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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에서 고수까지-96화 (96/202)

# 96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거슬리던 살심이 눈에 녹은 듯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졌다기보다는 불편하지가 않았다.

어떤 위화감도 없는 평정심이 안정감을 가져왔다.

‘정사심도, 불변진본.’

두 구절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하여 이런 조화가 일어났는지는 잘 몰랐다. 노승에게 배운 것이 무엇인지도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깨달음은 분명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도 이성적인 논리로 정리되지도 않는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뜬구름 같은 깨달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암동을 펼쳐 지객당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한 방에서 소개와 공숙의 기세가 느껴지고 있었다.

‘나 참 아무리 마른 장작이 빨리 불타고 하룻밤 새에 만리장성을 쌓는다지만 이건 아니지.’

내력을 움직여 허공섭물의 묘리를 사용하여 닫힌 문을 열고는 암동을 최대로 펼쳐 방안으로 들어온 연수가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갑작스레 열린 문에 놀라 공숙과 소개의 시선이 밖으로 집중되어있는데 연수가 헛기침했다.

“큼큼!”

문이 열려 순간 시선을 돌렸는데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나자 펄쩍 뛰며 놀란 두 사람.

“헉!”

공숙은 손끝이 붉게 물들며 출수 준비까지 했다.

“뭐야? 어떻게 했어?”

붉게 물든 손을 거두며 묻는 공숙.

“그냥 했어요. 그보다 둘이 잘 돼 가나 봅니다?”

소개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화가 잘 통해서.”

“좋겠네.”

“그런데 어떻게 됐어? 늙은 땡중이 나쁜 짓 한 거는 없고?”

“아뇨, 오히려 도움을 주셨어요. 덕분에 불안하던 살심이 사라졌구요.”

그 말을 듣는 공숙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이제 걱정 없는 거야?”

“아마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응? 왜?”

아리송한 표정의 공숙의 눈에 근심이 어리기 시작하자 연수는 얼른 말을 꺼냈다.

“노야께서는 초절정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초절정이 되면 싫어도 정기신의 조화가 이루어질 거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 그 경지에 발을 디디지 못했어요.”

“그럼 지금 상태는 어떤 건데?”

“모르겠어요. 솔직히 왜 지금 안정이 된 건지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그냥 막연히 안정된 상태라는 것밖엔 설명이 안 돼요.”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소개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또 나빠질 수 있는 거 아니야? 지금이 조화를 이루어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건 그 조화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거잖아?”

“어쩌면, 그럴지도. 그런데 그럴 것 같지가 않아서.”

“어렵네.”

“중요한 건 소림에서의 볼일은 끝났다는 거지.”

소개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떠날 거야?”

공숙 역시 아쉬운 표정으로 연수의 눈치를 본다.

“아니. 당분간은. 어차피 독쟁이놈을 쫓아버려서 네가 있어야 해. 너와 절강까지는 같이 가야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개와 공숙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참 내, 거지는 싫다던 사람이 하루 만에···.”

투덜거리는 연수 때문에 불편했던지 공숙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피, 피곤할 텐데 일찍 쉬어. 나는 산책 좀 할게.”

소개 역시 은근슬쩍 같이 일어섰다.

“나도 이제 쉬러 가야겠다.”

그러고는 둘이 나가버리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연수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왜 소외감이 느껴질까?”

조용한 연수의 목소리가 좁은 방안에 울렸다.

며칠 동안 지객당에서 공숙과 종알종알 떠드는 소개.

매일 불공을 드리며 그 꼴을 지켜보는 연수는 점점 지쳐갔다.

도대체 저 거지 놈은 그것도 승개라는 놈이 정사 대전이라는 중원 무림의 격전이 일어났는데 어찌 저렇게 속 편히 여인과 수다나 떨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나름 큰 임무를 맡고 소림에 와 있을 텐데. 당장에 방장의 가사 자락이라도 붙들고 매달려야 할 놈이 만나주질 않는다는 이유로 여기서 이리 뻗대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참나, 박복한 놈은 외로워서 살겠나? 아주 살판들 났네.”

