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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69화 (69/202)

# 69화

그때부터 공숙의 주위로 무거운 살기가 몰아치며 비적들은 추풍낙엽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네 부하 다 죽겠다.”

“처, 처유희! 분명 죽었다 들었거늘!”

“글쎄, 어떨까?”

말을 하는 순간에도 공숙의 일장을 가슴에 맞은 비적 하나가 뒤로 날아가다 나무에 부딪히며 피를 토해냈다. 얼마나 강하게 토해냈으면 복면을 뚫고 흐뿌려지는 피 보라에 섬뜩한 기분이 드는 장면이었다.

“어휴, 저건 보기만 해도 아프네.”

옆에서 깐족대는 연수의 말에 비적은 이를 악물며 침중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졌다. 그만 저 여인을 말려라. 다 말해 주겠다.”

-숙 누이 그만 해요. 그러다 진짜 다 죽이겠네요.

-싫어! 다 죽여 버릴 거야.

살심이 치솟은 공숙은 무자비한 손속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한번 봐줘요. 맛있는 거 사줄게요.

-맛있는 거 뭐?

연수의 맛있는 거라는 전음에 이미 공숙의 눈은 평소의 영롱한 초록빛을 되찾고 있었다.

-뭐든요. 먹고 싶은 거 사줄게요.

갑자기 우뚝 멈춰선 공숙에 의해 잔뜩 긴장하며 동시에 움직임을 멈춰서고는 공숙의 눈치만 보는 비적들.

그나마도 다섯 명밖에 남지 않은 비적들은 한참 공숙의 눈치를 보더니 쓰러진 동료들을 조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삼촌 약속했어요!”

“그래. 알았다.”

다가온 공숙의 기세를 살피던 비적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겨우 일어섰다.

“살아 있었구나. 옥안사목!”

“혓바닥 뽑아버리기 전에 주둥이 조심해.”

순간 장난스럽던 공숙의 표정이 굳어가며 차가운 한기가 몰아쳤다.

점차 날카롭게 서는 공숙의 눈을 본 비적은 본능적으로 몸을 흠칫 떨었다.

-숙 누이 진정하세요.

“후, 사부님은 그 별호를 참 싫어하셨어. 옥안쌍편이라는 별호를 좋아하셨으니 앞으로는 사목이니 하는 말을 하면 누가 말리든 꼭 혀를 뽑을거야.”

“아, 알겠소.”

잠시 공숙을 살피고는 분위기를 환기하는 연수.

“자! 그럼 대충 정리는 된 것 같은데 무거운 그 입 좀 열어보지.”

“그게···.”

비적이 망설이자 연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우리 바쁜 사람이야. 같은 사파 같아서 은원 쌓기를 조금 밀었다만 그냥 싹 다 죽이고 갈 길 가는 것도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니란 말이지.”

“알았소,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런 당연한 말 하지 말고. 누구를 왜?”

“그건 알려줄 수 없소.”

공숙은 찢어진 옷소매를 매만지며 무심히 말했다.

“이거 못 고치겠다. 그냥 다 죽여서 묻어버리면 안 돼요?”

“묻는게 더 귀찮아.”

“나 땅 잘 파는데. 볼래요?”

-쾅!

공숙이 비적의 옆으로 손을 휘두르자 깊이가 반장은 될 법한 구덩이가 생겼다.

비적의 이마로 땀방울이 맺혔다.

“우, 우리는 고목가에서 나왔소. 더는 묻지 말아주시오.”

“고목가? 그 고목가?”

비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황성의 일이었군. 애초에 그리 말했으면 피해 줬을 텐데···. 왜 귀찮게 굴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

“...”

“뭐 됐어. 당신들도 당신들의 사정이 있겠지. 고목가와는 원수지고 싶지 않으니까. 이걸로 은원은 없는 거로 끝내지.”

“고, 고맙소.”

“알면 됐어.”

-숙 누이 갑시다.

-그냥 가는 거야?

“가자!”

“...”

연수가 경공을 펼치며 장내를 벗어나자 공숙은 볼을 씰룩이며 불만 어린 표정으로 따라 달렸다.

“왜 그냥 가는 거야?”

“고목가라잖아요.”

“고목가면 다야?”

“다죠. 그 치들이랑 원수져서 좋을 일 없어요.”

“고목가가 뭔데? 대단한 곳이야?”

“몰라요? 사황성의 열두 가문 중 두 번째 가문이잖아요.”

“몰라. 그런 거.”

“그냥 큰 무가라고 알면 돼요.”

“얼마나 큰데?”

“남궁세가랑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요.”

“진짜? 그런 놈들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대?”

“모르죠. 누굴 죽이거나 납치하거나 하려고 저러고 있었겠죠.”

