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99화 (99/202)

# 99화

천장이 낮아 어정쩡하게 일어난 여인은 큰절을 올려왔다.

당황한 연수가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고개를 숙이며 일어난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대협의 은혜로 인해 큰 화를 면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야 인사를 올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딱히 할 말을 못 찾아 당황스러운 연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정계···.”

“정도화입니다. 대협.”

말을 가로막으며 얼른 말하는 여인.

“아···. 개명을 했구나. 아버님은 잘 계시니?”

어두워지는 여인의 표정.

여인이 손짓하자 여인을 지키는 호위가 밖으로 나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도화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대협의 도움으로 집안의 기울던 가세가 세워졌습니다. 그 후로 한동안은 처음으로 따뜻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적떼가 저희 마을을 약탈했고, 그 화적떼로 인해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저 또한 화적떼에게 납치되어 앞날이 깜깜했습니다.”

참혹한 이야기에 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세상이었다.

작은 산골 마을 하나가 도적 떼로 인해 박살이 나도 어떤 화제조차 되지 못하는.

담담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화적떼의 근거지로 끌려가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고, 또 그분이 제자로 받아 주셔서 지금껏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제자가 되었다는 말에 연수의 머릿속이 번쩍했다. 마차의 문양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혹시, 도움을 주고 제자로 받아 주었다던 사부가 귀형가의 망노?”

“예. 맞습니다.”

‘주결가의 애송이가 쫓던 여인이 이 아이였구나.’

망노의 악명은 자주 들었지만 설마 도화가 그 망노의 마수에 걸려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망치고 있었군.”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화였다.

“무공은? 망노의 무공은 얼마나 배웠지?”

“처음에는 꽤 알려주었지만 어느 정도 가르친 이후에는 상승의 무공을 가르쳐 주진 않았습니다.”

“그랬겠지. 자칫 자신이 다칠 수도 있는데.”

“저에게는 여덟 명의 사형제가 있습니다. 그중 저와 같은 처지의 사형제가 일곱입니다. 게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형제는 단 둘뿐입니다.”

“빌어먹을 늙은이. 노망이 났으면 조용히 죽을 것이지.”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앞으로는 어쩔 셈이야?”

힘없이 웃는 도화의 모습이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처량해 보였다.

“어찌 되겠지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사나운 팔자를 타고 났다며 한탄을 하시고는 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팔자인 게지요.”

담담한 그녀의 이야기에 문득 사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감히 감당할 수 있겠느냐? 저런 미인을 지키려면 보통 고수는 어림도 없다.-

‘사부 지금의 저는 이 아이를 지킬 만큼 고수가 된 걸까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망노 하나쯤은 어찌 감당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귀형가는 그리 만만한 가문이 아니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고개를 흔들던 연수의 시선으로 화사하게 웃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는 도화의 얼굴이 들어왔다.

활짝 웃어 보이는 저 웃음 뒤의 그림자가 같이 보이자 연수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대협. 그보다 대협이 혹시 명성이 자자한 암수일살이 맞으신 겁니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화의 눈이 가늘게 휘어지며 눈부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대협이 대단한 분일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제 뒤를 쫓던 주결가의 소가주 또한 쫓아 보내주셨다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그건···. 뭐 어쩌다 보니 그런 건데···.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야? 지금 같을 때 이런 곳에 있으면 위험해.”

“제게는···. 이곳이 더 안전합니다. 대협.”

“아! 그렇구나.”

귀형가의 망노가 노리는 이상 사파의 진영에서는 어디에 있건 위험할 수밖에 없는 도화였다.

차라리 이리 정파인이 득세하는 곳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망노라···.”

귀형가의 노망난 늙은이의 이름을 읊조리는데 강렬한 기운들이 지나치는 것이 느껴졌다.

-정파인들이 대협을 찾는 것 같습니다. 일단 만일을 대비하여 이곳으로···.

전음을 보내며 바닥을 들어 보이는 도화.

좌석 밑으로 조그마한 공간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만약을 대비해 만들어놓은 비밀공간인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좁은 공간으로 몸을 구겨 넣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도화였다.

문이 닫히자 암동을 운공하는 연수.

