때도 있었고, 내력의 운용에 대한 깨달음일 때도 있었고, 무언가 알 것 같긴 한데 설명할 순 없는 깨달음일 때도 있었네.”
무황의 말에 사부는 생각에 잠겼다.
사부가 걱정하건 무황이 기대하건 연수의 의식은 무황에 심득을 보며 떠오른 생각에서 파생되며 이어지는 단초들에 빠져 있었다.
‘아니야! 경신의 공부가 단순히 몸을 가볍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단순히 빠르게 공격한다 해도 강력한 일격이 될 리가 없어. 그런데 어째서 경구탄권은 가볍고 빠르게 일권을 날려 강력한 공격을 만드는 초식인 거지? 속도가 빠르기 위해서는 가벼워야 하고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에 비해 더 빠른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에 비해 더 강력한 일격이 되는건데.. 아!’
연수가 무언가를 깨달은 그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경구탄권!”
사부와 무황은 갑자기 소리를 치며 벌떡 일어나는 연수를 보며 같이 벌떡 일어났다.
“경구탄권이 왜? 무엇을 깨달은 것이냐?”
“경구탄권이 무엇인가? 초식인가?”
사부는 연수에게 묻고 무황은 사부에게 물었다.
연수는 짧고도 깊었던 자기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순간 당황하여 사부와 무황을 번갈아 쳐다보았는데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죄송해요. 혼자 생각이 깊어져 입 밖으로 나와버렸네요.”
무황은 연수의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자신도 경험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너는 단순한 생각을 한 게 아니다. 무아지경에 빠져 무인이라면 누구나 겪고 싶어 하는 깨달음의 순간에 있었다. 자그마치 세 시진을.”
세 시진이라는 말에 연수는 깜짝 놀랐다.
반 각이나 되었을까 싶은 사색을 즐겼는데 세 시진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부는 궁금증을 누를 수가 없었는지 재차 연수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느냐? 경구탄권이 왜?”
연수는 잠시간 당황하였던 마음을 추스르고는 대답했다.
“그게, 심득에 있는 경신의 공부에 대한 한 줄의 심득을 읽었는데 문득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이 서로 다른 상반된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여 무엇이 더 강한 일격이 되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득에는 분명 ‘쾌와 중은 다르나 그 결과는 같으니’ 라도 되어있지만 그게 어떻게 같으냐는 생각을 하던 중에 가볍고 빠른 것이 어떻게 무거운 중과 같은 일격이 되냐는 생각을 하다 보니 여러 생각이 떠올랐고, 그러다 문득 빠르면 빠를수록 무거운 일격이 되는 게 아닐까? 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연수의 정리되지 않은 말에 사부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끝이더냐?”
“예.”
“그건 도무지 무슨 해괴한.. 또 경구탄권이 무슨...”
“가볍고 빠르게 내지르는 경구탄권은 바위도 부수는 위력이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사부는 여전히 연수의 깨달음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저 무황만이 연수의 말에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말로는 정확히 표현되지 않을걸세. 하지만 결과는 확실하겠지. 연수야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겠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는데 밝은 달이 중천에 떠 있는걸 보고 시간의 흐름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연수였다.
밖으로 나온 연수는 자신의 깨달음을 어떻게 어떤 초식으로 보여야 할까 생각을 하다가 한쪽에 쌓여있는 장작을 한 아름 안고 와서는 힘껏 공중으로 던졌다.
-팟팟! 퍼버버버벅!-
공중에 떠오른 여러 개의 장작이 연수의 가벼운 주먹질에 그 자리에서 잘게 깨져 나갔다.
순식간에 떠오른 장작들이 잘게 다져진 나무 조각들이 되어 주위로 휘날렸다.
“허···.”
사부는 연수의 주먹질에 부서져 흩날리는 나무장작을 보며 기가 찼다.
물론 자신도 내력을 끌어올려 나무장작쯤 박살 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연수가 한 것처럼 공중에 있는 장작을 그 자리에서 박살 내 퍼지게 할 순 없었다.
그제야 연수의 정리 되지 않았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강하면 강할수록 저항 없는 공중에 떠 있는 목표를 멀리 밀어 낼 순 있어도 부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빠른 일격은 저항 없는 공중에 있는 목표마저도 그 자리에서 부숴버리는 일격이 가능하다.
무황은 연수의 시연을 보고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황이 검을 익힐 때 굳건한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를 베는 것 보다 떨어지는 낙엽 하나를 베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 것은 자신이 일류고수를 벗어날 무렵이었다.
무황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기신의 조화가 깨어졌구나.”
사부는 깜짝 놀랐다.
“그 무슨 말인가? 정기신의 조화가 깨졌다니!”
“저 아이의 정이 이미 기와 신을 뛰어넘었네.”
“허···.”
사부가 허탈하여 말문이 막히자 연수가 물어왔다.
