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둑놈에서 고수까지-111화 (111/202)

# 111화

평소 군사의 역활을 하던 진벽가주가 입을 열었다.

“성주님! 굳이 저를 배제하고 작전을 수립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부릅뜬 눈을 성주와 그대로 마주치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성주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놈과 갑자기 세운 작전이다 보니 이리되었어. 걱정 마 따돌릴 생각 없으니까. 상세한 작전은 맡겨두지.”

그제야 눈에 힘을 풀며 고개를 끄덕이는 진벽가주였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사안에 대한 모의를 한참이나 한 후에야 겨우 자리가 끝이 났다.

한숨을 푹 쉬며 돌아서는데 몇몇 가주 들이 다가왔다.

처음과 다르게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오는 팔쇄가주와 진벽가주 그리고 새로운 귀형가주.

“나는 팔쇄가의 가주 재반걸이라 하네.”

마지못해 포권을 하며 인사를 받는 연수였다.

“나는 진벽가의 황류문이라 하네. 성내의 군사 역할을 자처하여 맡고 있다네.”

“두 선배님 반갑습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암수일살 고연수라 합니다.”

“크크크 설마하니 성주님 앞에서 그만한 기세를 뿜어댈 줄이야.”

새로운 귀형 가주 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수의 패기를 농담으로 책잡았다.

“비 형이었으면 아마도 이 자리에서 그 도를 뽑았을 거요.”

“아무리 나라도···. 큼큼!”

뒷말을 흐리며 헛기침을 하는 비영.

어떤 자리를 막론하고 자신의 사문이자 사부나 진배없는 성주의 욕을 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은 단연코 끝장을 볼 것이 틀림없었다.

팔쇄 가주는 주결 가주를 은근히 책망하고 나섰다.

“아무리 새로운 얼굴에 반감이 든다 해도 함부로 사문을 모욕한 건 주결 가주가 실수한걸세.”

사대 가문 중 두 가문과 가깝게 이야기를 하자 주변에 눈치를 보며 자리를 뜨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있던 가주 들의 귀로 팔쇄 가주의 이야기는 똑똑히 들렸다.

당연히 안절부절못하고 대전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주결 가주의 귀에도 그 이야기는 또렷이 들려왔다.

“강호의 은원은 때론 아주 작게 시작하여 피를 보더군요. 저는 한 번도 은원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언젠가 이 고리를 풀 날이 오겠지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주결 가주는 더는 참지 못하고 연수에게 다가왔다.

“저, 적영대장. 아까는 내 큰 실언을 했소. 이렇게 고개 숙여 사죄할 터이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오.”

가뜩이나 열두 가문 중에 가장 전력이 약하다 평가받는 주결가였다.

보유한 고수의 수는 제법 많았지만, 절정고수의 수가 현저히 모자라는 주결가였다.

그것 때문에 항상 기를 펴지 못하던 그가 이렇게 많은 가주 들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아직 이립도 되지 못한 애송이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잠시 그런 주결 가주를 빤히 바라보던 연수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뭣도 모르는 하수가 제 사부를 모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놈은 제 사부가 누군지도 모르고 혓바닥을 놀린 것이라 너그럽게 한 보름 요양할 정도로 죽지 않을 만큼 패주고 봐 주었죠.”

주결 가주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돌았다.

“그 이후로는 감히! 내 앞에서 사부를 위협하는 놈들도 있었지요! 그들은 단 한 명을 빼고 모두 목을 갈라 죽였소. 그들이 곤륜파의 놈들이오.”

이번에는 반대로 피가 차갑게 식으며 손발이 차게 식기 시작하는 주결 가주였다.

“난 분명 당신네 가문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분명 소가주 놈이 내게 고맙다며 오체투지를 하고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리 앞과 뒤가 다를 줄 몰랐소.”

“그, 그게···. 내 잘못했네! 길게 변명하여 무엇하겠나. 모두 내 좁은 속을 탓하고 봐 주시게!”

무릎만 꿇지 않았지 빌다시피 하는 주결 가주였다.

그에 한숨을 푹 내쉰 연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내 사부를 볼 일이 있거든 오늘의 일을 꼭 사과하시오. 그걸로 이번 은원은 잊겠소.”