“그렇구나.”

“어쨌든 갈 길이 멀어요. 오늘도 노숙하기 싫으면 서둘러요.”

“응.”

한참을 달려나가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무인들이 둘의 앞을 막았다.

경공을 멈추며 일단의 무인들 앞으로 걸어가는 연수.

“길 좀 터 주시오. 갈 길이 멉니다.”

연수의 말에 스무명의 무사를 거느린 중년인이 날카로운 눈매로 연수와 공숙을 살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인지 물어도 되겠소?”

“멀리서 오는 길이요.”

대답을 들은 중년인의 눈썹이 꿈틀대며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나는 중묘산의 후서웅이라 하오.”

‘중묘산?’

중묘산이라는 말에 연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자 중년인의 얼굴이 달아 올랐다.

“내가 견문이 좁아 잘 모르겠소이다. 어찌 되었든 길 좀 터 주시지요.”

“큼큼! 중묘산의 태전파에서 행사가 있어 부득이하게 길목을 좀 지켜야 하니 양해해 주시오.”

중년인의 목소리에서 그의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태전파는 또 어디야?’

연수는 강호의 많은 문파와 그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사부에게 제법 철저히 교육을 받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중묘산의 태전파라는 곳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단의 무리는 하필 외길을 막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절벽과 바다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길 없는 산속 숲이니 길도 나지 않은 산으로 들어가기도 짜증 났고 그렇다고 절벽으로 뛰어내려 헤엄을 쳐서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숙이 막 발작을 하려는데 연수는 공숙을 말리며 입을 열었다.

“정파 같은데 이리 억지를 쓰면 어떡하오? 하나 나 있는 길을 막고 문파에 이름을 파는 건 정파에서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큼큼! 그래서 양해를 구하잖소.”

“양해가 안 되니 길 좀 터 주시오.”

“우리 태전파가 우습게 보이니 이리 시비를 거는 것이겠지?”

순간 중년인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쪽이야말로 내가 우습게 보이니 이리 억지를 쓰는 것 아니오?”

연수의 기세 또한 일변하며 중년인에게 날아들었다.

둘의 날카로운 기세가 허공에서 격돌하며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연수의 기세를 가늠해 본 중년인은 상대가 보통 실력이 아님을 알아채고는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본파에 정말 중요한 행사라서 그러니 부디 양해해 주시오.”

두 손을 모아 포권까지 하며 고개를 숙이자 연수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저렇게까지 나오는 데 힘으로 뚫고 들어가기도 뭐했고, 꼬투리를 잡기도 어려웠다.

“어쩔 수 없지요.”

-산길로 우회해야겠어요.

-옷 찢어져서 싫어.

-조심히 길을 내면서 가면 돼요.

-늦었다며. 이러다 또 노숙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냥 재들 밀어버리고 가면 되지.

-이제 천진인데 정파 놈들이랑 부대끼며 시선을 끌 필요는 없어요.

-이 씨···. 산길 싫은데···.

공숙은 투덜거리며 연수를 따라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들어오자 태전파의 고수들 기척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많이도 매복했네. 귀찮게.’

연수와 공숙은 그들을 크게 우회하며 길을 내어 걸었다.

“더럽게 많네. 정파 놈들이 대낮부터 무슨 할 짓거리가 없어 이러고 있대.”

“그러게나 말이에요. 고목가 놈들도 그렇고 뭔가 있나 봐요.”

사파 고수들의 매복을 지나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정파 고수들의 매복을 만났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궁금하네. 돌아가서 물어볼까?”

“어차피 대답 듣기도 힘들 텐데 신경꺼요. 우리 일도 아닌데 관여해봤자 좋은 꼴 보기 힘듭니다.”

“흐음···. 뭔데 저러고들 있을까?”

연수는 공숙의 말을 무시하며 길을 내었다.

걸어가면서 손을 좌우로 흔들 때마다 무성한 풀들이 좌우로 누우며 작은 길이 열렸다.

한참을 길을 내며 산을 우회한 둘은 다시 관도로 나옴과 동시에 경공을 전개했다.

밤늦게까지 발길을 재촉하자 겨우 마을의 입구에 다다란 둘은 서둘러 문을 연 객잔을 찾았다.

“후우 다행이다. 다 와서 노숙할뻔했네요.”

불을 켠 허름한 객잔에 들어와 의자에 앉은 공숙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게. 조금만 늦었으면 낭패를 봤겠어.”

연수와 공숙은 간단한 음식을 시켜 요기하고는 방을 얻어 올라갔다.

분명 방을 두 개를 얻었는데 한 방으로 들어가는 공숙과 연수.