“사부께서 가르침 주시길 정기신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고수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데 제 정기신의 조화가 깨어졌다면 저는 고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까?”
무황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무인이 발전하는데 정기신의 조화는 아주 중요하다. 네 사부처럼 정과 신이 앞서 있고 기가 모자라 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 하나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황은 잠시 자신의 친우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을 이어갔다.
“한데 너는 좀 다르구나. 너는 이미 네가 할 수 있는 한 기와 신을 단련했다. 아마 그 이상은 세상 누구를 데려와 너와 같은 상황을 똑같이 준다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네게 놓인 상황에서 너는 최대치의 단련을 통해 최대치의 성장을 이루어 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한순간에 정이 넘어 버린 것이다. '정이 깨닫고 기가 받쳐주며 신이 행한다.' 정파의 정설이지, 하지만 너의 정은 네 기와 신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앞서갔구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너의 기와 신은 언젠가는 정을 따라잡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말아라.”
무황의 말에 연수와 사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사부가 말했던 고수라는 경지는 결국 절정의 경지다. 아무리 명문에서 사사한다 한들 모든 무인이 절정의 경지에 들 수는 없다. 절정의 경지에 든다는 것은 깨달음이 동반되어야 하고 그 깨달음을 뒷받침해 줄 기와 신이 있어야 하지. 하지만 기와 신이라는 것은 반대의 노선을 걷기 마련이다.”
순간 연수의 눈에 의문이 들었다. 막 연수가 입을 열어 질문을 하려 하자 무황의 말이 이어지며 연수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늙는다. 늙을수록 기는 늘어 가겠지만 신은 노화되어 약해지지. 그렇기에 기와 신이 받쳐줄 수 있을 때 절정의 경지에 드는가 그렇지 못한가는 매우 중요하다. 한데 너는 네 사부에 비하면 까마득히 젊다. 지금 네 나이에서 정이 앞선다는 것은 크게 해로운 일이 아니야. 마교의 고수 놈들은 기가 신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앞서는 데에도 고수가 많다. 그러니 꼭 그 조화가 깨어졌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네가 깨달은 것에 대한 결과가 네 생각만큼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무리하거나 동요하여 흔들리면 안 된다.”
무황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연수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기대가 되기도 하는 복잡한 그의 심경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어떤 무인들은 그로 인해 자신을 해치기도 하는 결과를 보이기도 하니... 마음을 여유롭게 갖고 큰 깨달음이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천천히 가거라. 무리하게 기와 신을 단련하려 하지도 말고. 네놈을 보니 그것이 가장 걱정이야. 명문의 자랑이라는 재능있는 후학들을 많이 보았지만, 네놈만큼 무식하게 수련하는 놈은 사실 본 적이 없다. 폐관에 들어야 겨우 네놈만큼이나 할까? 여태도 하루 자는 시간 두 시진과 밥 먹고 대소변 보는 시간을 빼면 무공수련에만 전념하겠지. 안 봐도 훤하구나."
무황의 쉴새 없이 쏟아지는 긴 조언에 연수는 마음을 놓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연수의 사부 또한 무황에게 포권을 했다.
“모자란 나 대신 가르침을 주어 감사하네.”
무황은 대경하여 사부를 말렸다.
“어허, 이 친구 왜 이러시나. 어서 물리게.”
“아니야, 어디 자네 같은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인가?”
“됐네 됐어.”
연수는 무황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노야, 내일 날이 밝거든 육합권 대련으로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까요?”
순간 무황의 눈썹이 실룩였다.
“유, 육합권?”
“예. 전처럼 서로 간 내력은 사용을 금지하고요. 이번에 깨달은 바가 있어 육합권에 그 깨달음을 녹여 완전히 하려고요.”
무황은 당황했다.
몇 년 전 이미 연수의 육합권은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경지였다.
그런데 그때보다 키는 한 뺨이나 더 크고 신체는 다 자라 완연한 무인의 몸이 되어 강해진 주제에 늙은 자신과 맨손으로 드잡이질하려 한다.
이번에 깨달은 것을 이용까지 한단다.
‘이런 못 된 놈이 누굴 망신 주려고···.’
“큼큼, 그 육합권으로 얼마나 깨닫겠느냐? 네 사부에게 들으니 암수검을 익혔다고? 단검술과 권법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암수검을 쓸 일이 많을 텐데 삼재검으로 상대해 줄 테니 암수검을 통해 배워 보거라.”
연수는 단검술과 권법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무황의 말에 깨닫는 부분이 있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수는 허리를 숙여 무황에게 인사했다.
“그래. 걱정 말아라. 네놈이 싫증이 날 때까지 봐줄 터이니.”
무황은 연수가 수긍하자 속으로 한시름 돌리며 안심 했다.
그런 무황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수는 부서진 장작 조각을 치우고는 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