“고, 고맙네. 내 자네의 사부를 볼 날이 있다면 피하지 않고 사죄하겠네.”

주결 가주의 굽신거리는 모습에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철목 가주가 다가왔다.

“위세가 대단하군!”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뿜어내며 기세를 뿜어내는 철목 가주.

팔뚝은 웬만한 무인 허벅지보다 두꺼워 보이는 근육 덩어리에 구릿빛 피부. 그리고 짧고

하얀 머리와 수염이 인상이 강렬한 노인이었다.

그의 기세에 주변에 있던 가주 들이 뒤로 물러나며 길을 열었다.

“그러는 노인장 위세도 만만치 않소이다.”

자신의 기세에 정면으로 맞서오며 입을 놀리는 암수일살에 의해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철목 가주 철가군이었다.

열두 가문 중 화령가와 철목가만이 유일하게 혈연으로 이어진 진정한 가문이었다. 게 중에도 망노와 화령가주를 빼면 유일하게 초절정고수인 자신이었다.

“허! 젊은 놈의 패기가 제법이구나!”

더욱 기세를 올리며 연수를 누르려는 철가군.

“거, 늙은 양반 기세도 만만치 않수다.”

철가권의 이마에 두꺼운 핏대가 잡히며 구릿빛의 그의 안색이 붉어져 왔다.

그가 언제 이런 어린놈에게 이런 망발을 들어보았겠는가?

“풉! 크하하하”

눈치 없이 대소를 터트리는 살귀도 비영.

“대단한 입심이구나! 대단해! 하하하 성주님이 절대 네놈이랑 입씨름하지 말란 이유를 알겠다. 도무지 말로는 이길 수가 없겠어.”

갑자기 끼어들어 헛소리를 해대는 비영을 노려보며 철목 가주가 씹어뱉듯 말을 뱉었다.

“요즘 어린 것들은 철목가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는구나.”

철가군의 기세에 싸한 날카로운 살기가 섞였다.

연수와 기세 싸움을 하며 후끈 달아올라 있던 장내가 차갑게 식었다.

피식 헛웃음을 지은 연수가 살기를 풀어내려는데 비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내 분명 이야기했소. 성주님은 여기 적영대장과 그 어떤 입씨름도 간섭도 말라 했소.”

눈빛이 홱 변하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낮게 읊조리는 그의 말이 마치 으르렁거리는 늑대의 경고음처럼 들려왔다.

-스아아

순식간에 사라지는 철가군의 기세.

“쳇!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남들 두 배는 되는 큰 몸을 홱 돌려서 대전 밖으로 사라지는 철가군.

“귀형가를 맡았다고 기고만장하지 말아라.”

철가군의 뒤를 따르며 비영에게 경고를 날리는 화령가주 주염철이었다.

그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하는 비영.

팔쇄 가주가 혀를 차며 그런 두 가주를 나무랐다.

“어허! 거, 성질들하고는. 앞으로 힘을 합쳐 생사를 건 결전을 함께할 전우이거늘···.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거칠게 살아온 자들이라 저래.”

“신경 쓰지 않습니다.”

팔쇄 가주는 짧지만 몇 마디 연수와 나눠보는 것만으로 그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받은 대로 돌려준다. 좋게 대해 주면 예로 보답하고 막대하면 망발로 되돌려 준다. 철목 가주는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은 노고수다. 그런 그를 늙은이라며 면박을 주는 이십 대 청년고수라니.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먼저 다가오기를 잘 했지.’

보지 않아도 철목 가주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모든 가주 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에 가까운 망발을 듣고도 물러서는 마음이란 오죽할까?

고개를 저어 생각을 정리한 팔쇄 가주는 연수에게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럼 결전의 그 날 보세. 그날의 승전보와 함께 술 한잔 기울이지.”

“예.”

팔쇄 가주를 중심으로 다른 가주들 역시 간단한 인사를 하고는 모두 대전을 빠져나갔다.

단둘이 남은 비영과 연수.

“굳이 안 껴들었어도 좋았을 텐데요.”

“성주님의 당부가 있었다. 분명 네놈이 철목 가주나 화령 가주에게 시비를 걸고 꺾으려 들 테니 반드시 말려 불필요한 말썽을 방지하라 하셨다.”

