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76화 (76/202)

# 76화

짜증이 솟아나며 뭐라 따지려고 하자 그런 연수의 말을 가로막는 기당.

“다시 해 봅시다. 저쪽으로 가시오.”

자리를 옮기자 여러 발자국이 흐릿하게 남은 관도가 나왔다.

“여기가 좋겠군. 저기서 무인의 발자국을 찾아보시오.”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배운 것이 있어 한참을 보면 어찌어찌 찾아낼 수는 있었다.

“여기 이것과 저기 저것.”

“이유는?”

“보폭이 일정하고 발 앞쪽에 무게를 실어 걷는 것이 보법을 배운 전형적인 흔적이오.”

“그럼 저것은?”

기당이 가리킨 쪽에 작은 발자국이 나 있었다.

“저건 아니오.”

“아니긴 뭐가 아니오. 어휴, 딱 보면 경공을 펼치며 난 발자국 아니오? 저 발자국만 저기 덩그러니 있고 같은 크기의 발자국이 전혀 없는데. 게다가 보시오. 앞으로 짓눌리듯 크게 중심이 쏠린 자국 아니오!”

이래서였다. 울컥울컥 짜증이 올라오고 억지를 부리게 만드는 이유는.

사부한테 무공을 배울 때도 뭔가 모자란다며 혼 한번 꾸중 한 번 받은 적 없었거늘 저놈에게 추적술을 배우는 동안은 계속해서 책망을 당하니 자꾸 화가 치솟았다.

“어째서 딱 보면 모르는지.”

“어째서 딱 보면 모르긴? 이제 배운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딱 보고 알겠소? 알면 내가 비싼 금자 드려 이걸 왜 배우겠소?”

연수가 울컥해서 따지고 들자 기당은 고개를 흔들었다.

“됐소. 말해 뭐 하겠소. 자리 옮깁시다.”

자꾸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연수는 기당의 뒤를 따랐다.

이번엔 숲이었다.

“여기가 좋겠군. 보이는 흔적을 찾아보시오.”

연수는 발끝으로 땅을 툭툭 두드리며 시간을 재는 듯한 기당의 태도에 괜히 조급해졌다.

빠르게 찾으려다 보니 볼 수 있는 것도 놓쳤고, 오히려 시간만 잡아먹고도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점을 기당이 짚어내니 왜 저걸 못 봤나 자책감도 들다가 기당의 태도에 이리됐다고 탓을 돌리기도 했다.

“실전에서는 항상 다급한 상황이 많소. 그때도 그런 핑계를 댈 거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혀 입을 딱 닫은 연수.

“하아, 됐고 자리나 옮깁시다.”

그렇게 열흘을 더 배우고 나서야 연수는 기당에게 다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어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지 심히 의심이 들지만 내 가르칠 수 있는 건 다 가르쳤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얼마나 노력하냐에 달렸소.”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기당의 말에 인상을 구기며 금자 두 냥을 던져주는 연수.

“마지막으로 혹 곤륜파 도사들의 정보가 들어온 것이 있소?”

“어떤 정보?”

“위치 정보.”

“있소. 사흘 전 정보지만.”

“어디요 거기가?”

기당은 손가락 한 개를 펼쳤다.

“금자 한 냥.”

“비싼데?”

“곤륜파 장로들의 정보니 비싸오.”

“사지.”

품에서 금자 한 냥을 더 꺼내 던져주었다.

기당은 기루 안에서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와 연수에게 전해주었다.

종이를 받은 연수는 빙글 웃는 기당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다신 보지 맙시다.”

“하하하 나름 즐거웠는데.”

“퍽이나.”

마지막 말과 함께 돌아서는 연수의 등을 기당은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평소와 다르게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는데 돌아온 연수를 보고는 공숙이 신이나 달려왔다.

“이제 다 끝난 거야?”

“예. 얼추 끝났어요.”

“그럼 이제 떠나는 거야?”

“평소에는 그렇게 큰 도시에서 하고 싶은게 많다더니 벌써 질렸어요?”

“응! 재미 하나도 없어. 이렇게 변장을 해서 그런지 시선도 못 끌고 할 것도 딱히 없고.”

공숙의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연수.

“그럼 이제 준비하고 떠나요.”

“어디로 가는데?”

“잠시만요.”

품에서 기당에게 받은 종이를 펼치는 연수.

-공 전 사십구 세. 현무당 당주.

-공 천 오십오 세. 지연화법당 당주.

-공 진 오십팔 세. 집법당 당주.

-조화명 삼십삼 세. 곤륜 속가 지영문 소가주.

-진 영환 삼십 세. 곤륜 일대 제자. 장문제자.

-진 수곤 삼이 세. 곤륜 일대 제자.

-진 척관 이십팔 세. 곤륜 일대 제자. 현무당 당주의 제자.

현재 운남성 곤명현에서 서장 쪽으로 이동 중.

종이를 펼쳐 본 연수는 투덜대듯 말했다.