방에 들어서자 공숙은 소매가 찢어지고 며칠의 노숙으로 먼지가 가득 탄 옷을 벗어 재꼈다.

“아후~! 편하다!”

얼굴을 가린 면사까지 풀어 놓고는 침상에 대자로 눕는 공숙.

“먼저 운기 하세요. 제가 호법 설게요.”

“응!”

침상에서 허리를 세우며 한쪽 다리는 가부좌를 한쪽 다리는 발바닥을 밑으로 무릎을 위로 바짝 세우며 앉는 공숙.

잠시 후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명치 앞에 올려 가볍게 말아쥐고 왼손은 단전 밑으로 두어 운기를 시작했다.

‘언제 봐도 독특하네. 저런 자세로 운공이 되나?’

하지만 공숙은 연수의 동공이 더 신기하다며 호들갑을 떨었었다.

공숙이 운공에 들어가자 연수는 기감을 넓히며 주변에 위험한 요소가 없는 살펴보았다.

여러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중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운공하던 공숙의 두 눈이 떠졌다.

그녀는 개운한 듯 기지개를 켜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 살 것 같네. 이제 네 차례야.”

“예.”

연수는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무영심공으로 비었던 단전을 채웠다.

금세 눈을 뜨는 연수.

“언제봐도 참 빠르네. 점점 더 빨라지는 거 아니야?”

“글쎄요. 동공이 경지에 오르면서 운공의 속도가 조금 빨라지긴 한 거 같아요.”

“그럼 나는 목욕물 받아달라고 해야겠다. 내일 보자.”

이 밤중에 점소이가 욕깨나 하겠다 싶은 연수는 날이 밝으면 점소이에게 은자 한 냥쯤 쥐여 줘야겠다 생각하고 침상에 누웠다.

두 눈을 감자 낮에 손속을 섞었던 고목가의 고수가 떠올랐다.

분명 같은 절정의 고수였지만 그와 자신의 차이는 현격했다.

특히나 그의 단순한 채찍 다루는 법은 웬만한 일류보다도 못하게 느껴졌던 연수였다.

‘기사와 편기만 신경 쓰느라 초식이 단순하고 편의 장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했어. 내기의 수발도 자연스럽지 못해서 발출되는 기사 역시 느리고 위협적이지 않았지.’

하지만 그와 자신은 동급으로 취급받는 같은 절정고수이다.

‘같은 절정에도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날 수 있구나. 노야가 말씀하시기를 이 경지는 모든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였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봐.’

절정고수의 반열에 든 후 연수는 궁금한 것이 더 많아졌다.

아는 게 깨닫는 게 많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졌고 많이 보일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눈높이가 높아질수록 멀리 보이게 되니 많이 보는 만큼 많은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삼 년간의 독학으로는 모든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소개를 만나고 구룡산으로 가자. 사부와 노야를 봬야겠어.’

그러고 보니 구룡산을 떠난 지 어느덧 오 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하는 일이 일인지라 제대로 소식 한번 전하지 못했으니 걱정이 많을 사부를 떠올리자 절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드는 연수였다.

무엇보다 지난 오 년간 사부가 과연 절정의 경지로 올라섰을지도 궁금했다.

내력의 한계에 막혀 벽을 허물지 못하던 사부였다.

자신이 무영심공만 빨리 전했어도 더 나은 진전을 보이셨을 텐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숨어지내느라 무영심공을 전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연수였다.

‘지금이라면 노야한테 어디까지 해 볼 수 있을까?’

불혹이 되기 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불세출의 고수.

곤륜 최고의 기재라는 무황.

하산 전만 해도 솔직히 무황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하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적어도 무황의 본 무위를 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해 보고 싶었다.

무황의 진정한 무위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온몸으로 초절정의 힘을 겪어 보고 자신과의 차이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옛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문득 보고 싶은 얼굴들이 여럿 떠올랐다.

어린 시절 고생을 함께하며 자신을 위해 망설임 없이 무림맹의 추적을 따돌려 주던 소개.

거지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밥을 주며 글까지 배울 수 있게 도움 주었던 객주 어른.

자신을 어엿한 무인으로 키워준 사부님과 노야.

그리고 스치듯 지나친 잊을 수 없던 정계년.

‘응?’

연수는 문득 떠오르는 계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는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달아오른 볼과 함께 뻣뻣해지는 하체에 연수는 황급히 일어나 새끼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서며 단련을 시작했다.

‘고연수! 주책맞게 이게 무슨 꼴이냐!’

연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정계년은 고작 열네 살의 모습이다. 물론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미묘한 색욕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 연수는 자신을 책망했다.

밤늦게까지 육체 단련을 한 연수는 땀에 전 몸으로 겨우 새벽이 되어서야 잠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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