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대장실 앞에 선 연수는 인기척을 내었다.
“대장님 황이석입니다. 부르셔서 찾아 왔습니다.”
“들어와.”
대장실에 들어온 연수에게는 시선을 두지 않고 눈앞에 서류만 읽고 있는 대장.
연수는 어색한 침묵 속에 묵묵히 대장실을 둘러보며 기다렸다.
그런 연수를 힐끗 보는 대장의 눈썹이 실룩였다. 읽던 종이 뭉치를 탁! 하고 소리가 나게 책상 위로 팽개치는 대장.
“영호와 따로 비무를 했다고?”
“예.”
“영호가 많이 다쳤다는데?”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무인끼리 비무를 했고 한쪽이 조금 다쳤다. 이상입니다.”
대장의 낯빛에 시리도록 차가운 표정이 어렸다.
“조금? 온몸에 혈관이 다 터져서 전신에 검은 멍이 멀쩡한 곳보다 많다.”
“뼈는 상하지 않게 했습니다.”
대장의 이마에 두꺼운 핏줄이 잡혔다.
“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오히려 손속에 정이 과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쾅!
대장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책상을 내려치며 연수를 노려봤다.
“지금! 나랑 말장난하나?”
“아닙니다.”
“영호가 네게 무얼 그렇게 잘못 했길래? 지금 묵연대의 무사하나가 보름을 누워있게 생겼다. 묵연대의 전력 손실이고 떨어진 사기와 기강은 바로잡으려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 아나?”
“다른 무인의 사문을 모욕하고도 죽지도 않았고, 병신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교훈을 줄 정도의 너그러운 손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연수가 들어오고 난 후 처음으로 대장의 얼굴이 풀렸다.
“사문을 모욕해? 영호가 네 사문을 알던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파라는 것밖에는.”
“어떻게 사문을 모욕했길래?”
“입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사부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랬다고? 후유.”
대장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됐다. 나가봐.”
“끝인가요?”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나?”
“그래도 처벌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처벌은 잘못한 자에게 주는 것이지. 상벌이 정확하지 못한 상관만큼 무능한 상관도 없다.”
‘이게 아닌데···.’
연수가 나가지 않고, 미적거리자 대장의 시선이 다시 연수에게 돌아갔다.
“할 말이 남았나?”
“제 손속에는 부끄러운 점이 없으나 조직에 폐를 끼쳤다는 생각은 지우기 힘듭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묵연대의 기강과 사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다른 선배들이 납득할 만큼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장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서?”
“처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내가 잘못이 없다고 판단했는데도?”
“저의 잘못 유무보다는 묵연대의 기강과 사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좋다. 네 뜻이 그렇다면 오늘부터 두 달간 종각 근무를 명한다. 두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종각 근무를 서야 하고 절대 다른 무사에게 대리 근무를 시키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겠다.”
“옛!”
“나가봐.”
“옛!”
연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대장의 집무실을 나섰다.
‘됐다.’
연수는 입매를 비틀며 집무실을 등지고 숙소로 돌아와 근무 준비를 했다.
실과 바늘 종이를 가죽 주머니와 소매에 잘 넣어 놓은 연수는 근무교대를 위해 근무지로 이동했고, 경계를 서려고 나온 무사들에게 해당 사항을 전달하여 근무표가 바뀌게 된 연유까지 설명을 마쳤다.
“쯧쯧, 두 달간이나 종각 근무라니, 좀 심하네. 영호 그놈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라며?”
“묵연대의 기강이 있으니까 이 정도는 달게 받을 생각입니다.”
“무슨 특별히 하극상도 아니고 겨우 비무에서 손속이 과했던 것뿐인데.”
‘이 양반이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오지랖이···.’
연수는 속마음과 달리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단체생활이지 않습니까?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겠죠.”
“그래, 너무 대장 원망하지 말고, 고생해라. 영호 그놈 보면 내가 갈궈 주마.”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래, 어쨌든 네 덕에 한동안은 근무설 일이 없겠다.”
연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수와 같이 근무를 서기 위해 나온 무사는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그놈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지.”
“하하, 그러게요. 제 사부님 욕만 하지 않았어도 그냥 넘어갔을 텐데 순간 눈이 뒤집혀서요.”
무사의 눈에 경멸이 서렸다.
“사문을 모욕하더냐? 그 새끼가?”
“예, 뭐···. 그러더라고요.”