“빌어먹을 도사 놈들 빨빨거리고 잘도 돌아다니네. 운남으로 가야겠어요.”

“지난번 그 도사들을 쫓아가게?”

“예. 혹여 그놈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사부님의 행방을 찾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놈들이 사부님의 뒤를 잡으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수가 많이 불은것을 보니 어떻게든 사부를 찾으려는 모양입니다.”

“그럴 거면 습격해서 다 죽이는 게···.”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곤륜파 도사 놈들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어요.”

공숙은 잠시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행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이 좀 생길 수도 있겠네.”

“재미있는 일요?”

“응. 귀주와 운남은 가깝잖아.”

“아! 어쩌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재미없는 일에 휘말릴지도···.”

“왜? 사황성이 있는 귀주인데 우리도 기 좀 피고 다니지 않겠어?”

“후우~ 그럴 리가요. 그리고 전에도 말했지만, 사파 놈들이 어떤 면에서는 정파 놈들보다 위험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정파 놈들 가득한 곳에 있는 것보다야 좋겠지.”

“그렇긴 하지만, 귀주라···. 그 양반을 안 봤으면 좋겠는데 자꾸 인연이 닿는 것 같으니···.”

“그 양반이 누군데?”

“사황성주요.”

“헛! 말조심해.”

공숙은 목소리를 줄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사황성주님이랑 친한 것 같은데?”

“친하긴요. 두 번 마주친 게 다예요.”

“나도 한번 보고 싶다.”

“그런 말 마세요. 봐봤자 사황성에 들어오라는 말이나 하겠죠. 뭐.”

“사황성 궁금하긴 하다.”

“전에 한번 놀러 오라 하긴 했는데···.”

“정말?! 한번 가보면 안 돼?”

“가면 귀찮은 놈들이 귀찮은 짓을 할 것 같아요. 그보다는 곤륜의 도사 놈들 뒤를 쫓는 일이 시급해요.”

“알겠어.”

웬일로 쉽게 포기하는 공숙.

연수는 그런 공숙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누이. 제 친구 기억나죠?”

“응. 거지.”

“큼큼! 그래요. 그 개방 고수 말이에요. 어떤 거 같아요?”

“뭐가?”

“그냥요. 남자로서 어떤가 해서요.”

“남자로? 처자식 안 굶기면 다행이다 싶지.”

연수는 황당한 눈으로 공숙을 바라봤다.

“개방 고수가 처자식을 굶기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거지잖아.”

“그, 그렇긴 하죠.”

“근데 그건 왜 자꾸 묻는데?”

“그냥요. 그놈이 누이한테 반한 것 같길래?”

“...”

일단 뱉어놓고 공숙의 눈치를 살피려 했는데 뭐라 대답이 들리지 않자 슬쩍 돌아보니 공숙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마음에 안 들어요?”

“걔가 나 좋아한대?”

“아마도요?”

“내가 가슴이 커서? 그러고 보니 그날도 빤히 내 가슴 봤었지.”

“켁! 켁! 그, 그럴 리가요.”

연수는 물도 마시지 않는데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이 나왔다.

공숙이 꽤 당황할 줄 알았던 연수는 덤덤한 공숙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꽤 덤덤하시네요?”

“응. 요즘 나 좋다는 남자들이 많았어.”

“예? 언제요?”

“서호에서부터 너 없으면 자주 남자들이 좋다고 이거저거 사주기도 하고 선물도 주고 그러더라고.”

“그, 그랬어요?”

“응.”

연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개 대신 한숨을 쉬었다.

‘소개야 네 청춘사업이 쉽지는 않겠구나. 그러게 하필 거지가 되었니?’

분위기를 바꿀 겸 대화 주제를 바꾸는 연수.

“그나저나 말 잘 고르셨네요. 이 말 마음에 들어요.”

“그치? 그 갈색 말은 전에 네가 타던 놈과 비슷해서 한눈에 들어왔어.”

“누님 백마도 전에 놈보다 우람하네요.”

“응 수말이라서 힘도 더 좋대.”

“그럼 다행이고요. 이제 좀 달려도 되겠네요.”

관도가 넓어지며 쭉 뻗어 나오자 연수는 박차를 가하며 말을 달렸다.

공숙 또한 말에 박차를 가해 따라붙었다.

“운남 얼마나 걸릴까?”

“글쎄요, 쭉 질러서 가다 보면 멀진 않을 거예요.”

며칠을 말을 달려 강서에 도착한 연수와 공숙.

“강서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공숙의 말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특이한 병기를 차고 다니는 무인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무인들의 기세가등등한 것이 전운의 긴장감이 전해져 왔다.

‘벌써 다들 느끼고 있는 건가?’

아마도 확정적인 소문이나 이야기는 못 들었어도 정사 대전이 다가옴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들 있는 것 같았다.

“후우, 오싹오싹한 데?”

“그죠? 괜히 시비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

“그러게.

“귀주에 가도 사황성을 구경하긴 힘들겠어.”

“괜히 갔다가는 분명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게 분명합니다.”

