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주렴각으로 돌아온 연수를 맞는 일행들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연수를 맞았다.
“뭐지? 이 눈빛은?”
“오늘 보니 암수일살의 존재가 다르게 보이더라고. 그 환호는 완전히 영웅 취급이던데?”
소개의 말에 민망해지는 연수였다.
솔직히 이 정도의 환호와 기대를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정사 대전의 국면에 자신의 별호는 생각보다 더 많은 사파인 들의 기대를 사고 있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떠날 채비나 해.”
그 말에 도화의 표정에 슬픔이 떠오르고 있었다.
큰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물이 고이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아리게 했다.
“금방 돌아올게.”
애써 웃음 지으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더 눈에 밟히는 연수였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 도화와 연수.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애틋할 만큼 아련한 눈빛들을 주고받는 둘.
그사이 준비를 끝낸 공숙과 소개가 나왔다.
“가자.”
“예.”
대답하고는 정회를 바라보는 연수.
“부탁한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돌아올 때까지 잘 지켜다오.”
정회는 콧방귀를 뀌며 눈을 흘겼다.
“당신의 부탁이 아니라도 아가씨는 내가 지킬 테니···. 뭐 걱정하지 마.”
까칠하게 대답을 하던 그녀는 너무나 진지하고 깊은 연수의 눈빛에 뒷말을 바꿨다.
정회에게서 감나무로 시선을 옮기는 연수.
“천영이라 했지? 부탁 좀 하자.”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지요. 저희가 있는 동안은 패천화의 손톱 하나 다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쐐애액!
연수를 향해 날아오는 두 줄기의 빗살.
가볍게 손을 휘둘러 빗살처럼 날아오는 물체를 부드럽게 잡는 연수.
-야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고 싶다고 완성되기 전까지 그걸로 버텨 달라더군요.
두 자루의 단도를 들어 살펴보는 연수.
익숙한 초승달 모양은 아니었지만 제법 예기가 느껴지는 것이 쓸만한 단도였다.
“잘 쓰지. 그럼 부탁하마.”
주렴각을 벗어나는 연수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면 마음이 불편하여 오래 남을 것 같아 두려웠다.
“쳇, 한번 돌아봐 주질 않네.”
정회의 말에 도화의 입이 열렸다.
“마음이 여리셔서 그런 거야.”
“어째 한번을 안 돌아보냐?”
소개의 말에 대답 없이 걸음을 옮기는 연수. 공숙이 그런 연수를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마음이 여려서 그렇지 뭐.”
사황성을 빠져나올 때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과례를 받으며 사황성에서 멀어진 연수의 입이 열렸다.
“준비는?”
순간 연수의 앞으로 솟아나는 네 명의 인영.
“모두 마쳤습니다.”
“몸은 괜찮지? 성주님이 한 열흘은 누워있어야 한다던데···.”
“그 정도는 하루면 충분히 회복합니다.”
말을 마치는 중년인의 얼굴에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푸른 멍이 선명했다.
“그래. 그럼 일단···. 호북에서 시작해 보자.”
“무당으로 가는 겁니까?”
“미쳤어? 달랑 우리끼리 무당으로 가서 어쩌려고?”
의아한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보는 중년인.
“그럼?”
“호북의 비도문과 태령검문을 친다. 친다고 해도 요인암살이야. 두 문파의 주요 인물은 손닿는 한 죽이고 동쪽으로 빠지며 정파의 요인들은 보이는 족족 암살한다.”
“비도문과 태령검문을 건드는 순간 무당과 무림맹이 움직일 겁니다.”
“알아. 호북에서는 시간과 싸움이다. 호북에서 열흘 안에 안휘로 가야 해. 강행군이 될 거야.”
“안휘요?”
“지금부터 보름 후 총력을 기울인 전력이 강서의 전선을 뚫어 남궁세가를 지울 것이다. 우리는 호북을 뒤흔들며 저들의 시선을 빼앗고 안휘에서 성의 전력과 합류한다.”
“아! 그렇군요!”
중년인의 눈에 투기가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너희 넷의 임무는 단순해. 추적방지와 성과의 연락. 특히 너는 밑에 부하를 잘 챙겨.”
“알겠습니다.”
깍듯한 중년인의 태도에 연수의 머릿속으로 매가 약이다. 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일행은 말을 타지 않고 중년인이 준비해 온 큰 마차로 올라탔다. 말이 여덟 마리나 붙어서 끄는 마차는 일행이 다 타도 채우지 못할 만큼 넓었다.
중년인의 밑에 무인 세 명이 돌아가며 마부를 대신해서 모는 마차는 빠른 속도로 중경을 향해 달려갔다.
거의 쉬는 시간 없이 마차에서 먹고 자며 중경을 돌파한 일행은 호북으로 향했다.
며칠을 마차에서 보낸 일행은 이제 제법 친해져 있었다.
“옥안쌍편의 명성은 당시 대단했었소. 특히 특유의 편법과 그 미모는 많은 남자를 잠 못 들게 했었지요. 당시 유명 정파의 소가주가 따라다니며 구애를 하다가 가문에서 파문된 사건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요.”
