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연수는 다시금 머릿속에서 사파인이 장호진을 공격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장호진의 검초를 가볍게 피하며 파고들어 그의 단전에 손바닥을 닿을 듯 말듯 대는 사파인.
잠시 후 장호진이 피를 토하며 비명과 함께 나자빠지는 순간 사파인의 손이···.
‘그래 그저 가져다 대기만 했는데 장호진이 나자빠졌지. 그리고 그 고수의 손이 푸른빛을 띠듯 잠시간 빛났어. 그건 장법이 아니야. 도대체 무슨 수법이지? 그에게 내력을 빨린 무사들은 쭈글쭈글해져 칠공에서 피를 뿜고 죽었는데···. 암검대의 대장은 어떻게 당한 걸까?’
비무에 대한 생각으로 집중하던 연수는 중년인의 기척을 느끼고는 사색을 멈췄다.
중년인은 기다란 금쟁반에 전표와 은자 금자를 담아 양손으로 공손히 들어다 연수의 앞에 놓았다.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연수는 천 냥짜리 전표 2장과 100냥짜리 전표 7장 오십 냥짜리 전표 1장 십 냥짜리 전표 4장을 확인하고는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옆으로는 금자와 은자가 열 개씩 놓여 있었고 그 위로 청색과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고급스러워 보이는 전낭이 놓여져 있었다.
“전낭까지 주는군요?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저희 전장을 이용해 주시는 손님들에 대한 작은 선물입니다.”
“잘 쓰겠소.”
따로 전낭이 없던 연수는 돈을 찾아 하나 사야겠다 싶었는데 잘됐다 싶어 은자는 청색에 금자는 붉은색 전낭에 담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럼 이만.”
돌아서는 연수의 등에 대고 중년인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또 찾아 주십시오.”
연수는 전장을 나서서는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여기저기 객잔과 반점이 보이기는 했지만, 비무의 여파인지 사람들이 많아 발을 디디기 힘들어 보여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연수였다. 그런데 때마침 골목에 작은 노점상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길래 돌아보니 노파가 국수를 팔고 있었다.
연수는 노점으로 다가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국수 하나 말아주세요.”
노파는 반가운 얼굴로 국수를 말았다.
“금방 말아 드리리다.”
노파는 금세 국수 하나를 말아주었는데 막 썰어 넣은 파향이 진한 국수는 제법 맛이 좋았다.
“양이 참 많네요.”
“첫 손님이다 보니 반가워 넉넉히 말아 넣었다오.”
이미 해가 중천을 지나 기울고 있는데 자신이 개시 손님이라는 말에 연수는 동정심이 일었다.
“장사가 잘 안되나 봐요?”
“요즘은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가 않다오.”
“주변에 사람들이 제법 다니는 것 같은데···.”
“글쎄 내 솜씨가 부족한 탓이지요.”
노파의 국수는 깊은 맛은 없더라도 그 맛이 제법 뛰어난 편이었다. 적어도 연수 자신이 먹어본 바로는 그랬다. 그런데 장사가 잘 안 된다니 의아한 연수였다.
그때 웬 건장한 사내들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연수가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덩치가 큰 사내 셋이 노점을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점이 있는 골목 안쪽을 살펴보았지만, 딱히 사내들이 갈만한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연수는 곧 벌어질 일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연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노파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늦었구나.”
세 명의 사내중 얼굴에 사선으로 자상이 나있는 험악한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 방긋 웃으며 답했다.
“허가네 여편네가 허리가 안 좋아 그 집 일들을 좀 봐주느라 늦었수. 오늘은 어찌 개시는 한 모양이우?”
“그러게 말이다. 이 손님분이 개시는 해 주었어.”
험상궂은 사내는 막 일어나려 어정쩡한 연수를 보며 양손을 들어 만류해 보였다.
“우리 때문이라면 굳이 일어날 필요 없어. 편히 들라고, 우리도 식사나 할까 해서 온 거니까 편히 들어. 이 근방에서는 어떤 곳보다 이 할멈 국수가 제일이라고.”
말을 마친 사내 다른 사내들과 좁은 의자에 다닥다닥 붙어가며 앉았고 노파는 익숙하게 국수를 말아 사내들 앞에 내었다.
사내들은 국수를 먹으며 노파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요즘 손자놈 몸은 좀 괜찮수?”
“황 의원이 약을 바꿔 쓰면서 많이 좋아졌어.”
“다행이네. 그런데 괜히 우리가 들락거려 손님들 떨어지는 건 아니고?”
“끌끌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네만 자네들이 와서 팔아주는 매상이나 그 전이나 크게 다르지도 않아.”
“그럼 다행이우. 우리야 싸고 양 많고 맛도 좋은 할멈 국수가 제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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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이 노점의 국수는 양이 참 많았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배곯고 다니는 거야. 무슨 일을 하든 배가 든든해야 일이 잘 풀리지.”
“아직도 동네 거지 아이들에게 공짜로 국수 말아주고 그러우?”
“국수장사 해서 아들 둘 키워 장가 보냈어. 한 놈은 죽었지만. 남편도 없이 나 혼자 그만큼 해낸 게 어디 내 잘나서 였을까? 다 사람들이 내 국수 팔아주고 도와줘서 그런거야. 배곯고 다니는 애들 국수 한 그릇 말아줄 여유도 없으면 내가 천벌을 받지.”
노파의 말에 사내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랑 우리 형님도 어릴 때 할멈 아니었으면 아사했을지도 모르지.”
“쓸데없는 말 말고 다 처먹었으면 어여가 이놈아!”
“아직 반이나 남았수.”