공숙은 비슷한 무복을 맞춰 입은 무사들을 유심히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는 무슨 가문들이 있다고 했지?”

“예. 사황성의 열두 가문 중 팔쇄가와 철목가 그리고 귀형가가 있어요. 특히 귀형가는 소문이 더러우니 조심해야되요.”

“더러워?”

-귀형가의 가주이자 사황성의 장로 중 하나인 귀형가주새끼는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해요. 반반한 여자만 보면 일단 제자로 삼아서 무공은 안가르치고 본가에 들여 첩실마냥 데리고 살기로 유명합니다. 사황성내에서는 귀형신살이라 부르는 모양이지만 사황성의 영향이 적은 곳에서는 귀색망노라고 부릅니다. 젊었을 적 유명한 음적이었다는 모양이에요.

-아니 제자를 상대로 몸을 취한다는 말이야?

-예.

-패륜이잖아?

-그렇죠? 사파인이 보기에도 패륜이죠? 하지만 명목상은 제자로 들인 것이고 이를 따질 수도 없으니 다들 모르는 척 하는 거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공숙.

군주와 사부와 부모를 모두같이 여기는 중원에서 아무리 사파라지만 사부가 제자의 몸을 탐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분명한 패륜이었다.

-이러니 사파가 욕을 먹는구나.

-뭐 어쩔 수 없죠. 그런 놈도 있는 거고 저런 놈도 있는 거니. 하지만 엮이면 골 아파요. 등에 크게 귀라고 쓰여 있는 무복을 입은 자들은 특히 경계하세요.

-응.

둘은 말을 끌고 거리를 걸으며 묵어갈 객잔을 찾았다.

적당한 곳에 말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대부분의 무인이 사파의 무사들이었다.

큰 목소리를 내며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나 험악한 인상을 자랑하듯 주위에 눈을 부라리는 모습들이 가히 가관이었다.

“하아, 정신없다.”

“별수 있나요? 대충 먹고 올라가죠.”

“응.”

요기를 마치고 위층으로 계단을 오르는데 거의 다 올랐을 즘 무사 몇 명이 계단을 꽉 채우며 내려왔다. 조금만 비켜주면 비켜서 올라가겠는데 끝끝내 밀고 내려오는 무사 무리.

연수는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리는데 이번엔 밑에서 한 무리의 얼큰하게 취한 무사들이 올라오는 게 아닌가.

연수와 공숙을 끼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무사 무리.

위에서 내려오는 무사 무리 중 맨 앞에 있는 한 덩치 하는 무사가 허리에 찬 검 위로 거만하게 손을 올리며 연수에게 으르렁거렸다.

“내려가.”

연수가 잠시 눈치를 보며 밑을 보자 얼굴이 뻘겋다 못해 검붉을 정도로 술을 퍼마신 무사 역시 똑같이 으르렁거렸다.

“올라가.”

연수는 하는 수 없이 공숙과 함께 계단 난관을 박차며 위층을 올라가 버렸다.

그러자 두 무사가 동시에 고함을 쳤다.

“이 새끼가 우리가 우스워 보여?”

“좋게 말할 때 원위치해라!”

참고 참던 연수의 이마에 핏대가 서며 은밀해서 잘 느낄 수 없는 살기가 풀려나왔다.

지척에서 연수를 오래 보아온 공숙만이 느낄 수 있는 살기.

이 살기는 연수가 실제로 사람을 죽일 때 자주 풀려 나오는 살기였다.

-시비에 휘말리면 좋을 것 없다며!

놀란 공숙의 전음에 연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사들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이 젖가튼 애새끼가 뒈지려고···!”

막 연수의 뒤를 따라와 어깨를 잡던 무사의 뒷말이 끊겼다.

지척으로 다가오니 느껴지는 기세와 살기.

분명 처음 봤을 때 무인으로서 본능적으로 살펴봤었다.

밋밋한 태양혈과 마른 편의 몸매, 내외공이 형편없어 보이는 외형과 기세였다.

그런데 막상 어깨를 잡고 나니 땅에 뿌리를 내린듯한 단단함.

영혼이 날아갈 것 같은 무서운 살기.

무엇보다 온몸을 옥죄는 이 기세는 분명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까마득히 높은 고수의 기세였다.

“나, 나는 팔쇄가의 사돈인 두문파의···.”

“팔쇄가고 나발이고 너 하나 죽이고 강서를 벗어나는 건 일도 아니야. 누가 더 손해 보나 한번 해 볼까?”

“아, 아니요.”

연수는 목소리를 더 죽이며 덩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한 번만 더 눈에 띄어봐. 그때는 갈기갈기 찢어줄게.”

덩치 큰 무사는 영혼을 옭아매는 살기와 함께 속삭이는 연수의 귓속말에 소름이 돋으며 온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남아있던 취기가 날아가며 죽음을 목전에 둔 것 같은 기분.

조용히 몸을 돌리며 사라지는 연수의 뒷모습이 모이지 않을 때까지 그대로 굳어있던 무사는 연수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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