순간적으로 연수의 미약한 기운이 사라지자 고개를 갸웃하며 바닥 문을 슬쩍 열어 확인해 보는 도화.

그런 도화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내 무공의 특성 중 하나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도화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잠시 후 멈춰서는 마차.

이목공을 펼치자 한번 들어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니 마차를 확인해야겠어요.”

“이 마차에는 제가 모시는 아가씨만이 타고 있습니다.”

“그 판단은 제가 하죠. 일단 내리세요.”

‘제갈령이라 했던가?’

제갈세가의 여식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런 최전선으로 나선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다른 오대세가의 경우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중소문파들의 비난을 사고 있었다. 호북의 적벽현이라니, 언제 혈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전방이었다.

그런 곳에 남자도 아닌 여자가 나서다니 정상적인 상황같이 보이진 않았다.

잠시의 소란 후 열리는 마차의 문.

“무슨 일이시죠?”

싸늘한 도화의 목소리에 제갈령의 당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수일살이라는 천인공노할 공적을 찾고 있습니다. 실례인 줄 압니다만 면사를 거둬주시지요.”

“제가 듣기로 암수일살은 남자라 들었습니다만.”

주변으로 모여 있는 정파인들의 기세가 날카로워지는 감각을 느낀 연수가 손에 쥔 단검에 힘을 주었다.

“암수일살은 변장술과 변성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합니다. 그가 여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

‘쳇,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고. 전에 만났으면 골치 아플 뻔했네.’

만약 당진원과 같이 다니고 있을 당시 저 계집을 만났으면 정체를 들킬 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

-와···.

“되었습니까?”

“에? 예. 시, 실례를 범했습니다. 안전한 여행길 되시기를···.”

당황한 제갈령의 목소리와 주변의 술렁임으로 보아 도화가 면사를 풀어 보인 것이 분명했다.

마차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이목공을 펼치고 있는 연수의 귀로 도화의 미모에 대해 감탄하는 정파 사내들의 말이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어려서도 보통의 미색이 아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대단한 미모였다.

면사를 푸는 도화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눈치 없이 뛰는 심장에 내심을 숨기느라 힘들었던 연수였다.

바닥 문이 열리자 구겨놓았던 몸을 일으키며 나와 앉자, 면사를 풀어 내리는 연화였다.

‘후우, 다시 봐도 눈부시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지?”

“글쎄요···. 대협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면 대협을 따라가도 될까요?”

잠시 망설이더니 연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도화. 그런 도화의 눈을 바라보며 연수는 거절의 이야기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어떻게 생각을 해 봐도 도화는 연수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도화를 곁에 두려면 귀형가와 맞설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도화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귀형가는 멀고 눈부신 미모의 도화는 가까웠다.

‘아, 역시 나도 남자구나. 독쟁이 마음이 이러했겠지?’

“짐이 될 것이 뭐 있어? 이리 보여도 내가 나름 고수야. 너 하나 못 지켜줄까?”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입은 마음에도 없는 허세를 내뱉었다.

‘어떻게 되겠지.’

든든한 말을 들은 도화의 눈이 반짝였다. 연수의 허세를 있는 그대로 믿는 듯한 눈치였다.

암수일살이라는 별호는 지금의 사파에서는 그만큼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암수일살, 사패일성, 사천일도 현재의 사파에서 가장 떠오르는 별호들이었다.

특히나 사황성의 암귀대를 이끄는 사천일도는 신성처럼 등장하여 떠오르는 신진고수였다.

물론 연수야 그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아가씨.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도화.

“지금 여기는 어디지?”

대뜸 반말해 대는 연수에 의해 호위의 눈썹이 씰룩였다.

“홍호로 가는 길목이요.”

퉁명하게 대답하는 호위.

“너는 이름이 뭐지? 보아하니 정파의 물을 먹은 것 같은데···. 왜 도화의 옆에 붙어 있는 거지?”

순간 호위가 뒤로 물러서며 검을 뽑았다.

당황한 도화가 호위를 말리며 마차 밖으로 뛰어나왔다.

“정회야. 이러지 마.”