“우리 사부님이 미모가 뛰어나긴 하셨죠.”
“인제 보니 그 사부의 그 제자요. 옥안독주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닌 것 같소.”
얼마 전에 알게 된 공숙의 별호.
사파인들을 중심으로 공숙을 부르는 별호라 했다. 옥안의 독거미라는 별호는 그야말로 공숙을 그대로 표현한 별호였다.
“옥안과 화개의 만남이니 천생연분 아니겠소?”
제법 일행에 잘 녹아드는 중년인을 보며 걱정을 더는 연수였다.
첫 만남부터 반골 기질을 보이는 중년인 때문에 나름대로 걱정이 많았던 연수였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제법 처세술이 뛰어난 중년인이었다.
일행이 귀주를 떠난 지 겨우 칠 일이 채 못 되어 호북에 도달했다.
마차에서 내리는 일행의 모습은 완벽한 고관대작의 자제와 그 호위들이었다.
공숙을 제외하고는 모두 호위무사의 차림이었고, 귀티 나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공숙은 누가 보아도 높은 집안의 따님이었다.
-이제부터 속도전이야. 비상상황이 되지 않는 이상 모든 작전은 나 혼자. 그 전까지는 지금의 위장을 유지하며 최대한 안휘까지 가는 거야.
여섯 무인의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전성에 여섯 사람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현에 위치한 비도문은 무당의 속가 중 유일하게 검을 사용하지 않는 문파이자 문도 수가 많은 문파였다.
무당의 속가 중 가장 그 세력이 큰 곳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손에 꼽히는 곳이었다.
그런 문파를 홀로 침입하여 요인을 암살한다고 하는데도 일행은 아무도 연수를 말리지 않았다.
-조심해.
그저 공숙만이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를 할 뿐.
-이 객잔에서 머물고 있으세요. 내일 첫 배를 타고 바로 물길로 단풍 현까지 이동해야 하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첫배를 타세요. 제 말이 있기 전까지는 꼭 지금의 위장을 유지하세요.
-응.
일행이 객잔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해가 넘어가고 달이 떠오르자 비도문의 담을 뛰어넘은 연수.
담을 넘어 제일 안쪽에 있는 전각을 향해 직선으로 이동하는 연수의 눈썹이 씰룩였다.
암동을 펼치고 건물들의 지붕을 밟으며 달려나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비도문의 장원을 겉돌고 있던 것이다.
방향을 여러 번 바꿔가며 주요 전각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도무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진법?’
진법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너무나 노골적인 진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연수는 진법에 대해 지식이 전무 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사람이 펼치는 진법이라면 그 기운을 읽으며 파훼라도 시도해 보겠지만 이런 지형진은 파훼법은 고사하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아는 바가 없었다.
사부는 이런 지형진이 펼쳐진 곳은 그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차선이오, 진법을 설치한 자를 포섭하는 것이 최선이라 했다.
‘분명 별 대단한 진은 아닌 것 같은데.’
사부에게 들은 바로는 진법은 돈이라 했다. 큰 면적을 차지할수록 큰돈이 든다고 했다. 그런데 비도문 전체를 둘러싸는 진법이라면 분명 대단한 진을 설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본채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간단한 진일 테고 실제로 겪어본 바로도 그러했다.
한참 주변을 돌다 보니 곳곳에 근무를 서는 무사들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세 곳의 길목을 꼭 통과하여 장원의 안채로 들어갔다.
‘저기가 생문?’
연수의 신형이 무사들을 따라 길목을 지나쳤다.
“응? 웬 바람이···.”
근무를 서는 무인 하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떨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몸살이 오려나 봐. 바람이 차네.”
안채로 들어선 연수는 미리 준비해 놓은 용모파기를 꺼내 들었다.
열두 장의 용모파기를 다시 한번 훑어본 연수의 신형이 움직였다.
비도문에 와 본 적이 없는 연수는 일단 기감을 펼쳐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모두 들렀다.
한 줄기 바람처럼 들어가 바람처럼 나오는 연수.
비도문의 안채에 들어온 지 정확히 한 시진이 지나자 연수는 마지막 남은 용모파기를 꺼내 들었다.
‘이제 하나.’
목표한 인물들을 모두 죽는지도 모르게 암살한 연수의 눈이 한 전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주변에 지키는 드러난 무사만 열둘. 그 외에 몸을 숨기고 있는 호위는 다섯.
저곳에 비도문의 문주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저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이 조용히 처리하기에는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일단은 몸을 숨기고 전각을 주시하는 연수.
이 각 정도가 지나자 전각 밖으로 나오는 세 사람.
한 명은 분명 용모파기로 확인한 비도문주가 확실했다.
문제는 남은 두 명의 무인이었다.
무당파의 장로와 가슴에 극자를 수놓은 무림맹의 무인.
무당파 장로와 비도문주를 독대할 정도의 무인. 거기에 무당파 장로나 비도문주에 비해 밀리지 않는 기운.
분명 무림맹의 요직에 앉아 있는 이가 분명했다.
‘어쩔까?’