한창 종알거리며 수다를 떨어대던 둘은 잠시 심술 난 연수를 바라보더니 신경도 쓰지 않고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었다.

이제는 하도 심술을 부려대서 신경도 써주지 않는 둘이었다.

한숨을 쉬며 애먼 천장을 바라보는데 강력한 기운이 지객당을 향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소개의 농담에 대소를 터트리던 공숙의 웃음 또한 뚝 끊겼다.

영문을 모르는 소개만이 돌변한 둘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했다.

“손님이 온 모양이야. 아무래도 너한테 볼일이 있겠지.”

말과 함께 기막을 거두고 몸가짐을 바로 하는 연수.

그와 동시에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소 시주님 안에 계신지요?

집객당의 승려 목소리였다.

소개가 밖으로 나가자 연수는 눈을 감고 이목공을 운공하여 귀에 집중했다.

“반갑소이다. 집법당주님의 명으로 소 시주를 모시러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앞장서시지요. 따르겠습니다.”

멀어지는 둘의 발소리.

공숙이 기막을 치며 물었다.

“무슨 일일까?”

“뻔하죠. 소개가 온 이유야 소림도 알고 있으니 그에 대한 답을 주려는 거죠.”

“근데 왜 방장이 아니고 집법당주가 불러?”

“방장이 일개 사결 제자와 독대 하겠어요? 집법당주가 직접 만나주는 것도 과례죠. 배분으로 따지면 겨우 일대 제자 신분인데.”

“그래? 그래도 개방의 방주를 대신해서 온 건데···.”

“그것부터가 잘못됐죠. 누님은 일개 문파의 하급 무사가 문파를 대신해 부탁할 게 있다고 찾아오면 들어 줄 거에요?”

“미쳤어? 사부님이 한번 무시당하면 강호에서 얼굴들과 살기 힘들다고 누가 무시를 하면 본때를 보여주랬어.”

“마찬가지죠. 소개를 문전박대 안 한 것만 해도 대자대비한 거예요.”

공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떠날 준비를 하세요.”

“왜? 소 공자 말로는 쉽게 될 일이 아니라고 오래 걸릴 거라고 했는데···.”

몇 번을 들어도 공숙의 입에서 나오는 소 공자라는 말이 어색한 연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림의 장로가 주는 답이니 좋든 싫든 그걸로 끝이에요. 소개의 선에서는 더 어쩔 도리가 없을 겁니다.”

“잘 되면 좋을 텐데···.”

황당한 눈으로 그런 공숙을 바라봤다. 잘 되면 좋을 거라니 어이가 없었다.

“잘 되면 사파는 더 궁지로 몰리는데요?”

“아! 그렇게 되나?”

“안 그래도 물러설 곳이 없는데 소림까지 나서게 되면 정사 대전에서 사파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면 잘 안 돼야 하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연수가 일어서서는 짐을 쌌다.

봇짐에 빨아 놓았던 몇 벌의 옷가지를 넣으니 단출한 준비가 끝이 났다.

반 시진쯤 지나자 멀리서 소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복잡한 표정의 공숙이 안으로 들어서는 소개를 맞았다.

“소 공자! 어떻게 되었어요?”

그런 공숙의 얼굴을 보는 소개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지어졌다.

“일단은 돌아가라네요. 중요 결정은 소림 내에서도 단기간에 나기가 쉽지 않다고.”

“일단은 거절인 건가?”

쓴웃음을 지은 소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일개 사결 제자가 나서서 될 일은 아니니까.”

“도대체 너희 윗대가리들은 어째서 이런 중책을 네게 맡긴 거야?”

“...”

말없이 그저 어색하게 웃는 소개를 보며 연수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갈 길이 바쁠 텐데 빨리 떠나자.”

“그래.”

소개가 짐을 자신의 방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연수는 밖으로 나와 지객당주를 찾아 허리를 숙여 이별을 고했다.

“시주의 불심이 참으로 깊다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벌써 떠나시는군요.”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 하였으니 또 뵐 날이 있겠지요.”

