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어이, 너 제법 무공을 익혔나 보네?”
연수는 여인을 잠시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래 저래 익혔지요.”
“사문은 어디야? 같은 사파라고 했으니 사파겠지?”
“사정이 있어 사문은 밝힐 수 없지만 사파인인 것은 맞지요.”
“그래? 그런데 용케 그 몸으로 무공을 배웠네.”
“...”
여인은 잠시 연수의 눈치를 살피고는 연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해, 미안해. 널 놀리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쓰니 낭자야말로 신경 쓰지 마시오.”
“그래? 사내라면 그래야지.”
“그런데 뭐 하나 물어도 되겠소?”
연수는 젓가락질하며 물었다.
“그래. 편히 물어봐. 본녀가 친히 대답해 주지.”
“어째서 그리 뻔히 보이는 남장을 한 거요?”
-쾅!
여인은 탁자를 내려쳤다.
“흥! 누가 남장을 했다는 거야?”
“그럼 그 수염은···.”
“이건 사무진독공을 익히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 중 일부일 뿐이야!”
“그 독공을 익히면 여인이 수염이 난다는 말이오?”
여인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그래! 성취가 깊을수록 많이 길게 수염이 나지. 그뿐만 아니라 이 손등과 팔뚝에 독성이 모여 혈관과 피부를 이리 바꾸어 놓는다.
‘흉측하군.’
“그렇군요.”
연수의 반응에 여인의 아미가 치켜 올라갔다.
“이놈아! 병신 주제에 누굴 그리 불쌍히 쳐다보느냐!”
“그런 적 없소.”
“정말? 정말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본인이 선택하고 익힌 것을 무엇이 불쌍하단 말이요?”
“킥킥킥. 그래 내 선택으로 이 꼴이 되었으니 나는 불쌍한 것이 아니지! 에헴!”
‘특이한 여자네?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해 보이는데 오래 말 섞지 말아야겠다.’
여인은 잠시 연수를 살피더니 연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점 한번 엄청 크네. 무슨 점이 그리 커?”
“내 점이 어찌 이리 큰지 난들 알겠소?”
“그래? 그런가? 그런 것도 같고. 그럼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야?”
연수는 잠시 여인을 살펴보았다.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섞고 싶지는 않으나 대답을 안 해주면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어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는 북경을 들러 갈 곳이 있소. 낭자는 어디로 가시오?”
“나? 나는 딱히 갈 곳이 없어. 발길 닿는 대로 다니고 있지.”
“그렇군요. 그럼 나는 피곤해서 이만 올라가 보겠소.”
여인의 눈매가 좁아졌다.
“어이, 못난이 날 피하는 거야?”
“피할 이유가 뭐 있겠소?”
“정말 아니야?”
“아니요.”
“좋아! 그럼 올라가 봐.”
연수는 몸을 돌려 방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제정신인 여자 같지는 않았기에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올라온 연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부터 했다.
독을 쓰는 여인을 보다 보니 혹시 몰라 중독은 되지 않았는지 몸에 이상은 없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별 이상은 없군. 내일 새벽이 되면 서둘러 떠나야겠어.’
오래도록 노숙으로 인해 지친 여독을 며칠 쉬며 풀고 이동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여인과 더 엮이지 않으려면 빨리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한숨도 자지 않고 운기 한 연수는 해가 뜨기 전 말을 끌고 영창 현을 떠났다.
꼭두새벽부터 말을 달려 떠나는데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연수의 시선에 길게 늘어진 타인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말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자 건장한 흑마에 탄 채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달려 오고 있었다.
만약 해가 뜨지 않았다면 그 몰골만 보고도 연수는 놀라서 뒤집혔을 것이다.
풀어헤친 머리는 산발이고 눈은 희번득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위축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화룡점정은 산적마냥 나 있는 거무스름한 수염이었다.
도무지 조화가 안 되는 저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없어 연수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는데 가뜩이나 앞서있다 보니 쫓기는 마음이 들어 더욱 압박감을 받았다.
‘젠장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리 쫄리지? 하긴 저 몰골을 보고도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머리는 왜 저따위로 풀어놓은 거야?’
연수는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놈아! 살만 쪄고 느려져서! 빨리 달려라! 더 빨리 달려!”
달리던 말이 더 속도를 내는데 길게 늘어진 여인의 그림자가 기괴한 움직임을 보여 뒤를 돌아보니 긴 채찍을 꺼내 들고 말을 다그치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휴, 진짜 꿈에 나올까 무섭네.’
연수는 여인의 흑마가 자신의 말보다 더 좋은 종자인 것 같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자 아예 말을 세웠다.