연수의 계획은 최대한 야심한 밤에 들키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요인을 암살한 후 호북을 떠나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검흔은 암살대상의 목에 확실히 남겨 놓았다.
잠시 세 사람을 바라보던 연수.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무당의 장로와 무림맹의 무인은 방금 자신들의 생명이 연장되었음을 꿈에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서부터 꼬리를 잡혀 추적을 당하기 시작하면 불편한 점이 많았다. 특히나 무림맹의 추적은 집요한 곳이 있어서 생각보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물론 웬만한 천라지망따위 돌파할 자신이 있었지만 벌써 자신의 동선을 저들에게 들키는 것은 계획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었다.
두 무인을 배웅한 비도문주는 발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이동했다.
몸을 숨기고 그의 뒤를 따르는 다섯 호위와 연수.
비도문주가 침소에 들자 그의 침소 앞으로 한 줄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갑자기 부는 바람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비도문주는 등에 불을 옮겨 붙이고는 탁자에 앉아 책을 꺼내 들었다.
연수는 마지막 호위의 목을 베며 새로운 단도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과연 그동안 썼던 단검과 다르게 한번 털어내는 것만으로 깨끗이 피가 떨어져 나가 하얀 도신을 드러내는 단도.
비도문주가 책장을 넘기는데 촛불이 잠시 흔들렸다.
책장이 완전히 넘어가는 순간.
“누, 누구시오.”
자신의 목 옆으로 단도를 들이대고 자신의 팔을 붙잡은 괴인에 의해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비도문주.
“제법이네. 감이 빨라. 행동도 빠르고. 하지만 신호를 보내게 할 수는 없는 처지라서.”
연수의 손아귀에 힘이 더 해지자 비도문주의 손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도.
비도의 끝에는 호각이 달려있어 던지면 소리를 울리는 방식인 것 같았다.
“대체 누구시오?”
“암수일살.”
“...”
암수일살이라는 말에 조용히 눈을 감는 비도문주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당의 장로와 무림맹의 극목각주에게 암수일살이 노릴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은 직후였다.
무림맹과 무당이 항상 주시하며 비도문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받고 무인들을 더 파견하기로 한 지 고작 이 각이 지나지 않았는데 자신의 목에 암수일살의 단도가 들이대 져 있었다.
“강서혈변의 참화로는 그 분노가 풀리지 않았던가?”
강서혈변. 암수일살이 무당 제일 검과 비도 문도들을 참살한 사건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뭐 그 외에···.”
“밖에···!!”
연수의 말을 끊으며 큰소리를 지르던 비도문주의 목 줄기가 쩍 갈라졌다.
“밖에 아무도 없긴 한데, 큰소리는 곤란해.”
“ㅎ어어어”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내며 겨우 고개를 돌려 연수를 올려다보는 비도 문주의 목에서 그제야 피가 쏟아졌다.
그대로 절명한 비도 문주.
“그런 눈 하지 마. 전쟁 중이잖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수의 신형이 사라졌다.
객방으로 돌아오자 좁은 객방안에 여섯 명의 일행들이 뜬눈으로 연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다들 모여서. 눈이라도 좀 붙이고 있지.”
갑자기 들려오는 연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여섯명의 시선이 연수에게 쏠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떨리는 눈빛으로 연수를 바라보는 중년인.
씩 웃으며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이는 연수였다.
“오! 열 놈 모두를···. 훌륭하십니다.”
“훌륭하긴. 비도문에 무당파의 장로와 무림맹의 높은 양반이 와 있던데, 그 두 놈은 죽이질 못했어.”
“무림맹? 비도문에 왜 왔을까?”
공숙의 질문에 소개가 대답을 대신했다.
“뻔하죠. 중소문파에서 소극적인 대응을 하며 무인들을 파견하지 않으니까 전력을 내놓으라고 왔겠죠. 정작 지들은 피 흘릴 준비도 하지 않고.”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에 극자가 쓰여 있는걸 봤어. 무림맹 놈 맞지?”
“극이라면···. 아마 극목각의 각주쯤 되었겠군요.”
“극목각?”
중년인은 목소리를 다듬으며 대답했다.
“무림맹의 정보단체 중 하나입니다.”
“정보단체라···. 죽이지 않길 잘 했네. 일을 벌인 게 더 빠르게 무림맹에 전해지겠어. 분명 그들의 시선이 호북으로 쏠릴 거야.”
“예. 정말 큰일을 하신 겁니다.”
“큰일은 시작도 안 했어. 진짜 큰일은 남궁세가를 지울 때야. 안 그래요? 누이.”
공숙의 눈이 세로로 찢어지며 차가운 한기가 퍼져 나왔다.
“그럼! 그놈들을 찢어 죽일 순간이 머지않았어.”
“그다음에는 무당을 지울 날도 머지않았을 거다. 소개야.”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꽉 쥐는 소개.
“저, 저기···. 하, 한기가···.”
좁은 방에서 절정고수의 한기를 버티지 못한 무인 하나가 덜덜 떨며 입을 열자 공숙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이름이 도석이라고 했나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세 명의 일류 무인 중 도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인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