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상)
모닥불을 피워 놓자 도화가 조용히 연수의 옆으로 앉았다.
별말 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는 두 사람.
침묵이 어색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같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감정과 충족감이 느껴졌다.
“고 대협. 대협은 어떻게 무림인이 되셨습니까?”
문득 묻는 도화의 물음에 연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쩌다 무림인이 되었더라···.’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무공 따위 믿지 않았다.
사람이 하늘을 날고 손에서 장풍이 나가고 일 검에 태산을 가르고···. 모든 소문은 21세기의 과학적인 사회를 살아오던 연수로서는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지금도 과학적으로 이런 무인들의 무위를 증명하라 하면 입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만사천우와 사대금강의 대결을 보고 정신을 빼앗겼지.’
영혼이 사로잡히는 듯한 바램. 원했다. 저 무를 저런 무인이 되기를 갈구했다.
목적도 목표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 그냥 되고 싶었어. 동경심 같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연수의 입이 열렸다.
“그냥. 멋있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도화.
“그렇군요. 저는 대협 때문이었습니다. 사부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것은 처음 저를 구해주었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선뜻 제자가 되겠다고 한 이유는 대협 같은 아니 대협이 몸담은 무림에 발을 디디고 싶었습니다.”
흠칫하며 도화를 바라보자 묵묵히 모닥불에 시선을 두고는 말을 이어가는 도화였다.
“아버님에게 수없이 매일 저녁 대협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덩치가 몇 배는 크던 그 악독한 놈을 단숨에 제압하던 대협의 무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의원의 치료를 받으며 웃음을 찾으신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매일 저녁이면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고 또 듣고···. 그러면서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대협을.”
‘그랬던가···. 그 작은 참견이 누군가에게는 그리 큰 변화로 찾아오는 건가···.’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무섭던 그 악독한 놈이 금자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던 그 날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 금자 한 냥이 제 가족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다음 추수까지 버틸 수 있는 따뜻한 밥이 되었습니다.”
무거워진 연수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무림인이 되고 나니 후회되지 않았어? 나를 원망하게 되지 않았어?”
원망이라는 말에 도화는 밝게 미소지었다.
“그럴 리가요. 언제나 대협의 등을 바라보았습니다. 보잘것없는 무공을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 언제 몸을 빼앗길지 모르는 날들이었지만 그래도. 대협의 등을 보고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랬구나.”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날 그 흑돈이 만약 자신의 밥상을 뒤엎지 않았다면 과연 자신은 참견하고 나섰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시도 지금도 자신은 사파인 이었다.
사부를 따라 처음 구룡산을 오르고 들었던 사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사의 구분이란 무공의 구분일뿐. 선악의 구분이 아니다.-
‘협의란 건가?’
-협은 객관적이어야지. 주관적이 되면 그저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니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더 강한 무공 더 강한 무위. 고수가 되어야 했다. 목적도 목표도 없었다. 그저 고수가 되어 강호에 우뚝 서고 싶었다.
‘왜? 나는 왜 고수가 되려 했을까? 고수가 된 지금은? 나는 왜 무림의 끊을 수 없는 은원의 고리 속으로 몸을 던졌지?’
-정사심도. 불변진본.-
여덟 글자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후우.”
한숨을 내쉬자 도화가 의아한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에 연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
“고민이 있으십니까? 혹여 저 때문에···.”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무림에서 이리 발버둥을 치고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어.”
“대협은 대협의 도의와 협의가 있지 않으십니까?”
‘도의? 협의? 나한테 그런 게 있었던가?’
피식 웃으며 기분을 환기한 연수가 도화를 바라보았다.
“대협이라는 말. 내가 들을 말이 아니야.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게 어떨까?”
“대협은 누가 뭐라 하던 제게 대협이십니다.”
“내가 불편해서 그래.”
“그러시면 제가 뭐라···.”
“오빠···. 는 좀 그러니까···. 오라버니라고···.”
눈치 없는 심장이 또 두근거리자 말을 채 끝맺지 못하는 연수.
“앞으로 오라버니라 부르겠습니다.”
깊은 눈을 빛내며 말하는 도화를 보는 연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채신머리없이 기쁘네’
한참 둘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데 정회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슬양관에 육 할을 어찌 유지하라는 거야! 어디서 엉터리로 알려줘서는! 주화입마라도 빠트리려는 속셈이지?”
한참 좋았던 분위기가 깨어져 나가며 연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산만 높다 한다더니···. 고작 그거 연습해서 된다면 누구나 다 고수 소리 듣게? 그리고 그 알량한 내력으로 주화입마에 빠지기도 힘들어.”
“뭣?!”
검 손잡이로 손이 가는 정회에게 순식간에 다가선 연수가 정회의 검 손잡이를 밀어 넣었다.
잠시 빠져나오던 검이 더 빠르게 검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검부터 빼 드는 버릇. 그거 고쳐. 나니까 그냥 넘어가지 성질 더러운 사파인들은 안 봐준다.”
말이 끝나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는 연수를 보며 정회는 한동안 씩씩대더니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좀······. 봐.”
“응?”
# 100화 (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이목공을 익혀 귀가 밝은 연수조차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다.
“좀···. 더 알려줘 보라고···.”
“풉!”