“하! 그 새끼 그거 정신 못 차리네. 뒤지지 않은 게 용하구먼.”
“묵연대 무사인데 죽일 수는 없죠.”
“아휴, 그래. 잘 참았다. 그런데 대장에게는 제대로 해명 한 거야? 대장 성격에 처벌을 내릴 양반이 아닌데?”
연수는 뿌듯한 얼굴로 씩 웃었다.
“예. 처벌을 내릴 생각이 없다 하셨어요. 그래도 선배 무사를 눕혀놨으니 그에 대한 책임은 지어야죠. 단체생활의 기강이 무너지면 되겠습니까?”
무사는 대충 일련의 상황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어휴, 이 멍충아 우리 묵연대에 그걸 불만 삼을 놈은 없다. 적어도 내 알기로는 그런 놈을 묵연대에서 본적은 없어. 영호 저 새끼가 유난히 속 좁고 성격이 지랄 맞은 것뿐이지.”
“어쨌든 저는 이게 편합니다.”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나마 두 달이면 뭐 어떻게 버틸 수는 있을 거다. 마음 독하게 먹어라.”
“예.”
연수는 대답하고는 허리를 숙여 종아리를 긁었다.
종아리를 긁은 손이 툭 하고 퉁겨지자 종이가 달린 바늘이 소리 없이 땅에서 이촌 간격위로 날아 안채의 문기둥에 박혔다. 갈색 실과 갈색 종이가 언뜻 자세히 보지 않고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연수가 어깨를 주무르자 연수의 다리에 달린 작은 실 고리를 통과하여 이어진 실 끝이 연수의 귀에 걸렸다.
순식간에 안채의 나무기둥에서부터 연수의 무복의 실 고리를 통과하고는 연수의 귓바퀴에 걸린 실.
연수는 왼쪽 귀에 실을 걸어 놓고는 오른쪽에 서 있는 무사의 움직임에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며 자신의 왼쪽 귀가 절대 무사의 시야에 닿지 않게 교묘히 움직였다.
무사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틀며 사각을 지켜 내는 연수.
그러면서도 이목공을 운행하며 안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보통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었다.
‘만만치 않네. 하다못해 가만히만 있어 줘도 좋겠구만, 가뜩이나 방 안 소리라 잘 안 들리는데···.’
연수의 귀로는 방안에서 대화하는 모자의 음성이 뜨문뜨문 들어왔다.
“민아, 견뎌야 한다······. 알겠니?”
“예, 어머니 제 걱정은······. 하겠습니다.”
“... 그러니 후에······.”
“그건 제가······. 하지 않으셔도···.”
‘아무래도 안채 안으로 연결을 해야겠는데?’
한참을 도청을 시도하던 연수의 시선에 저 멀리 교대 무사들이 걸어 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연수가 왼쪽 다리와 손을 슬쩍 흔들자 안채의 정문 기둥 낮은 곳에 박혀 있던 바늘이 소리 없이 뽑혀 나와 연수의 다리에 있는 실 고리를 통과해 소매 안으로 사라졌다.
근무교대를 마친 연수는 보름 동안 같이 근무서는 무사의 성향에 맞춰 틈틈이 도청을 시도했지만 썩 좋은 결과는 없었다.
연수가 눕혀놓은 영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던 무사들은 저마다 연수와 근무를 설 때마다 이것저것 캐물었고 연수에게 조언과 여러 가지 말을 걸어와 도무지 이목공에 집중을 할 수도 도청을 시도하기도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무슨 놈의 무인 놈들이 이리 말이 많아? 근무 중에 이렇게 떠들고 수다나 떨라고 한 달에 은자 40냥씩 쥐여 주는 줄 아나?’
이목공은 가뜩이나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면 정신이 도통 흐트러져 도청하기가 더 힘들어졌던 연수는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두 시진을 주기로 교대를 반복하는 것이야 별 힘들 것도 없었고, 틈틈이 수련과 잠까지 부족하지 않게 자던 연수지만 이 무사들의 수다에는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사들 입장에서는 반수를 통해 들은 황이석이란 별 볼 일 없는 무사가 제법 도법이 날카롭던 일류에 다다른 영호를 거동도 못 할 정도로 두들겨 팼다 하니 절로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대로 도청으로 훔친 강진령의 가전 구결을 겨우 반도 못 외우고 그나마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풀이가 되질 않고 있는데 금쪽같은 도청 시간마저 대부분 활용을 하지 못하다 보니 심기가 점점 불편해지는 연수였다.
