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방으로 들어서자 노승이 앉아서는 들어온 연수를 올려다보았다.
“앉지 않고 멀뚱히 뭘 하느냐?”
자리에 앉아서도 경계를 풀지 않고 기감을 펼쳐두는 연수.
“하여튼 의심은 많아서.”
무안해진 연수가 짐짓 모르는 척 기감을 풀었다.
“천불전에서 부처님께 공을 올리는 거야 네놈 마음이겠다만, 괜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어. 혜단이 그놈이 감각이 탁월하게 타고난 편이라 자칫 꼬리라도 잡히면 골치 아파.”
눈매가 좁아지는 연수.
“어찌 아셨습니까?”
“알만하니까 알았겠지. 뭘 따져.”
“...”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고수와 입씨름을 해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잘 들어. 여러 번 말하기 귀찮으니.”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말을 이어가는 노승.
“본질은 변치 않거늘 마음이 의미를 달리 두니. 공불심목. 정심이 담겨 정도이고 사심이 담기니 사도이다. 정사심도.”
이야기를 듣는 연수의 가슴에서 울컥하고 살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당황한 연수가 노승을 말리려 했지만 덤덤하게 계속 입을 놀리는 노승이었다.
“마음을 가두고 있는 정을 깨면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찾으리. 파정구심.”
세 번째 구절을 듣자 두 눈이 뻘겋게 변하며 눌려있던 살기가 모두 개방되며 폭사 되어 연수를 중심으로 풀려나왔다.
웬만한 고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진한 살기 속에서 노승은 담담히 구절을 외웠다.
“본질이 존재하거늘 선악을 나눠 무엇하리. 불변진본.”
이제는 폭사 되어 나오던 살기에 먹힌 연수가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노승의 두 눈에서 정광이 터져 나오며 앉은 채로 몸을 날려 연수의 정수리를 손으로 눌러 다시 주저앉혔다.
거꾸로 뒤집힌 채로 연수를 누르고 가부좌를 유지하는 노승의 엉덩이가 초옥의 낮은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쌓아 올린 것은 무너트리면 그만이오. 비워낸 것은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공불공만”
주저앉은 연수의 몸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자 타오르듯 붉게 물들어있던 눈이 제 색을 찾으며 점차 본래대로 돌아왔고 스르르 감겼다.
두 눈이 감기자 열리는 연수의 입.
“공불심목. 정사심도. 파정구심. 불변진본. 공불공만···.”
스무 글자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연수였다.
그렇게 또 한 시진이 지나자 천천히 연수의 눈이 떠졌다.
동공에 맺혀 있는 푸른빛이 점차 연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지자 연수의 입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얼마나 깨우쳤느냐?”
“하나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노승의 눈이 부릅떠졌다.
“과연. 하늘이 내린 무재라 이거구먼. 하나도 깨우치지 못했는데 무엇이 감사하느냐?”
“그것이···. 가슴속에 들끓던 살심이 느껴지질 않아서···.”
“참으로 이상한 놈이로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노승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기색도 없었고, 그럴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한숨을 내쉰 노승의 입이 열렸다.
“내 백오십 평생을 살며 천살성을 타고난 사람을 너를 빼면 딱 세 명을 보았다.”
“셋이나요?”
“그래. 그중 처음 봤던 아이는 전쟁고아였다. 그 아이는 열 살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살인하는 살인에 중독된 살인광이었지. 전화에 휩쓸려 광증에 걸린 것인지 원래 그렇게 타고난 것인지···. 영악하게도 낮에는 불쌍하고 힘없는 아이를 가장하고 밤만 되면 그 여린 몸으로 살인을 하러 다녔다.”
고개가 절로 저어지는 연수였다.
그런 연수를 잠시 바라보던 노승이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보았던 천살성을 타고난 사람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고기장사를 하는 건실한 청년. 하지만 그 역시 밤마다 가득 차오르는 살심을 누르지 못하고 하루가 멀다고 살인을 저질렀다. 심지어 시체를 분해해서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목불인견의 청년이었다.”