덜컥 웃음이 나왔다. 자존심 강해 보이는 무인이자 여인이 무공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이 마치 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어렵게 꺼낸 이야기였는데 연수가 웃어버리자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못 드는 정회였다.
“무인의 욕심이라···. 똑같구나. 결국, 요체는 아무리 설명해줘도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해. 아무리 옆에서 알려줘도 본인이 느끼는 것은 다르니까. 그렇기에 정석적인 명가의 가르침이 존재하는 거고, 그런데도 수많은 주석이 달린 해독서가 있는 것이야. 잠깐 해보고 안된다고 해봤자 해 줄 말은 없어.”
단호한 연수의 말에 정회의 눈에 불신감이 가득 찼다.
“그런 눈으로 봐도 할 수 없어. 가르쳐 주기 싫은 게 아니야.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도둑놈주제에 노력이라니 헛소리라는 생각이 드는 정회였다.
그녀의 표정에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서였을까?
“왜? 도둑놈이 노력이라는 말을 하니 이상해?”
뜨끔 하는 정회.
“무공을 도둑질할지언정 노력은 도둑질할 수 없어.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가져다준다 해도 익히고 노력을 쏟아 파고들지 않으면 대성할 수 없어. 내가 도둑질만 해서 이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정회에게 연수는 한숨과 함께 조언해 주었다.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많지 않아. 특히나 무공은 더욱. 나는 너보다 못한 무공을 육 년이 넘도록 하루 여덟 시진 이상 익혀왔어. 그렇게 기초를 잡고 강호로 나와 상승의 무공들을 도둑질해왔다. 너는 하루 얼마나 수련을 하지? 세 시진? 아니 그것도 못하나?”
충격을 받은 듯한 정회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수를 바라봤다.
“여덟 시진이라니! 어찌···.”
“그런 세계야. 네가 발을 디디고 있는 무림은. 하수가 하수인 이유가 있는 거야.”
정회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떨어졌다.
도화가 놀라서 정회를 위로하려 했지만, 연수는 손을 들어 도화를 막았다.
“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상관없어. 여인이라 여리다는 말을 할 생각은 없어. 무인으로서 흘리는 눈물이라면.”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불구대천의 원수 진수상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자신의 형제와 아비를 베면서 했던 잊을 수 없던 그 말.
-무인으로서 게을렀던 자신을 탓하시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게을렀다? 자신과 자신의 아비와 형제들은 게을렀던가? 그래서 도태된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암수일살의 말이 촌철이 되어 가슴에 박히는 것은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분하면 노력해.”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는 암수일살이 너무나 매정하게 느껴지는 정회였다.
다음날이 되자 연수와 거리감이 느껴지며 어색해진 정회는 선뜻 연수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이동을 시작했다.
“여기 마을에서 마차를 팔고 물길로 이동을 하는 것이 어때?”
“저는 상관없습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는 말을 계속 들어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연수였다.
주뼛주뼛 입을여는 정회.
“왜 물길로 가야 하지?”
“다른 것은 상관없는데 호남으로 가서 저 마차를 타고 다니면 곤란한 일이 생길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도화와 다르게 정회는 불만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
“할 말이 있으면 참지 말고 해. 언제부터 할 말 안 할 말 가렸다고······.”
“흥! 굳이 그런 이유로 지금껏 잘 사용해 온 마차를 버린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을 뿐이다.”
“이 속 편한 아가씨야. 후회할 때는 이미 늦어. 지금껏 괜찮았으니 앞으로 괜찮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
“쳇.”
마차를 헐값에 넘기고 나루터에서 배에 오르는 세 사람. 제법 큰 배였기에 배를 처음 타는 도화와 정회 역시 바로 멀미가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자리에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원래 큰 배는 멀미가 천천히 독하게 오는지라. 적응할 때까지는 고생이 될 거야.”
정회가 아미를 구기며 짜증을 냈다.
“그러게 왜 배를 타자고 해서는!”
무심하게 대답하는 연수.
“물길에서는 예측 못 한 적을 만날 확률이 낮으니까.”
“이···!”
할 말이 없었다. 저 얄미운 놈은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었다. 하는 말마다 반박할 여지가 없어 더 화가 났다.
“며칠 지나면 적응이 될 거야.”
말을 하고는 나가는 연수.
그의 말처럼 며칠이 지나자 배 위에서의 생활에 적응이 되며 지낼 만 해졌다.
그러자 연수의 생활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제일 늦게 잠들고, 제일 일찍 일어나는 연수. 연수의 잠든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정회였다.
“매일 명상만 하는군. 고수라고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잔뜩 비꼬는 정회의 말에 피식 웃은 연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명상은 항상 습관화시켜 두는 게 좋아. 무인의 엉덩이는 무거운 편이 좋아.”
“흥!”
그러면서도 연수를 관찰하는 정회는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의 고수씩이나 되었으면서 자신보다 훨씬 더 수련에 힘쓰는 모습은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그때부터 연수를 대하는 정회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예민한 연수가 이를 못 느낄 리 없었지만 모른척했다.
“일보진쾌 말인데 만약 적이 더 강하게 부딪혀 오면 어쩌지?”
“강한 적보다 빠르게. 이게 기본이야. 종남은 강을 따로 추구하지 않아. 쾌가 강과 같다고 보니까.”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회였다.
이런 식으로 고민하던 것을 물어보면 별 잘난 체 없이 알려주는 연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