그런 연수가 근무지로 나가자 그곳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반쯤 가신 갈색 멍이 얼굴에 얼룩처럼 번진 무사.
“오! 거동 할 만 한가 보네?”
연수가 알은체를 하자 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영호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근무를 서던 무사들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렸지만, 영호는 그저 도끼같이 뜬 눈을 부라릴 뿐 차마 입을 열어 뭐라 따지지는 못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수고해라.”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품고 근무를 마치고 돌아서는 무사들.
연수는 영호와 둘만 남자 얼굴에 품고 있던 웃음기를 쫙 뺏다.
“어이, 한영호.”
대뜸 나오는 차가운 반말에 영호의 어깨가 움찔했다.
“...”
“무시하냐?”
“아니, 무시하는 건 아니야.”
“그래, 사람 함부로 무시하다가는 큰코다치는 게 무림이지. 그러면 안 된다.”
“잘 알지···.”
“뭐 서로 좋은 말 오갈 사이는 아닌 거 같으니까 조용히 근무만 서고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자. 무슨 말인지 알지?”
“그, 그게···.”
“왜?”
우물쭈물하는 영호의 표정에서 당혹감을 읽어낸 연수,
“저기, 실은 나도 사 개월 종각 근무를 명받아서···.”
“너도?”
“어···. 너랑 같이 종각 근무 서야 하는데···.”
‘허 거참, 그 양반 진짜 악취미일세.’
연수는 대장의 일 처리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만약 영호의 입장이었다면 장원을 박차고 나갔을지도 몰랐다.
얕잡아본 상대에게 두드려 맞은 것도 짜증 날 텐데 나이 어린 그 상대와 자그마치 한 달 보름을 하루에 여섯 시진씩 붙어 있어야 한다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연수가 슬쩍 영호의 안색을 살피니 역시나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구나 한번 제대로 맞은 덕에 연수에 대한 공포감도 꽤 커졌는지 연수의 눈도 제대로 못 보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보니 이제는 슬슬 동정심 마저 생기는 연수였다.
“너나 마나 서로 말 섞거나 하기 불편할 테니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소임에 충실하자. 나도 네가 불편하니까 너는 삼보 앞에서 나는 네 뒤에서 딱 근무만 서자. 괜히 눈 마주치면 짜증 나니까 돌아보지 마라.”
지금까지의 경계는 두 무사가 나란히 서서 정면을 주시하며 하는 경계의 형식이었다.
딱히 그리 하도록 정해진 바는 아니지만, 세평 남 짓 정해진 근무지 중심을 두 무사가 서서 경계하던 것이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일렬로 서서 경계근무라니 들어 본 적이 없는 방식이었다.
그리 서게 되면 황이석의 시야를 자신이 가리게 된다. 더구나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고 무서운 놈에게 자신의 뒤를 고스란히 내주어야 하니 영 불편하지 않을 수 없는 영호였다.
“그러면 내가 네 시야를 가려서···.”
“그래서?”
“아니 그냥 네가 경계하기 불편할 것 같아서···.”
“안 불편해. 너랑 나란히 서 있는 게 더 불편하다.”
“그래? 그러면 네가···.”
“맞을래?”
“...”
“가라.”
영호는 똥 씹은 표정으로 연수의 삼보 앞으로 나서서는 정면을 주시했다.
뒤에서 연수가 자신의 뒤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뒤통수가 근질거리고 몸이 긴장되었다.
혹여 기습을 가하는 것은 아닌지 무슨 장난질을 하는 건 아닌지 점점 불안해지고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니 일각이 하루 같은 감각이었다.
영호가 잔뜩 긴장하여 몸이 굳는 걸 보고 연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나름대로 고수라는 놈이 잔뜩 긴장해서는 몸이나 굳고, 어휴, 저런 정신 상태로 꼴에 무인이라고···.’
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뒤를 돌아봤다.
이십 여장 떨어진 곳에 있는 안채는 정문이 단단히 닫혀있었다.
연수는 다리를 긁는 척 손에 들린 바늘을 다리에 매어 둔 실거리에 슬쩍 넣고는 바늘을 날렸다.
자연스럽게 일어서 귓바퀴에 슬쩍 실을 걸고 이목공을 운행하는 연수.
평소와 다르게 모든 정신을 집중하자 제법 안의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