“워~워!”
말을 세워 말머리를 돌리자 흑마에 올라탄 여인또한 말을 세웠다.
‘역시 따라왔구나.’
연수의 앞에 흑마를 세우는 여인.
연수의 말 또한 보통 말들보다 덩치가 큰 편이었는데 이 흑마는 그보다도 더 크고 살이 쪄서 둔해진 연수의 말보다 우람한 근육을 자랑했다.
“날 따라서 오셨소?”
여인은 미간을 좁히며 듣기 싫은 높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이놈아 왜 나를 피해 도망갔지?”
“아니 도망을 가기는 누가 도망을 간단 말이오? 갈 길이 바빠 일찍 길을 나선 거지. 낭자와 나는 일행도 아닌데 먼저 떠난다. 인사라도 해야 한단 말이오?”
여인은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피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
“피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하면 왜 해도 뜨기 전에 아침도 거르고 길을 떠난 거지?”
“내가 일일이 낭자에게 설명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소?”
여인은 늘어진 채찍을 휘둘러 거둬들이며 출수 준비를 했다.
‘아 거 골 아픈 광년일세? 아휴’
“알겠소. 말해 줄 테니 그 채찍 좀 거둬 두시오.”
“날 속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왜 낭자를 속이겠소? 채찍은 좀 넣어두시오.”
여인이 채찍을 거둬 허리 허리춤에 차자 연수는 한숨을 쉬었다.
연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입매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내가 꼭두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은 쫓기는 몸이라 그렇소.”
“쫓겨? 누구한테 쫓긴다는 거지? 본녀한테 말해. 내가 다 쫓아버려 줄 테니.”
“남궁세가와 팽가에서 날 못 잡아 안달이 났소. 낭자께서 그 두 무가를 쫓아 줄 수 있겠소?”
여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남궁세가와 팽가? 그 두 집안이 왜 널 쫓는단 말이야?”
“얼마 전에 술을 먹는데 남궁가의 소가주놈과 팽가의 소가주놈이 귀령문의 무사들을 핍박하길래 욕을 한마디 해줬는데 귀밝은 남궁세가의 소가주놈이 그걸 들었지 뭐요. 해서 한바탕 붙었는데 내가 암수를 써서 그놈의 장심을 찢어놨소. 그러고 도망을 쳤으니 날 안 쫓으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니겠소?”
“하하하, 그놈의 장심을 찢어 놓았다고? 잘했구나. 잘했어. 그런데 어떻게 도망쳤지?”
“사파의 선배고수 분이 도움을 주셨소.”
“그래? 그런데 너! 정말 오지랖도 넓구나. 왜 여기저기 끼어들어 원한을 사지?”
“그렇게 타고난 걸 어쩌겠소.”
“그래? 그렇다면 본녀가 너와 함께 다니며 위험을 막아 주마.”
연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상대는 팽가와 남궁가요. 둘이서 무슨 수로 그들과 대적하겠소? 도망가는 게 상책이니 괜히 휘말리지 마시고 갈 길 가시오.”
“왜! 내가 못나서 같이 다니기 창피하다는 거냐!”
‘그것보다 네 정신 상태가 불안해서 달고 다닐 수가 없다 이 광년아!’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하고 편하다 보니 누군가와 동행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소.”
“그래? 그럼 이번 기회에 익숙해지는 것 또한 좋겠네.”
“휴~ 정말 나와 동행하려는 게요?”
“그래.”
“왜 나와 동행을 하려는 거요?”
“너는 등이 불편하니 사람들이 구박할지도 모르잖아. 거기다 남궁가놈들과 팽가 놈들이 너를 괴롭히려 찾고 있으니 괴롭힘당하지 않게 본녀가 지켜 주려는 거지.”
‘아···. 네 정신이나 좀 지키지 그랬니.’
연수는 고개를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있소.”
“뭔데?”
“함부로 출수하여 무공을 쓰지 마시오.”
“왜? 누군가 나와 너를 모욕하면 본때를 보여주어야지.”
“그러다 이목을 사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소. 북경으로 가는 이유도 팽가와 남궁가가 황궁이 있는 북경에서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걸 알기 때문인데 굳이 그런 곳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사서 좋을 것이 없소.”
“그러면 사람들이 너와 나를 구박할지도 모르는데?”
“그깟 구박 좀 당하면 어떻소? 이미 구박이란 구박은 어릴 때 질리도록 당해 봤소.”
연수의 말에 여인은 슬픈 눈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너는 어릴 때 구박을 받고 자랐구나?”
“그럼 천애 고아가 여기저기 구걸 다니는데 사람들이 구박을 안 할 리가 있소?”