거기까지 들은 연수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눈을 감고 잠시 침묵하던 노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평생 무공을 모르는 자를 상대로 살계를 열었던 두 번이었다.”
청년은 그렇다 치고 아이를 상대로 살수를 썼을 노승의 고뇌가 느껴지는 듯하여 절로 숙연해지는 연수였다.
그런 연수를 보며 노승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 두 사람을 참회시키려고 별짓을 다 해보았지.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정상인과는 그 궤가 달랐다.”
‘사이코패스···. 라는 건가?’
잠시 생각을 하던 연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세 번째는 어땠습니까?”
노승이 방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승의 두 눈에 회한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본 연수가 노승에게 집중했다.
“앞에 두 번은 천만 다행히도 무공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지. 하지만 세 번째는 달랐다. 그는 무공을 배웠다. 그것도 정심한 소림의 무공을.”
눈을 부릅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꽉 쥐는 연수.
너무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주체못한 연수가 노승의 말을 재촉했다.
“그는! 그는 어찌 되었습니까?”
“혜자 배였던 그는 혜천이라는 법명을 받은 아이였다. 소림의 역사상 최고의 무재라 불리며 소림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각종 상승 무공을 모두 그에게 쏟아부었다. 그가 소림에 입문한 지 겨우 오 년. 열 네 살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을 때는···. 그때는 소림이 난리가 났었지.”
고개를 끄덕이는 연수.
수긍할 수 있었다. 절정고수라는 것은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손에 죽은 남궁진수나 하북팽가의 소가주가 후기지수 중 최고라 손꼽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곤륜의 대제자 마저 일류의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천살성을 타고 났을 줄이야. 아니 나는 사실 처음부터 알았어. 다만 아니기를 빌고 빌었을 뿐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천살성이라니, 천무지체와 함께 전설에나 내려오는 무재였다.
“그 후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 아이가 절정에 오른 이후부터 무공수련을 막았다. 그 아이의 정이···. 너처럼 앞서버렸다. 정이 앞서기가 무섭게 백회가 열리고 살기가 점점 짙어지더니 패도적으로 변하는 그 아이의 수련을 막고 법문 공부에 집중을 시켰지. 하지만···. 그 아이의 재능을 내가 과소평가 했던 거였어. 그 아이는 결국 법문을 외면서도 심상 수련을 했고···. 결국 오래가지 않아 살기가 백회에 닿았다.”
겨우 뗀 연수의 입에서 힘없는 한마디가 뱉어졌다.
“살겁이 일어났군요.”
“그랬지. 소림이 존재한 이후 소림에서 그런 살겁이 났던 적은 없었을 게야. 혜자 배 아이들이 여섯이나 죽었고, 불공을 올리러 왔던 백성들이 셀 수 없이 죽었지.”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후에도 소림에서는 그 아이를 내칠 수가 없었다. 그저 사고였다고. 다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금제를 걸어 참회동에 그 아이를 가두고 하루 열두 시진 감시하며 법문을 외게 했지.”
“설마···. 아직도?”
씁쓸하게 고개를 젓는 노승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단 삼 년 만에 어찌했는지 금제를 푼 그 아이가 다시 한번 날뛰었고, 자칫 소림은 망할 뻔했지. 당시 내가 나서 겨우 그 아이의 생을 거둬들였다.”
두 눈을 감고는 말하는 노승의 말에 연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심한 소림의 무공을 배우고도 살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살겁을 일으키다니.
그런 연수의 기색을 눈치챘을까?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여는 노승.
“그래서 네놈이 이상하다는 게야. 내가 본 천살성은 모두 살심을 제어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지. 나는 여태껏 그것이 그들이 타고난 팔자라고 생각했다. 변할 수 없는 영혼에 새겨진 업이라고. 금수와 같다고 끝없이 되새겨왔다. 한데 네놈은 스스로 살심을 억누르고자 소림의 담을 넘었다.”
‘아!’