사내와 노파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연수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잘 먹었습니다. 얼마에요?”
“20문 입니다. 맛은 괜찮았나 모르겠네.”
“맛있었어요.”
연수는 대답하며 전낭에서 은자 하나를 건네어 주었다.
은자를 본 노파는 살짝 당황했다.
“저기 제가 개시다 보니 거스름돈이···.”
“됐습니다. 맛있는 국수 잘 얻어먹고 갑니다.”
연수는 그대로 꾸벅 인사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런 연수의 등 뒤로 당황한 노파가 연수를 불러세웠다.
“이, 이보시오.”
그런 노파를 사내가 말렸다.
“놔둬요. 할멈 국수가 맛있다고 웃돈 주겠다는데 뭘.”
노파는 멀어지는 연수를 잠시 바라보다가는 연수가 준 은자를 손을 펴 확인했는데 분명 은자를 받았건만 자신의 손에는 금자가 쥐어져 있었다.
“헉!”
노파가 대경하자 노파를 바라본 사내들도 놀랐다.
분명 젊은 놈이 노파에게 은자를 건네는 것을 자신들도 똑똑히 보았건만 그 은자가 왜 금자로 변해있단 말인가?
“이, 이게···!”
노파와 사내들은 연수가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그 짧은 사이 연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노파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을 모으고는 중얼거렸다.
“신선님, 신선님, 고맙습니다.”
노파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들은 짧은 시간에 사라진 연수를 떠올리며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고수였구나.’
연수는 금자 한 냥짜리 국수를 먹고는 기분 좋게 발길을 재촉하여 마을을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사람들에게 물은 결과 빠르면 한 달이면 서호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수는 훌쩍 자란 소개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노숙을 각오하고 발길을 옮기는 중이었다.
며칠을 관도 근처에 먼지 날리는 길바닥에서 노숙하며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연수의 꼴이 며칠 만에 옛 거지꼴과 비슷해 지고 있었다. 그저 관도 만 따라 걷다 보니 마을이 나오지 않으면 별수 없이 걷고 또 걷다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걷는 것밖엔 연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루 정도만 노숙하면 다음 마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말이라도 살 걸 그랬네.’
한참을 더 걸었는데도 여전히 마을은 보이지도 않고 해는 뉘엿뉘엿 기우는 것이 오늘 또한, 노숙해야 할 것 같았다.
연수는 이제는 얼마 남지도 않은 육포 부스러기를 입에 털어 넣고는 관도 옆으로 물러나 일찌감치 노숙 준비를 했다. 3일 동안 몇 시진 자지도 않고 걸었더니 몸이 축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느껴졌다.
“역시 말을 샀어야 했어.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노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건만 돈 좀 아껴 보려다 몸이 고생스러운 연수였다.
나뭇가지며 마른 나뭇잎을 주워다가 놓고 얼마 남지 않은 물통을 흔들어 본 연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다못해 운기라도 좀 하면 몸에 쌓인 피로라도 몰아내 개운하겠것만 누가 지나다닐지 모를 이런 야외 한가운데서 운기를 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더 갑갑해졌다.
“차라리 일찍 푹 자자 푹 자고 일어나서 걷자.”
처음 구주를 떠날 때만 해도 천리견보로 이동을 하면서 가면 금방 이동할 줄 알았으나 막상 이동하다 보니 단전이 비었을 때 함부로 운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떠오른 연수는 당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계속 걸을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다음 마을이 금방 나오겠거니 하고 걸음을 옮긴 것이 오판이었다.
조그만 모닥불을 피워놓고 지는 노을을 보며 일찌감치 드러누운 연수.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데 연수의 감각에 무언가 걸렸다. 아주 작은 거슬림 같은 감각이었지만 연수는 그 기운을 알고 있다.
‘투기!’
눕힌 몸을 벌떡 일으키며 두 눈을 감고 이목공을 펼쳐 보는 연수.
그런 연수의 두 귀에 무인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덟···. 아니 아홉 명이야. 한 명의 고수와 여덟 명의 고수가 싸우고 있어.’
연수는 고민했다. 가서 어떤 일인지 살펴 보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자던 잠을 자는 것이 좋을지.
‘사부가 싸움 구경은 놓치지 말랬는데···.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고···.’
낮의 비무와는 성격이 다른 구경이다. 자칫 잘못하면 싸움 구경하려다 저승 구경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연수는 몸을 일으켰다.
대영심공의 공능을 믿는 연수였다.
연수는 대영심공을 이용하여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투기와 병장기의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이동했다.
-깡깡!
“크크크 내 기억으로는 남궁가와는 원수진 일이 없을 텐데?”
사내의 말에 사내와 한참을 싸우던 일곱명의 검수 뒤로 여유있게 있던 청년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내 앞에 당신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남궁가에 죄를 지은 것이오.”
청년의 오만한 말에 남자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뭐라? 네놈 따위가 가문의 배경에 취해 미쳤구나.”
“글쎄요, 그건 당신을 내 앞에 무릎 꿇린 후에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더는 손속에 사정은 없을 게다!”
연수는 나무 위에서 장내를 살펴보며 품에서 꺼낸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남궁세가? 남궁세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식새끼 교육은 엉망이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딱히 원한 맺은 일도 없어 보이는데 황제라도 되는 양 떠드는 청년이 재수 없는 연수였다.
‘그런데 인연인가? 저 양반을 여기서 또 보고.’
연수는 며칠 전 구주에서 비무를 하던 흡성신공을 익힌 사파인을 알아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같은 사파인이자 천 일 중의 진전을 이은 고수이다 보니 호감이 가는 연수였다.
연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장내의 싸움은 치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