“쳇!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양반이라니까.”

“굳이 지금 힘 못 써서 안달할 필요 없지 않나?”

“그전에 깨달음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다고 성주께서 직접 받아줄 것 같지도 않고.”

“그 경지에 올랐으면 그만 만족해도 되지 않나?”

“...”

대답 대신 어이없게 바라보는 연수의 반응에 비영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본인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이나 해보시오.”

“우문이었군. 어떻게 나라도 부족하지만 상대해 주면 어때?”

“나에게 도움도 안 되는데 베풀 생각 없소.”

-그럼 나는 어떤가!

쩌렁쩌렁 울리는 사자후와 함께 대전으로 날아 들어오는 고수.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묶은 머리는 살짝 흐트러져 있는 모습에 까칠한 수염이 인상적인 남자.

그 남자를 보는 연수의 눈이 커졌다.

“사패일성! 뵙고 싶었습니다.”

호의적인 연수의 태도에 사패일성이 어정쩡하게 섰다.

분명 듣기로는 호승심이 강하고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고수라 들었는데 무언가 소문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했다.

“나, 나를 알던가?”

“강호 초출 시절 먼발치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지요. 사패일성! 그 별호는 사파인에게 작은 의미가 아니지요.”

“그랬던가? 그렇다면 어떤가? 한번 어우러져 보는 것이?”

“글쎄요. 큰 싸움을 앞두고 내력을 쪽쪽 빨리면 제대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크크크 왜 겁이 나는가?”

“나지요. 무인에게 당신은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악몽 아니겠습니까?”

은근한 도발을 농으로 넘기는 연수.

슬슬 기세를 끌어올리는 그를 보며 슬쩍 뒤로 물러서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두 분은 어떠십니까?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사패일성과 살귀도. 과연 두 분의 우열은 어떻게 될까요? 두 분의 무위를 직접 본 저로서도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데요?”

두 무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훗. 정말이지 자네의 혀는 대단하군.”

한발 물러서는 비영.

하지만 사패일성 강진후는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두 눈 가득 호승심이 담겼다.

“살귀도라는 명성은 요즘 자주 들었지. 정사 대전을 개전시키며 정파 놈들 모가지를 땄다고?”

난처한 표정의 비영이 한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사패일성의 명성에 비하겠습니까?”

“글쎄, 내 명성은 그저 선대의 후광일 뿐. 내 힘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

손에 쥔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 강진후는 비영을 은근히 노려보았다.

“어떤가? 한번 어우러져 보는 게?”

“큰일을 앞두고 그럴 수는 없지요.”

“쳇!”

둘의 신경전을 한발 떨어진 곳에서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던 연수는 둘의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자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그럼 저는 바쁜 일이 많아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려 대전 밖으로 나서는 연수.

그런 연수를 바라보는 비영과 강진후의 눈에 타오르는 듯한 호승심이 이글거렸다.

그런 둘이 서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

씩 웃으며 팔을 걷어붙이는 둘.

‘응?’

순간 일렁이는 기세를 느끼며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고, 조금 전까지 연수가 있던 자리로 장력과 검기가 덮쳐왔다.

-쾅!

-이거, 이거 누가 사파인 아니랄까 봐 암수가 매섭습니다.

전성을 이용하여 퍼지는 목소리에 연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공격을 대비하는 둘.

-저 암수일살이에요. 암수로 싸우면···.

“둘 다 죽을 텐데요?”

오싹.

두 무인은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살기에 순간 목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등골로 소름이 오르며 목덜미가 간질간질하는 감각.

순간 살기와 연수의 기척이 사라지며 그들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요. 다음에 받아줄 테니 벽을 깨고 찾아오세요.”

싱긋 웃으며 몸을 돌리는 연수를 둘은 붙잡을 수 없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 순간 느꼈던 본능에 새겨지는 공포심의 여운이 가시지를 않았다.

“하하···. 하, 이것이 초절정인가 봅니다.”

“아찔하군. 비실비실 웃길래 우습게 보았는데 순간 느껴진 피비린내가 역겨울 정도였어.”

한참을 연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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