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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63화 (63/202)

# 63화

중년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살기에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돌파해야 하는데···.’

풍기는 기세가 딱 봐도 일류는 넘은 절정이 분명한 고수였다.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오래지 않아 다른 무인들에게 포위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보다 고수인 중년인을 돌파한다는 것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연수는 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까지구나.”

연수의 담담한 말에서 중년인은 연수가 도주를 포기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곱게 죽여주마.”

중년인은 허리춤에 매여 있던 애검을 뽑아 들었다가 흠칫했다.

모든 걸 포기한 듯 보이는 연수의 눈빛에 좀 전과 같은 초조함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강렬한 투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에.

“곱게 죽어주진 않겠소.”

손목이 한 바퀴 돌아가자 연수의 빈손에 초승달 모양의 단검이 들려졌다.

그러면서 품속 목합을 슬쩍 꺼내며 몰래 영약을 손에 꺼내쥐고는 목합을 중년인에게 던지는 연수.

목합을 받은 중년인은 손을 흠칫 떨었다.

목합을 열자 텅 빈 목합 안에서 청량한 향기가 올라왔다.

익숙한 향이었다.

남궁세가의 비전영약 제왕현단.

중년인이 목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떠는 동안 연수의 손에 감춰져 있던 영약이 연수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입에 들어감과 동시에 녹기 시작해서 목으로 넘어가는 영약.

만약 지금 운기를 하며 영약의 기운을 흡수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연수는 애써 그런 아쉬움을 외면했다.

자세를 낮추며 강가쾌련창의 기수식과 흡사한 모양의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중년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암수검이었나? 하오문 문도더냐?”

대답 대신 중년인에게 달려드는 연수.

중년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중년인은 갑자기 달려드는 연수를 향해 검을 뻗었다.

중년인의 검에서 기사가 길게 뻗어 나오며 연수의 목과 허리를 흔들리듯 압박해 왔다.

‘기사고 나발이고 안 맞으면 그만이다.’

좌우로 몸을 흔들더니 크게 좌측으로 선회하며 중년인을 향해 거리를 좁혀 가는 연수.

중년인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검을 그었다.

중년인의 검에서 뽑혀 나오며 연수를 양단할 듯 길게 늘어져 휘둘리는 기사.

‘채찍도 아니고, 언제까지 기사를 줄줄 뽑아내나 보자.’

중년인을 향해 달려가며 아슬아슬하게 뛰어올라 빙글 몸을 뒤집고는 기사를 피해내는 연수.

기사가 공중에서 몸을 뒤집은 연수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흥! 경신의 공부는 제법이구나.”

검을 뒤로 당겨 연수를 향해 찌르자 중년인의 검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발출 되며 연수를 향해 무섭게 지쳐 들어왔다.

연수의 양손에 들린 단검이 아지랑이를 피어 올리며 교차하여 검기를 막아갔다.

-깡!

‘쳇’

손아귀가 욱신거리며 힘이 빠졌지만 양손에 더욱 힘을 줘가며 중년인과의 거리를 재봤다.

‘한 장 반.’

중년인에게 모든 걸 쏟아내기엔 아직 먼 거리였다.

무황과 질리도록 했었던 거리싸움.

하지만 무황과 다르게 저 중년인과의 거리를 줄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이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살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잠자코 죽어줄 생각이 없을 뿐이다.

무인으로 살았던 팔 년이 조금 넘는 시간.

죽는다면 무인으로써 죽고 싶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저항하고 자신의 무를 상대에게 부닥쳐 한 초식이라도 더 펼쳐내며 무인의 삶을 마무리 하고 싶을 뿐이었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모든 정신이 상대에게 집중되며 주변이 하얗게 지워져 간다.

처한 상황이나 미래의 일 따위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앞을 가로막은 무인과 싸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서로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중년인은 연수의 중단을 찌르며 다가섰다.

몸을 빙글 돌리며 검을 피해 중년인에게 반걸음 더 다가서는 연수.

중년인의 입매가 비틀렸다.

중년인은 검을 잡은 손목을 돌리며 그대로 뻗었던 검을 옆으로 그어 연수의 허리를 양단해갔다.