“너 거지였어?”
“뭐 그렇소.”
연수는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여인을 보며 여인의 정신연령과 정신 상태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애 같은 면이 있군.’
“어쩔 테요? 조건을 받아들이고 동행할 거요? 아니면 그냥 갈 길 갈 것이오?”
“좋아! 본녀가 네 옆에 붙어서 너를 지켜 주지. 걱정하지 마! 이제는 아무도 널 구박 못 하게 해줄게.”
“그러니까 그걸 하지 말아 달라는 거 아니오. 아휴.”
“그래, 그래. 무공은 함부로 안 쓰면 되잖아. 쓸 때는 네 허락을 받고 쓸게.”
“독 또한 마찬가지요.”
“독도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않소!”
“아휴, 알았어. 독도 네 허락을 받고 쓸게. 그러면 됐지?”
“됐소, 약속한 거요?”
“그럼! 여아 일언은 가볍다지만 나는 내가 한 말은 꼭 지켜,”
“그럼 됐소. 가 봅시다. 그런데 그 머리 좀 어떻게 정리하면 안 되겠소?”
“응? 아, 급하게 널 따라나서느라 다 풀렸네.”
여인은 머리를 묶어 올리고 위로는 모자를 눌러썼다.
“이랴!”
연수의 말 옆으로 바짝 붙어 달리는 여인.
‘이상한 혹이 붙어 버렸어.’
“근데 너는 이름이 뭐야?”
“연수라 부르시오.”
“연수? 특이한 이름이네. 나는 공숙이야. 숙누나라고 불러.”
“나이가 몇인데 누나라는 거요?”
“아휴, 당연히 내가 더 무공이 높으니 누나지.”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그야 당연히 척 보면 알지. 너도 제법 무공을 연마한 것 같지만, 넌 몸이 조금 불편하잖아.”
뒷말을 조용히 속삭이는 여인을 보며 연수는 피식 웃었다.
“그리 속삭인다고 안 들리겠소?”
“히히 그래도 남이 들으면 네가 속상하잖아.”
“여기 남이 누가 있소?”
“그런가?”
“됐고 잘 따라오시오.”
연수는 박차를 가하며 말을 달렸다.
하지만 보기 좋게 장담한 것에 비해 연수의 말은 흑마에게 점점 처지기 시작했다.
‘이놈아! 주인 기 좀 살려다오.’
“네 말은 살이 뒤룩뒤룩 쪄서 내 흑마처럼 달리지는 못하겠다.”
“큼큼! 작년만 하더라도 내 말이 숙누나 말보다 더 빨랐을 거요.”
“히히히 거짓말 하지마.”
“사실이오. 매일 마사에서 먹고 뒹굴고 놀기만 해서 이놈이 살이 쪄서 그렇지 금세 전의 모습을 찾을 거요.”
“그래도 내 흑마에 비할 수는 없을걸?”
“덩치 크다고 다 좋은 말은 아니오.”
“내 흑마는 이틀을 쉬지 않고 달린 적도 있는걸?”
“거짓말 마시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정말이야. 내가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놈이 이틀을 쉬지 않고 달려서 겨우 적의 손에서 빠져나간 적이 있다니까.”
‘쳇 종자가 좋아 보이더라니.’
“내 말은 그보다 대단하오. 한번 안장을 내리면 다시 올리는데 몇 날 며칠은 걸릴 수도 있소.”
“히히히 그게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순 억지네.”
“뭐가 억지요. 그것 또한 비범한 일이니 대단한 거요.”
“네 말이 말을 안 듣는 게 뭐가 자랑이냐. 히히히”
“됐소. 잡담 말고 서둘러 갑시다. 북경까지 가려면 며칠은 노숙해야 할거요.”
연수는 지친 말을 쥐어짜며 앞서 달려나갔다.
해가 중천에 걸리자 말들 또한 지쳤는지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려졌다.
특히 연수의 말이 많이 지쳐있었다.
“이쯤에서 쉬었다 갑시다.”
연수는 말을 멈추고 풀이 많은 곳에 말을 메어놨다.
“연 동생 배고프지 않아?”
“아침도 걸렀더니 배가 고프네요.”
“뭐 먹을 거 없어?”
연수는 품 안에서 준비해 둔 육포를 한쪽 꺼내 잘라서 건넸다.
“요기나 해 둬요.”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이런 허허벌판에 맛있는 게 어디 있습니까?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은 이런 육포나 씹으면서 가야 할 겁니다.”
“아우···.”
공숙은 배를 쓰다듬으며 칭얼대더니 북경 쪽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이 되었다.
연수는 그런 공숙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