노승의 말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무엇이 네놈을 그리 다르게 만들었을까? 천살성의 팔자를 타고난 천살지체가 분명하거늘 왜 네놈은 다른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날 밤 네놈의 생을 거뒀을 것인데.”
“그, 글쎄요.”
“마치 육체와 혼이 다른 것처럼 반대되는 성향을 타고나다니 특이하고도 특이해.”
“조, 좋은 일이 아닙니까? 저는 대살성이 안되어서 좋고 대사는 살생하지 않아도 되니 이 모두 부처님의 자비 아니겠습니까?”
옳은 소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노승이었다.
“그렇지. 물론 좋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의문이 풀리지 않으니 답답하구나.”
아이를 죽였고, 무공을 모르는 청년을 죽였고, 소림의 기대주이자 제자를 죽였다.
끊임없이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자신을 위로해온 노승이었다. 연수를 처음 만난 날도 단번에 때려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직접 소림으로 데려왔던 어린 날의 혜천의 모습이 떠올라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마지막으로 이야기라도 들어주고 보내고 싶었다.
그랬기에 연수가 아직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겨우 셋 아닙니까? 단정을 짓기에는 그 표본이 모자라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알고 있느냐? 천살성을 타고나 무공에 입문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오죽하면 전설에나 내려오는 이야기로 치부될까. 한데 내 평생 네 명의 천살성을 보았어. 평생에 하나 보기도 힘든 것을···. 넷이나 보았으니···.”
뒷말을 잇지 못하는 노승의 눈치를 살피며 연수가 입을 열었다.
“그것 또한 다 부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흥! 이놈아 네놈에게 기연이 되라고 내가 그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아 노친네. 성질은.’
버럭 성을 내는 노승의 앞에 고개를 숙여 보이는 연수였다.
“결과적으로 제게 기연을 베풀지 않으셨습니까?”
“네놈이 배운 게 뭔지는 알고?”
“모릅니다. 이 스무 개의 글자가 무공인지 법문인지 불경인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클클클 언젠가 알게 되겠지.”
허리를 더 숙이며 연수가 물었다.
“알려주지 않으실 겁니까?”
“내가 왜? 네놈 급한 사정은 해결했으니 더 가르칠 것도 알려줄 것도 없다.”
“예···.”
“아쉬우냐?”
“아닙니다. 살심을 없애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미친놈이 되지 않게 해 주셨는데 더 바란다면 진짜 도둑놈이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노승.
“너 도둑놈 맞잖아?”
“그..렇기는 한데···.”
“신소리는 그만하고 하나만 부탁하자.”
“말씀하시지요.”
“언젠가 소림을 한 번쯤은 도와다오. 균형이 깨어지고 정세가 어수선한 것이 조만간에 무림에 큰 혼란이 도래하겠구나. 분명 네놈은 그 혼란의 중심에 있겠지.”
“대사님 부처님을 섬기시는 분이 그런 악담을 하시면 부처님이 노하실 겁니다.”
안 그래도 정사 대전에서 멀어지기 위해 사황성마저 멀리하고 있거늘 그 중심에 있을 거라니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흥! 이것 또한 다 부처님의 뜻이겠지. 대답이나 하거라.”
“미천한 제가 소림에 무슨 힘이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만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언제고 돕겠습니다.”
“그거면 됐다.”
그 말을 끝으로 연수에게 등을 지고 돌아앉는 노승.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노승의 눈치를 보며 나가지 않고 입을 여는 연수였다.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궁금한 것도 많은 놈이구나.”
“신승 원공대사 맞으십니까?”
“아니다. 이름 없는 허드렛일 하는 늙은 중일 뿐이지.”
그 대답에 씩 미소를 머금은 연수가 벌떡 일어나 절을 올렸다.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
말없이 돌아앉아 있는 노승에게 고개를 숙인 연수가 뒤로 돌아 방을 나섰다.
흐릿해지며 땅으로 꺼지듯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방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노승이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부디 조화를 유지하며 나가길···. 그 조화가 무너지지를 않길···. 저 아이의 앞날이 중원 무림을 위해 험난하지 않기를···. 굽어살펴 주시지요.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