순간 연수의 온몸으로 강력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공허하던 단전이 차오르며 영약의 기운이 폭풍처럼 온몸의 활력을 일깨웠다.

왼쪽 옆구리를 베어오는 검을 보지도 않고 오른손 단검으로 막아내는 연수.

-깡!

아지랑이를 피어 올리는 장검과 단검이 만나자 불꽃이 튀었다.

그 순간에도 연수는 조금 더 중년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순간 중년인은 당황했다.

충분히 자신의 검을 막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연수의 허리를 양단할 자신이 있는 중년인이었다.

내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근력을 쥐어짜며 검을 그었기에 힘으로 찍어 누를 확신이 있었다.

한데 이 어린 하수 놈이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자신의 검을 그대로 받고 버틸 줄 차마 예상치 못했다.

-카강! 그그그극!

검을 막아선 채로 중년이에게 다가서자 두 검이 마찰과 불꽃을 일으켰다.

‘무슨 힘이···.’

중년인은 입을 악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겨우 저런 하수 놈을 상대로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지만, 단검을 휘두를 거리를 줄 생각은 더 없었다.

하지만 연수는 중년인에게 거리를 벌리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강가쾌련창은 열두 초식 중 열한 초식이 직선적인 공격 일변도의 무공이었다.

그런 강가쾌련창을 짧은 단창에서 더욱 짧은 단검으로 펼치는 연수였다.

뒤로 물러서는 중년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앞으로 달려드는 연수.

-카캉! 깡!

바로 자신이 물러섬과 동시에 앞으로 뛰어드는 연수를 보며 중년인은 검을 휘둘렀다.

연수에게 눈에 익은 초식이었다.

흡성신공의 고수를 몰아붙이며 창궁검대가 쓰던 검법이었다.

당연히 연수는 단검으로 어렵지 않게 중년인의 검을 막아냈다.

중년인과의 거리가 드디어 연수가 원하는 거리로 좁혀지는 순간.

중년인의 왼손이 뻗어져 나와 연수의 가슴을 노렸다.

남궁진수가 연수의 가슴팍에 먹여서 내상을 입혔던 장법이었다.

연수의 오른손바닥이 중년인의 일장을 향해 마주 뻗어졌다.

“감히!”

중년인의 노성이 울렸다.

자신의 장법을 막는것도 아니고 마주 일장을 뻗어오자 화가 치밀어 올라 내력을 끌어올렸다.

일장에 혹시 연수를 밀어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웅후한 내력으로 연수를 찍어 누를 수 있게 내력 대결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연수의 일장과 중년인의 일장이 한치의 거리까지 좁혀졌을 때.

“큭!”

-팡!

중년인이 뻗던 일장을 뒤로 물리며 신형을 휘청했다.

물론 연수의 오른팔도 크게 뒤로 밀려나며 신형을 휘청거리게 했다.

‘부러졌나?’

말을 듣지 않는 오른팔을 살필 겨를도 없이 중년인을 향해 달려들며 왼손의 단검을 휘두르는 연수.

-까깡! 깡!

중년인 역시 오른손의 검을 휘둘렀는데 두 사람 모두 입가 옆으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중년인이 이를 악물며 씹어 삼키듯 말했다.

“암수를 쓰다니.”

대답할 여력도 없이 중년인의 날아올 검에 대비하는 연수.

손가락 사이에 독침을 끼고 일장을 내미는 것쯤은 지금의 연수에게는 별 대수로운 수도 아니었다.

그 한수로 자신의 오른손과 중년인의 왼손을 맞바꾸었다.

또한, 중독까지 시켰으니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까깡!

연수의 거리에서 싸우다 보니 중년인으로서는 가진바 초식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어떻게든 연수를 밀어내려 했지만 절대 이 근접거리를 내줄 생각이 없던 연수는 치열하게 중년인에게 따라붙으며 물고 늘어졌다.

중년인은 싸울수록 지쳐있던 연수의 기세가 강해지며 활력이 도는 모습에 의구심이 점차 강해졌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그럴 리가···.’