“아니요. 아가씨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요. 너! 암수일살이니 뭐니 떠받들어 주니 뭐 대단한 명숙이라도 된 양 행동하는데. 나는 너 따위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

순간 흐려지더니 사라지는 연수의 신형.

“그다지 거들먹거릴 생각은 없어. 그런 취향도 아니고.”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호위는 그대로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만 정체를 모르는 검객이랑 같이 다니기가 꺼려질 뿐이야.”

이어지는 연수의 말에 조용히 검을 집어넣는 호위.

‘제법 똑똑하네.’

검을 거두자 도화가 뛰어와 입을 열었다.

“정회는 호검파의 마지막 전인입니다.”

“호검파? 호검문과는 무슨 연관이 있나?”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여는 정회의 목소리에는 너무도 차가운 한기가 서려 있었다.

“호검문의 형제 문파였다.”

“형제 문파?”

“호검문의 전전대 장문인의 셋째 아들이 세운 문파가 호검파니까.”

들어본 적이 없던 연수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호검문이라면 절강에서는 제법 이름이 퍼져있었지만 호검파라는 문파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형제 문파라면서 어째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네.”

“그건···.”

도화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정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도화를 잠시 바라본 정회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검문이 우리 호검파를 멸문시켰어. 애초에 그리 크지도 강하지도 못한 소문파였던 우리는 끊임없이 호검문의 합문 제의를 받아왔었는데···. 5년 전에 호검문의 장문인이 우리 아버지와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는 문파의 모든 무사를 흡수해 가 버렸지.”

“문파의 불구대천 원수를 따라나섰다고? 문도들이?”

“호검문주가 우리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인 걸 모르니까. 오직 나만이 알고 있으니까.”

“호검문이 왜 그렇게까지···.”

“그놈은! 야심으로 가득한 놈이야. 정파를 가장하고 있지만 하는 짓은 사파보다도 악독한 놈이니까.”

그러고 보니 소개에게 자신이 떠난 후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호검문주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그런데 어쩌다가 도화와 같이 다니는 거야? 호위까지 자처하고?”

“아가씨에게는 큰 은혜를 입었어. 하여 평생을 모신다고 하늘에 맹세했으니까. 그저 맹세를 지킬 뿐이야.”

“알고 있는 거야? 도화는 따지면 사파인이야.”

“알아. 어차피 정파니 사파니 따져봤자 다 똑같아.”

“그럴 수도 있지.”

사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정사에 대해 정회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

“뭐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의심은 하지 않지. 다만 후연화개에 연연해서는 대성할 수 없을걸? 종남의 정석은 누가 뭐라 하던 일진쾌참이야.”

정회의 눈에 의구심이 가득 차올랐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수를 노려보는 정회.

“그냥. 괜한 참견인 것 같지만, 고민이 깊은 것 같길래. 종남의 무공과는 나름대로 인연이 있는 편이라.”

“어떻게···.”

“아, 못 들었어? 우리 사부가 장수무투야. 나도 그런 업을 지고 있는지라.”

그러고 보니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최근 암수일살이 믿을 수 없는 활약을 하며 그 활약상에 잊혀 있었지만, 그의 본질은 무공도둑이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사내놈이 도둑질이나 하는 것은···.”

손을 들어 정회의 말을 막는 연수.

“그런 논쟁은 하지 말자. 입만 아프니까.”

막 아미를 구기며 따지려는 정회의 말문이 연수의 한 마디에 막혀버렸다.

“일진쾌참 배무진활 쾌상전강 잘 연습하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 장담하지.”

“쾌상전강?”

언제 따졌냐는 듯 물어오는 정회를 보며 피식 웃은 연수의 입이 열렸다.

“높이 올라 보니 뒤가 보이지 않고 나아가다 보니 길이 열리는구나. 용천 곡지 합곡 다시 합곡 양천 슬양관. 삼 할에서 육 할 정도로 육 할을 유지하며 삼 푼으로. 아마 조금 연습해 보면 감이 잡힐 거야.”

일러준 구결을 외며 중얼거리는 정회를 두고 모닥불을 피울 땔감을 줍기 위해 몸을 돌리는 연수.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인들은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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