합장하며 허리를 숙이는 연수를 보며 지객당주역시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시주의 여행길이 순조롭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인사를 끝내자 막 밖으로 나온 소개 또한 지객당주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소림을 등지고 밖으로 나섰다.

소림의 산문을 지나치는데 산문 옆에서 빗자루를 들고 쪼그려 앉아 있던 노승이 연수의 등 뒤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부디 약속은 잊지 말아라.”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합장하며 허리를 숙여 보이는 연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공숙과 소개였다.

빈 허공을 향해 합장을 해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실봉을 등지고 숭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숭산의 근처에 큰 마을에 들른 일행은 말과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는 서둘러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관도를 따라 말을 달리는데 저 멀리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말을달리는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말을 관도 옆으로 새워 길을 터주는 일행.

여덟 명의 말에 탄 무인들이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데 공숙의 눈매가 사나워지더니 살기가 휘돌았다.

연수의 전음이 공숙의 귀로 파고들었다.

-누이!

세로로 길게 찢어지던 공숙이 안정을 찾았다.

“알아.”

사나웠던 공숙의 살기에 놀란 소개가 어렵게 입을 뗐다.

“공 소저···.”

“아, 걱정 마요. 잠시 흥분한 것뿐이니까.”

“저 중 죽여야 할 놈이 있었어요?”

“응. 한 놈 있었어. 제일 앞서가던 놈.”

잠시 뒤를 돌아 멀어지는 남궁세가의 고수들을 바라보던 연수가 소개에게 조용히 이야기 했다.

“소개야 먼저 다음 마을로 가 있어. 제일 큰 객잔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 우리가 찾아갈게.”

“꼭 지금···.”

“소 공자. 못 봤으면 모르되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차마 돕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소개는 공숙을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 옆의 숲으로 말을 끌고 가는 공숙과 연수를 한참 바라보던 소개가 말의 옆구리를 차며 달려나갔다.

공숙과 연수의 신형이 사라진 숲속에서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빨리 잡아야 합니다. 마을이 근처에요.

-응.

빛살처럼 달려나가는 둘의 신형이 오래지 않아 남궁세가의 무사들 뒤를 잡았다.

연수의 손이 앞을 향해 뻗어지는 순간 여덟 명의 무인이 말의 등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무사들의 신형이 채 땅에 떨어져 내리기 전에 연수의 신형이 그들을 앞지르며 길을 막았다.

공숙과 연수가 앞뒤로 무인들을 가두는 형세였다.

땅으로 내려서는 무사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중년의 무사가 긴장 어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누구냐?”

복면 위로 드러난 눈을 빛내며 연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자비로운 은혜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딱 한 명만 죽으면 된다. 그럼 나머지 일곱은 산다.”

남궁세가의 창궁검대 여덟 명을 두고 겨우 단둘이 협박을 하고 있었지만, 남궁검대의 무사들은 차마 그 말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몇 해 전 소가주가 죽고 창궁검대의 무사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강호에는 암수일살이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고, 세가 내에서도 그 소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암수일살. 맞느냐?”

무거운 목소리에 연수는 빙글 손목을 들리며 손에 쥔 단검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일 나이 많은 중년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구냐? 누가 죽으면 되는 것이냐?”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너.”

여인의 목소리라는 사실보다 복면 위로 날카롭게 보이는 사목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이 한패였구나. 그랬구나. 그래서···.”

“거기까지. 유언은 그거면 충분하다. 어찌할 거지?”

중년인은 무사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 원수를 갚을 필요도 없다. 나를 살리려고 죽을 필요도 없다. 여기를 빨리 벗어나거라. 가족과 세가에는 피할 수 없는 은원의 고리가 찾아왔다 전해라.”

무사들은 차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은 창궁검대였다. 여기서 살아서 도망가면 남궁세가의 체면은 크게 깎일 것이 분명했다.

무가의 명예를 세우는 데에는 많은 피가 따르기 마련이다. 지금껏 세가에서 흘려온 피를 헛되이 만들며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었다.

“너희는 살아 돌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헛된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 가라.”

무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단 두 명만 장내를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검을 뽑는 여섯 무사.

무사들이 검을 뽑는 모습을 본 연수의 입이 열리며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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