연수는 싸우면서도 계속해서 오른팔을 움직여 보려 했다.

느껴지는 감각으로 보자면 손목이 골절된 것 같긴 했지만, 팔꿈치와 손가락은 움직였다.

떨리는 오른손을 꼼지락대며 코앞에 있는 중년인의 허벅지에 바늘을 쏘아냈다.

사실은 중년인의 요혈에 쏘고 싶었지만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목으로 인해 그나마도 최대한 노력하여 쏘아낸 것이다.

-땅!

근접거리에서 손을 섞으면서도 중년인은 바늘을 쉽게 막아버렸다.

“이놈! 끝까지!”

-촤악! 촥!

분노한 중년인의 검이 연수의 목을 향해 그어졌고, 연수는 왼쪽 어깨를 목 옆으로 바짝 붙이며 왼손을 마주 뻗어 그었다.

서로를 지나치듯 교차해 간 두 무인.

연수의 어깨는 뼈가 보일 정도로 베어져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중년인은 검을 허리의 검대에 차분히 납검하고는 뒤로 돌았다.

마주 돌아보는 연수.

“설마하니 너 따위 하수에게···. 방심했다는 말은 않···.”

-푸악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중년인은 목에 가는 붉은 선이 벌어지며 터져 나오는 피 분수와 함께 그대로 단명했다.

그제야 연수는 왼손으로 어긋난 오른쪽 손목의 뼈를 맞췄다.

-으드득

겨우 맞춰져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의 혈을 집어 지혈하는 연수.

계속해서 도주하려는 연수의 신형이 크게 휘청였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는 연수.

잠시 대량의 출혈과 그간 쌓여온 피로가 겹쳐져 어질어질했다.

‘가야 한다···.’

머리가 멍하고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는 연수는 걸음을 재촉하며 중년인의 시체를 뒤로하고 장내를 떠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다지 멀리 도망치지 못한 것 같은데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 위로 붉은 불꽃이 퍼져 나갔다.

아마도 중년인의 시체가 발견된 모양이었다.

연수는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움직였다.

몸의 상태는 이미 최악이었다.

큰 출혈이 있었고, 영양 상태는 거지 생활을 할 때보다 빈약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약을 복용하여 잠시나마 몸의 활력이 돌고, 거의 비었던 단전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아주 잠시라도 운기요상 할 수 있다면 축난 몸을 조금이나마 보호할 수 있을 텐데 연수에게는 언제 적에게 뒤를 잡힐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잠시의 시간도 지체할 여력이 없었다.

무영심공의 동공을 펼치려 해도 부러진 오른쪽 손목과 크게 베인 왼쪽 어깨는 이미 연수의 뜻대로 움직여 주고 있지 않았다.

연수는 끝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이 상태로 뒤를 쫓는 적들을 따돌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죽음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최대한 저항하고 끝까지 발버둥 칠 것이다.

‘중년인과 싸움을 정리할 시간만 있었더라도···.’

너무나 아쉬웠다.

단 삼일만이라도 중년인과 싸움으로 얻은 뭔가 알 것 같은 무리를 정리할 시간만 있었더라도 무인으로서 진일보할 수 있을 텐데 현재 상황은 일각을 다투듯 위급했다.

중년인과 싸울 때 느꼈던 감각.

마치 중년인의 호흡이 모두 읽히는 것 같은 느낌.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심지어 즐겁기까지 하던 그 감각은 너무나 새로워 연수를 다른 세계로 빨아들이는 듯했다.

중년인이 연수의 목을 치는 반응에 가까운 초식을 펼칠 때 번뜩이며 목숨을 걸고 내디뎠던 한 걸음은 마치 무언가를 완성하는 듯한 감각마저 느껴졌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자신보다 고수였던 중년인을 그렇게 쓰러트릴 수 있었는지 차분히 복기하며 그때의 감각에 집중하고 아직 몸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영약의 기운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그럴 수 없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영약의 기운이 조금이나마 더 남아있을 때 거리를 벌려야 할 텐데···.’

그나마 이만큼의 출혈이 있었음에도 혼절하지 않고, 검상을 입고도 내상이 크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영약의 효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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